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을 맞이하여 수전노를 관람하다
올해는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의 해이다. 그는 1622년 1월 15일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극작가, 배우, 시인으로서 프랑스 언어와 세계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코미디, 희극, 비극, 발레 등이 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 바로 맞은편, 팔레 루아얄(Palais Royal) 바로 옆에 위치한 코메디 프랑세즈(Comedie Française)에서 열리며, 이 극장을 몰리에르의 집이라고 불리기도 할 정도다. 루이 14세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립 1세를 비롯한 귀족들의 후원으로 몰리에르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왕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팔레 루아얄의 극장 사용을 허가받는 등 왕과 귀족들의 호의로 그의 극단은 왕실 연금을 받으며 왕의 극단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그러한 궁정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풍자극을 하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몰리에르에 관해 글을 쓰자면 너무 복잡하고 길어서 지면으로 다 서술하기에는 너무 방대할 것 같다. 몰리에르라는 극작가가 프랑스 문학과 문화 언어에 끼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몰리에르는 현대 프랑스 코미디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의 희곡에 사용된 많은 단어나 어구는 현재 프랑스어에서도 여전히 사용된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스카팽의 간계(Les Fourberies de Scapin) 2막 7장에서 Géronte는 갤리선(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 때 주로 노예들에게 노를 젓게 한 배)에 갇힌 것으로 의심되는 아들의 몸값을 요구한다. 그는 "무엇을 위해 그 갤리선에 가려고 했는가?"라고 되풀이했다. 즉, "도대체 이 갤리선에서 무엇을 하려 했을까?(Qu'allait-il faire dans cette galère)"라는 의미로 현대 프랑스어에서 '갤리선에 들어가려고 한다'라는 말은 불필요한 어려움을 굳이 하려고 하는 사람 또는 나쁜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갤리선은 배라는 의미이지만 모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몰리에르의 희극에 사용된 많은 어구들이 현대에도 쓰인다는 것은 그만큼 프랑스 언어 및 문학에 끼치는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인들의 그들의 언어, 문학, 문화예술을 매우 가치 있게 여기고, 전통과 역사를 잘 유지하고 이어오려는 경향이 강하다. 탄생 400주년을 맞이하여 코메디 프랑세즈는 물론이거니와 곳곳의 수많은 극장에서 그의 작품이 현대적으로 재탄생되어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옆 동네 퓌토를 지나가다 퓌토 극장 앞을 지나가는데 극장 앞에 몰리에르의 초상화가 있고 작품명이 함께 있는 깃발을 본 적이 있다. 아마 2022년 한 해 동안은 몰리에르라는 이름을 수없이 들을 것 같다. 지하철 내부 광고에도 몰리에르라는 이름을 수시로 만났다. 프랑스는 역사적인 문학가 또는 예술가의 탄생 몇 주년, 서거 몇 주년이라고 하면 그 한 해 동안은 그 인물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조명하는 것 같다. 작년에는 라퐁텐 우화를 만든 쟝 드 라 퐁텐의 서거 400주년인 해였다. 작년 한 해 동안 곳곳에서 라퐁텐 우화를 공연하고, 우화와 관련하여 대중적인 노래를 작곡가가 작곡해서 티브이에서 수시로 그 노래가 나왔다. 작년 한 해 우진이와 라퐁텐 우화를 두 번 봤다. 한 번은 Theatre de Sablon, 다른 한 번은 라디오 프랑스에서 하는 연극이었는데, 많은 아이들이 연극을 보러 왔었던 기억이 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그 한 인물을 기념하고, 기리기 위해, 다각적으로 행사를 하고, 또 그것을 모두가 즐기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까르나발레 파리역사박물관에서는 파리 역사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몰리에르를 전시실 한편에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파리 1구의 37 Rue de Richelieu에는 몰리에르 분수(La fontaine Molière)가 있다. 몰리에르 분수 위에 커다란 몰리에르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 분수대 앞에서 아이들이 몰리에르의 수많은 작품의 몇 소절을 서로 연극 형식으로 표현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 까르나발레 박물관 전시실 한편에서 계속 상영되고 있다. 나는 까르나발레 박물관에 갈 때마다 이 영상을 보는데, 볼 때마다 아이들이 300년 전의 대사를 외워서 감정을 실어 읊조리는 모습이 참으로 귀엽게 느껴진다. 프랑스는 어릴 적부터 연극을 많이 하는 편이다. 우진이도 학교에서 하는 방과 후 수업으로 연극을 매주 1시간씩 하고 있는데, 아이들의 감정 표현 및 감정 발달에 매우 좋은 것 같다. 표현력도 풍부해지고,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도 배운다.
이처럼 몰리에르의 해인데 나도 몰리에르를 함께 기념하고 축하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또한, 이제 코로나가 해제되어 각종 문화생활이 일상으로 돌아온 만큼 누릴 수 있을 때 마음껏 누려야 할 것 같았다. 프랑스는 여름휴가에 들어가는 7,8월에는 문화 행사도 휴가에 들어가기 때문에 6월에 집중적으로 문화생활을 즐겨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루브르 갈 때마다, 팔레 루아얄을 지날 때마다 자주 봤던 코메디 프랑세즈. 이곳은 프랑스 문화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건물 외관 회랑에는 역사적인 인물들이 쫙 늘어서 있다. 프랑스의 몇 안 되는 주립 극장 중 하나로써, 1680년에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역 극단이다. 1995년 프랑스 국영 기관으로 설립된 이 극장은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영구적인 배우 극단을 보유한 국립 극장이다. 건물은 팔레 루아얄 단지의 일부로 구성된다. 극장은 몰리에르의 집(La Maison de Molière)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는 이 극장을 후원하는 후원자 때문에 그렇게 불렸으며, 공식 명칭이 있지만 여전히 몰리에르의 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코메디 프랑세즈는 1680년 8월 8일 루이 14세의 칙령에 따라 당시 파리의 유일한 두 극단이 게네고 극단(Guénégaud Theatre)과 Hôtel de Bourgogne의 극단을 병합하여 설립됐다. 1673년 몰리에르가 사망하자, 게네고 극단은 마레 극장과 몰리에그 극단의 합병으로 결성되고, 그 후 왕실로부터 풍부한 보조금을 받았다. 이 극장은 몰리에르 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800년대 증축 및 개조됐고, 심각한 화재 후 1900년에 재건했다.
평일 낮에 하는 공연을 가장 선호하지만 평일은 대부분 저녁이 많은 편이다. 내가 보고 싶은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닌, 내가 가능한 시간에 하는 공연을 봐야 하는 이러한 일은 어린아이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만들어낸 상황이다. 미혼일 때는 시간과 상관없이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결혼을 하면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배우자와 시간을 상의해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직 어리다면 이젠 내가 보고 싶은 것보다 볼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지가 좁아든다. 저녁 공연은 웬만하면 피한다. 집에 돌아올 때 위험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다. 주말 낮에 하는 공연을 찾았다. 바로 몰리에르의 수전노. 몰리에르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타르튀프>, <수전노>, <상상병 환자>, <인간 혐오자>, <스카펭의 간계>, <부르주아 귀족>, <아내들의 학교> 등 수많은 작품이 있다. 나는 사실 인간 혐오자를 보고 싶었다. 제목이 강렬하게 나를 이끌었다. 하지만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 수전노를 선택했다.
6월 11일 토요일 오후 2시 공연, 나는 공연 시작 2시간 전에 집을 나섰다. 아빠와 아들은 둘이서 좋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다. 1시간 전에 도착해서 바로 맞은편 루브르에 갔다. 관광객들로 가득한 루브르. 요즘 한창 파라오 특별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잠깐 보러 갔다. 파라오에 대해,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주요 목적은 수전노 관람이기 때문에 파라오는 가볍게 맛보기로 훑어보고는 다음에 다시 와서 자세히 감상하기로 했다. 코미디 프랑세즈 입구에 들어서니, 마침 몰리에르 400주년 기념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계단을 올라가는 곳곳에는 몰리에르 초상화 및 관련 작품 속 장면 및 주요 인물들의 그림이 수없이 걸려있었다. 전시 이름도 '천 개의 얼굴을 가진 몰리에르(Molière aux mille visage)'였다. 속으로 루브르를 가지 말고 이곳으로 바로 올 걸이란 생각을 했다. 안에는 볼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림 하나하나, 조각 하나하나가 다 진귀한 작품이었다. 몰리에르 외에도 주요 극작가의 동상과 이름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입구 천장은 화려했다. 대게 프랑스의 박물관 천장에는 주요 인물의 이름이 모서리에 새겨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요 박물관 미술관에서는 눈 앞의 작품만 보지 말고 꼭 고개를 높이 들어 천장을 바라볼 것을 추천한다. 입구 천장 네 개 모서리에는 몰리에르(Molière, 1622-1673), 코르네유(Corneille, 1606-1684)), 볼테르(Voltaire, 1694-1778), 하신(Racine,1639-1699)의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이름은 금색으로, 그 위에는 각 인물이 살았던 시기가, 그리고 이름 밑에는 날개 달린 천사가 이름을 떠받치고 있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네 명의 극작가들인 것 같다.
오페라 가르니에 및 바스티유를 비롯한 대부분의 극장에는 레스토랑 또는 바가 있다. 미리 도착해서 사람들이 커피와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 있는데, 실내가 화려하다. 옛날 궁정 사람들이 공연을 보고 이런 곳에서 연회를 즐기는 상상이 절로 된다. 그만큼 옛날 궁정의 모습과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려는 모습이 곳곳에 있는 프랑스이다. 물론 다른 유럽 국가도 마찬가지다.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 및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안에도 다과를 즐길 수 있는 연회실이 화려하게 마련되어 있는데,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줬던 것으로 기억된다. 바에서는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전시 중인 그림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와서 전시를 천천히 더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얼른 자리에 착석했다. 내가 앉은 곳은 코르베이(Corbeille)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2층, 이곳으로 하면 1층인 곳이다. 지상층은 오케스트라(Orchestre), 한 층 위는 코르베이(Corbeille), 그 위는 발코니 1층(Balcon 1), 그 위는 발코니 2층(Balcon 2), 마지막은 엄피떼아트르(Amphithéâtre) 석이다. 이는 주요 극장마다 용어를 통일해서 사용하고 있다. 코르베이는 직역하면 바구니란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사람들이 마치 바구니 속에 쏙 들어가 있는 듯한 모습처럼 보였다. 공연장 내부는 생각보다 화려하진 않았다. 오페라 가르니에는 오래되긴 했지만 화려함이 있고, 밀라노, 빈 오페라 극장은 말할 것도 없이 화려하며, 오페라 바스티유를 비롯한 라디오 프랑스 등의 공연장은 현대식으로 만들어서 음향 시설이라던지 좌석 배치 등 매우 깨끗하고 현대적이며 세련됐다. 코메디 프랑세즈는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어둡고, 낡은 느낌이 전반적으로 지배했다. 천장도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다. 가르니에 천장화는 샤갈의 작품이다. 이곳 천장화는 Mazerolle 1879의 작품인데 흐릿해서 자세히 살펴보진 못했다.
드디어 막이 올랐다. 어둔 배경으로 무대 위 장식은 다소 심심한 편이었다. 2시간 동안 공연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소품이 더욱 다채로워지긴 했다. 연극 시작하기 5분 전에 10명의 학생들이 무리로 들어왔는데, 옆에 간이 의자에 쪼르르 앉았다. 10대로 보이는 학생들이었는데, 당일 연극 시작 1시간 전에 표를 구입하면 70%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선생님의 인솔 하에 단체로 왔는데, 곳곳에 젊은 10대로 보이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프랑스는 문화예술을 받아들이고 즐기기에 정말 좋은 나라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 유명한 몰리에르의 작품을 그 유명한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공연 시작 10분 전에 표를 급하게 구매해서 저렴한 가격에 2시간 동안 감상할 수 있는 나라에 산 다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루브르, 오르세 등 한국에서는 오기도 힘든 이런 미술관을 이곳 학생들은 학교에서 단체로, 또는 개인적으로 수시로 드나들며 세계적인 미술 작품을 무한정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는 만 18세 미만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너무도 많다. 한국인인 나는 내 나이 40년이 다 되어 처음 와보는 극장을 이곳에 사는 학생들은 수시로 쉽게 드나들며 세계적인 문학 작품을 접하기 때문에 어릴때부터 감수성 및 예술성 개발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문화생활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곳이 너무도 많은 파리. 유년기를 파리에서 보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문화 예술적으로 크나큰 축복이란 생각이 든다.
연극을 다 알아듣지 못해서 다소 답답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공연을 감상해나갔다.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예를 들어, 잔디를 깎는데 기계가 무선 최첨단이며, 헤드폰을 착용하고 힙합을 듣는지 춤을 추며 잔디 깎는 장면이 나온다. 누가 어떻게 재해석 하느냐에 따라 고전이 다양한 현대극으로 연출 가능한 것이 연극의 매력이자 묘미인것 같다. 미장센(Mise en Scène), 즉 연출하는 사람의 개성, 창의성, 창조성에 따라 같은 고전이 얼마든지 창조적 현대극으로 재탄생 가능하다. 이번 수전노는 Lilo Baur라는 사람이 맡았다. 극단 소속 단원들은 기본적으로 연극을 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연극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는 그저 전반적인 분위기와 발성 등을 위주로 보았다. 표현력 등 디테일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주요 인물들을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봤는데, 파리국립고등음악원 연극과를 나오는 등 기본적으로 어릴 적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습하고 개발한 사람들이었다. 프랑스는 연극이 발달한 나라다. 파리 곳곳에 크고 작은 극장이 수없이 많다. 소극장도 많이 있다. 음악원이라고 불리는 콩세흐바투아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져 있다. 음악, 무용, 연극. 그만큼 연극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연극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 연극이 발달된 나라, 극단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나라이다.
연극이 끝나고 나는 다시 한번 전시실을 가볍게 둘러본 뒤, 극장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재즈 선율이 들렸다. 코메디 프랑세즈 건물 바로 앞에는 거리 공연을 자주 하는 편인데, 이 날에는 피아노, 콘트라바스, 드럼 트리오가 재즈를 연주하고 선율에 맞춰 많은 사람들이 짝을 지어 스윙 댄스를 추고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사람들이 춤을 너무 잘 춰서 춤 동호회에서 나온 사람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한 곡이 끝나자,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지더니, 또 다른 사람을 찾아서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서로 처음 만난 남녀인데 서로 연습이라도 한 듯 호흡이 척척 맞았다.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데 그 즉흥적인 춤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한 남자가 방향이 이렇게 하자고 몸짓으로 신호를 주면 파트너 여성은 바로 캐치하고 호흡을 맞췄다. 와! 방금 본 수전노 연극보다 훨씬 재미있고 신이 났다. 나는 40분을 그렇게 스윙 재즈 댄스를 넋 놓고 봤다. 3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공간을 가득 채워 춤을 추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땀이 나고, 등이 다 젖도록 서로 춤을 췄다. 마치 '2년 동안 너무 힘들었죠? 사람들이 그리웠죠? 사람의 살결과 냄새가 그리웠죠?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우리 지금 이 순간을 즐겨요'라는 메시지가 표정과 몸짓과 발짓이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 서로 춤만 추는데, 음악과 몸짓에서 '우리 다시 이렇게 세상에 나와서 반가워요. 나는 당신을 모르지만, 우리가 이 날 이 순간, 함께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죠.'라는 말이 내 귓가에 들렸다. 팔레 루아얄에서 웨딩 촬영을 하던 예비 신랑 신부가 이 광경을 보고 잠깐 둘이서 춤을 췄다. 사진사는 예상하지 못한 인생의 한 순간을 아름다운 두 커플을 위해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춤을 추는 사람들 중에 유독 눈이 가는 여성이 있었는데, 춤을 전문적으로 추는 사람인지 춤을 매우 잘 췄다. 몸도 날씬하고 날렵했으며, 무엇보다도 춤출 때 그녀의 표정은 세상 다 가진 그런 행복 그 자체였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춤이 매우 중요한 그런 사람 같아 보였다. 그녀는 파트너를 5명 정도 바꿔가며 춤을 췄는데, 파트너 또한 그녀의 몸짓을 잘 받아주는 그런 춤꾼들이었다. 수많은 춤추는 사람들을 루브르 박물관, 코메디 프랑세즈, 팔레 루아얄 건물이 감싸고 있었다. 문화와 예술과 축제가 한 데 어우러지는 그런 인생의 한 순간이었다. 집에 가려고 지하철을 타기 전, 신랑에게 전화를 했다. 부자는 퓌토 테니스 장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으니 이쪽으로 오라고 했다. 이미 시간은 오후 5시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무척 피곤했지만 아이가 그토록 엄마한테 자신이 테니스 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니 지하철을 타고 또 한참을 걸어 테니스 장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