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니카 Apr 14. 2022

 Virgil Abloh를 기억하며...

루이뷔통 남성복 수석 디자이너 오마쥬 전시

작년 9월 22일부터 시작해서 올해 4월 3일까지 장장 6개월 넘게 진행된 모로조프 전시회가 막을 내렸다. 이제 또 다른 새로운 전시회를 준비 중인 루이뷔통 재단. 그 사이에 4월 13일부터 2주 동안 Virgil Abloh 오마쥬 전시를 한다. 무료 전시다. 그는 작년에 41세 나이로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그는 루이뷔통 남성복 수석 디자이너로 뛰어난 감각과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세계에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과 찬사를 받았다.


전시 첫날 제일 첫 시간대로 예약을 하고 전시장으로 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가까워서 쉽게 전시장으로 갈 수 있었다. 루이뷔통 재단은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교통이 불편하다. 지하철 역에서 좀 걸어야 해서 샹젤리제에 내려서 루이뷔통 재단 버스를 타고 입구까지 오는 방법이 있다. 또는 사블롱 역에 내려서 숲으로 걸어오면 된다. 루이뷔통 재단이 볼로뉴 숲 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주변 자연경관은 매우 좋은데, 찾아오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나는 숲 근처에 살아서 쉽게 드나들 수 있다. 숲 근처라고 하니까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 <숲 속의 자본주의자>가 생각난다. 초록빛 광활한 숲 속에 럭셔리 브랜드 현대 미술관이 떡하니 들어선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루이뷔통 재단이 마치 숲 속의 자본주의자 같기도 하다. <월든>도 조금씩 읽고 있는데, 나는 숲 옆에 살지만 숲 속에 살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빗물에 씻겨 흐물거리는 개똥을 요리조리 피해 전시장으로 갔다. 명품 오픈런도 아니고, 전시회 오픈런인가. 첫 시간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이 늘어섰다. 다들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버질 아블로(Virgil Abloh, 1980년 9월 30일 ~ 2021년 11월 28일)는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기업가이다. 그는 2018년부터 루이뷔통 남성복 컬렉션 아트 디렉터를 맡았으며, 2021년 초 LVMH 브랜드 전반에 걸쳐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로 일했다. 아블로는 2013년에 설립한 패션 하우스인 밀라노 기반 레이블 Off-White의 CEO이기도 했다.  시카고 스트리트 패션에서도 일했던 경험이 있는 아블로는 2009년 미국 래퍼 Kanye West(Ye로 알려져 있으며, 와이프는 킴 카디시안이다)와 함께 Fendi에서 인턴십으로 국제 패션계에 입문했다. 그 후, 두 사람은 Off-White를 창립하는데 시작하며, 예술적으로 협력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프랑스 럭셔리 패션 하우스의 아티스틱 디렉터가 된 아블로는 Time Magazine에서 2018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뉴욕 타임즈는 스트릿 웨어와 럭셔리 의류를 연결한 아블로의 디자인 미학을 극찬한 바 있다.


첫날 오전부터 사람들 줄이 길다. 오디토리움에 설치된 사진들. by 모니카


아블로는 1980년 9월 30일 일리노이 주 록포드에서 아프리카 가나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재봉사였고, 아버지는 페인트 회사를 운영했다. 아블로는 Rockford에서 자랐으며 Boylan 가톨릭 고등학교에 다녔고 1998년에 졸업했다. 그는 2002년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토목 공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6년 IIT(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건축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블로가 IIT에 다녔을 때, 건축가 Rem Koolhaas(프라다의 런웨이 컬렉션 작업)가 설계한 건물이 캠퍼스에 세워지자 그는 패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건축학을 공부하면서 티셔츠를 디자인하고 블로그 Brilliance에 패션과 디자인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래퍼 및 디자이너로서 일을 하는 동안 Abloh는 Louis Vuitton CEO인 Michael Burke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또한 Off-White라는 브랜드의 패션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이후 루이비통이 오프 화이트를 인수했는데, 인수액을 밝혀진 바 없으나 어마어마한 액수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는 펜디 인턴쉽이 고작이었는데, 콧대 높은 프랑스 전통 럭셔리 브랜드 루이비통의 흑인 최초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되어 전 세계 패션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프랑스 패션계는 꽤나 보수적인 면이 있는데 프랑스 클래식 브랜드에 스트릿 패션으로 유명한 미국계 흑인 디자이너를 발탁했으니 놀랄 수밖에. 패션계 엘리트 코스를 착착 밟아온 사람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럭셔리 브랜드 수석 디자이너 자리였다. 그 당시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고 있었다고 한다. 아블로는 스트릿 패션을 선두한 사람이라 자칫 럭셔리 이미지가 저급해지는 것은 아닌가 우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루이뷔통 의류 매출이 올랐다.


그의 강점은 소통과 협업이라고 한다. 젊은 세대의 취향을 파악하고,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는 것에 능했다. 시장의 요구를 빨리 캐치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유연한 소통을 바탕으로 여러 브랜드와 협업했다. 익히 잘 알려진 나이키 The Ten (그는 실제 마이클 조던을 매우 좋아했다), 이케아, 에비앙, 리모아, 벤츠 등등 가구, 음료, 캐리어, 자동차 등 산업군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인 협업으로 사람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그는 자신이 옷 만드는 법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반면, 트렌드를 읽고, 콘셉트를 정하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패션 아이템을 구매하게 되는지를 안다고 했다. 사람들이 옷 박음질, 원단 그런 것을 보고 구매하기보다는 브랜드를 보고 선택하며, 내가 이 옷과 신발을 착용했을 때 사람들에게 풍기는 내 이미지는 어떠하며, 패션 콘셉트 등을 보고 구매한다는 것이다.  소통과 협업을 통해 그는 통찰력과 지혜를 꾸준히 키워온 것 같다.


그는 '3% 접근법'을 말했다.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변기를 놓고 샘이라고 하면 샘이 된다는 것과 같은 논리다. 뒤샹은 변기 한편에 제작연도와 용품업체 이름을 쓰고 이것을 예술 작품이라고 뉴욕 독립 미술가 협회전에 출품했다. 기존 것에서 약 3%로만 변형 또는 편집을 해도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기존 것에서 어떻게 변형하고, 편집하고, 바꾸고 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창조물이 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그는 랄프 로렌 서브 브랜드 난방에 Pyrex라는 글자를 등 뒤에 크게 프린팅 함으로써 4만 원짜리 옷을 약 50만 원 정도에 팔아서 대박을 터트린 적이 있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아이디어는 승승장구해서 콧대 높은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수석 디자이너, (이후 총괄 디렉터)까지 오르게 됐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가 재봉사 일을 하면서 곁에서 재봉일을 재미 삼아 보며 자랐다. 어릴 때 보고 경험하는 것이 한 인간의 무의식에 남는다는 내 신념이 또 한 번 증명된다. 그의 어머니는 실력 있는 재봉사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재봉사 일을 아이에게 강요하지 않고, 그냥 곁에서 보여주며 약간 가르쳐주는 정도였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어머니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재봉사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재봉이란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얘기해줬다고 한다. 부모님은 공부를 곧잘 하는 아블로가 좋은 대학에 가서 공학 또는 건축학을 전공하길 바라셨다고 한다. 아프리카 가나 이민자 부모님의 마음은 자식이 미국에서 조금 더 성공해서 좋은 직장을 얻어 편한 삶을 살기 바라셨을 테다. 그는 어릴 적 패션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여느 아이들처럼 농구하며 놀고, 쇼핑 다니며, 그렇게 지냈단다. 특별히 뭐가 되고 싶다, 뭐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어릴 적부터 음악은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마이클 잭슨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마이클 잭슨과 마이클 조던 관련 영상이 전시장 한편에 있었다. 그는 디자이너 일을 하면서 디제잉도 겸업했다. 그만큼 음악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는 건축학 석사를 하는 과정에서 교정에 세워진 건축물을 보고 패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패션 쪽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온 것이다. 어릴 적 부모님이 재봉사를 강요했다면 패션 쪽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재봉일을 하라고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직업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심지어 자부심을 느꼈다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부모는 내가 좋으니 너도 좋아해야 한다던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일을 아이에게 강요해서도 안된다.  부모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어느 정도 가지고 그냥 성실하게 묵묵히 해나가면 된다. 부모의 삶 자체가 아이에게는 교육이다. 아이는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부모의 삶을 보며 자란다.


Abloh 그의 아내 Shannon   자녀와 함께 시카고에서 살고 있었다. 2019 Abloh 암의 일종인 심장혈관육종 진단을 받았지만 진단을 비공개로 유지했다. 2021 11 28 시카고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가족의 허락 하에, LVMH 11 30 마이애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스핀아웃 패션쇼에서 "Virgil was here"라는 주제로 아블로에게 경의를 표했다.


(좌) 영상물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이 많다 (중) 사진과 글... (우) 모든것은 중요하다라고 적혀있는 의자


Virgil Abloh 대한 사랑의 기억과 영예를 담은 "Coming of Age" 루이뷔통 재단에서 공개됐다. 원래 2019 "Coming of Age" 전시회의 연장선으로 새로운 물리적 구현이자, Virgil 세계에 대한 오마쥬이다. 2019 Virgil Abloh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Coming of Age"라는 그룹 전시회를 기획했다. Little Big Man Gallery 파트너십으로 진행되는  전시회는 계급, 인종, 사회 경제학, 하위문화, 고립, 동지애  젊음과 소년기 개념, 다양성  복잡성에 중점을 둔다.


입구에 들어서자 신나는 현대 음악이 크게 들렸다. 마치 클럽에  듯한 기분이었다. 버질 아블로에 대한 소개글이 벽에 붙어 있었다.   면을 차지하는 수많은 영상물은 신나는 음악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연주회장으로 활용되는 지하 오디토리움으로 내려갔다. 천장에 줄을 묶어 수많은 사진을 걸어 놓았다. 사진이 마치 공중에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줬다. 수많은 사진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봤다. 주로 젊음, 청춘, 소년, 아이, 여성, 인종, 인권, 반전쟁, 다양성, 동성애, , 고립, 사회문제 등에 관한 사진들이었다. 기이하고, 기괴한 사진들도 있었고, 의미심장한 사진들도 있었다. 디스플레이를 잘해놨다. 곳곳에 그의 생전 영상을   있도록 설치해뒀다. 그의 하버드 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강연 영상을 시청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고, 디자인과 패션에 엄청난 열정이 있었다. 독특하고 창조적인 시각을 가졌고, 그것이 지금의 그의 위치를 가져다줬다고 생각한다.  사진에 시선이 머물렀다. 보라색 티셔츠를 일제히 입고서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 사진인데, 칠판 가운데 문구와  옆에 문에 작게 적힌 문구가  그대로  때린다.

'Don't wish for it. Work for it.' (바라지만 말고, 해라.)

'If you can learn self control, you can master absolutely anything.' (스스로 절제하는 법을 배우면, 너는 어떤 것이든 확실히 마스터할 수 있다.)


(좌) 젊음, 청춘, 꿈에 관한 사진이 많았다 (중) 루이비통이 들어간 재밌는 그림들 (우) 홀에 설치된 영상물 by 모니카


나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인간의 창조성, 예술성, 본성 등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고유한 창조성을 꾸준하게 키워나갈  있을까? 여러 인물들을 살펴본 결과, 있는 그대로의 개성, 특성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자유롭게 사고할  있도록, 되도록이면 제한을 두지 않고 놔둘  창조성이 발현된다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아블로는 가나 이민자 출신이다. 어머니는 재봉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 이달고 파리 시장 어머니도 재봉사 일을 하셨다.) 그는 부유하게 컸다고는   없을  같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 밑에서도 얼마든지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인물로 성장할  있다. , 부모가 싸우거나,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강압적이거나, 집안이 정신없으면, 창조성은 나오다가도 들어간다. 가난하고  배운 부모라도 아이를 사랑으로, 편안하게, 부부가 싸우지 않고, 아이에게 화내지 않고 그렇게만 해도 아이들은 자신의 고유한 창조성을 언젠가 어떻게든 발현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아이들은 창조적이며, 저마다의 천재성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아이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할  있도록 편안하고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버질 아블로는 자유로운 인간이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무섭도록 몰입하는 인간이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자신의 관심 분야를 꾸준히 모색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추진해나갔으며, 몰입과 집중으로 자신만의 창조적인 패션 디자인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생전에 장학 재단도 설립하고,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관련해서 흑인 인권 관련해서도 일을 하는  패션과 디자인으로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계속해서 끼칠  있는 사람이었는데 너무 아쉽다. 이것을 보면서 죽음 앞에서는 지난 세월도  번에 끝나는구나 싶기도 하고, 건강이 제일이란 생각도 들었다. 부인과 자녀들도 있는데, 앞으로  많은 것들을 세상에 보여주고, 역량을 펼칠  있었는데, 너무 아쉽게 세상을 떠났다. 는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사업도 하고, 디제잉도 하고, 온갖 브랜드와 협업하며,  년에 거의 대부분을 출장 다니며, 쉼없이 일했다. 패션  일이 힘들다고 익히 알고는 있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는 얼마나 일이 많고 바빴을까. 또한, 표절 등의 논란으로 소송도 여러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그가 세상의 관심과 비난을 동시에 받으면서 정신적으로 힘들기도 했을  같다. 최근 넥슨 창업자 김정주  등을 포함해서 천재적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사망 뉴스를 접할 때마다, 너무 일을 많이 하거나, 너무 유명해져도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유명해질수록 일도 많고, 세간의 비난도 많아지는  같다. 적당히 쉬어가며, 워라밸을 하면서 일을 했다면 세상에  오랫동안, 지속가능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있었을 텐데...  요즘 들어 '지속가능한'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수많은 이야기가 담긴  인간의 , 세상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는 화려한 경력, 사회적 지위, ...  모든 것도 죽음 앞에서는  순간에 조용해진다. 숙연해진다. 그래도 그가 죽은 ,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세계를 느끼기 위해 이곳에 모였으니 애써 위안과 위로를 해본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그에 관한 소개 글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

"Virgil is Here."

버질은 여기 있다. 그렇다. 비록 그의 육신은 여기 없을지라도, 그의 혼과 작품 세계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모인 우리들은 그의 세계를 함께 느끼고 있었다.  


(좌) 그에 관한 소개글 마지막 문장이 큰 울림을 준다 (중) 물 위에 설치한 빨간 샤또 (우) 아끌라마따시옹 공원에서 바라본 재단. 야외에도 전시 설치중 by 모니카


매거진의 이전글 문화 박람회라고 들어보셨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