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 소리를 탐색하고 발견하는 것부터
“저기… 혹시… OO 어머니세요?”
“네, 전데요..”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 마지막날, 어린이집 외부 음악 강사님이 나를 보더니 건네는 첫 한마디는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가 만 2세 반 정도 되었을 무렵, 파리 16구에 위치한 공립 어린이집을 약 9개월가량 다녔다. 만 3세가 된 아이들은 이제 곧 프랑스 유치원인 마떼흐넬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매주 금요일마다 외부 음악 강사가 어린이집을 방문해서 만 2세 아이들에게 음악 수업을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음악 선생님의 얼굴을 뵌 적도, 음악 수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음악 수업 중인 교실 창문을 천막으로 쳐서 학부모들이 들여다보지 못하게 막아뒀기 때문이다. 수업 중에 방해가 된다고 그런 것 같은데, 이에 대해 그 어느 부모도 음악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의문을 갖지 않고, 어린이집 방침에 순순히 따랐다.
세상의 다양한 소리를 탐색하고 발견하기
엘리자베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음악 선생님은 플루트를 전공하셨고,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며 세상에는 다양한 소리가 있다는 소리 일깨우기 수업을 하셨다고 했다. 그동안 음악 수업을 쭉 진행하면서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이 아이를 유심히 지켜봤다고 했다. 아이가 음악에 재능이 있어 보인다며 마치 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듯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내게 말을 이어갔다.
“약 2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 중에서 유독 이 동양에서 온 아이가 눈에 띄더라고요. 음악을 좋아하고 재능도 있어 보여요.”
“그럼 제가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악기를 배워야 하나요?”
“아니요. 지금은 세상의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세요. 스스로 주변의 소리를 발견하고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을 주세요. 악기는 이후에 배워도 늦지 않습니다.”
음악 선생님 입에서 흘러나온 음악적 재능이란 두 단어를 듣자마자 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가 떠올랐다. 조성진 씨도 파리에서 유학을 했다는데 우리 아이도 이곳에서 음악가의 길을 걷는 것일까라는 상상을 순간 잠시 했다. 한국이었다면 자신의 아이가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말을 선생님께 들으면 근처 동네 피아노 학원이라도 끊어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아이를 다양한 소리에 노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문화예술 강국인 프랑스에는 음악과 관련된 아뜰리에가 많다. 센 강을 바라보고 있는 파리 16구 라디오 프랑스 건물에서는 영유아부터 초등학생 아이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음악 아뜰리에가 수시로 열린다. 실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를 들은 뒤 아이들이 무대 위로 올라가서 악기를 만져보고 직접 옆에서 소리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진다. 이를 통해 세상에는 다양한 악기가 있으며 다양한 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이 외, 오페라 하우스 음악 및 무용 관련 아뜰리에, 라 빌레뜨에 있는 Cité de la musique 음악 아뜰리에 등 무수히 많다.
2017년, 아이 돌잔치를 끝내고 우리 가족은 다 같이 파리에 왔다. 아직 어린 이아라 주로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햇살 좋은 오후에는 집 근처 하넬라그 공원 놀이터에서 놀며 시간을 주로 보냈다. 그날도 어김없이 공원 놀이터에서 미끄럼을 타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빵이나 조금 사갈 겸 동네 빵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늘 지나다닌 길이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사람 사는 주택이라고 여길법한 곳에 음악 교실이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음악 학원이었다. 이곳은 학원 문화가 발달되어 있지 않다. 한국은 학원이라는 두 글자를 아파트 단지, 길거리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파리는 병원도 학원도 눈에 띄는 간판을 달지 않는다. 간판 없는 곳도 있다. 두 눈 크게 뜨고 잘 찾아봐야 겨우 이곳이 병원인지 사무실인지 알 수 있다. (이는 도시 조경 정책의 일환으로 알고 있다. 무분별하고 통일성 없는 간판으로 인해 도시 미관을 해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파리는 건축 양식의 통일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파트 지하에 있는 이곳은 눈에 띄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꽤 넓은 공간으로 이뤄진 음악 교실이었다. 악기를 배우는 것이 아닌 소리 일깨우기 수업이었다. 댄스, 발레, 음악 등으로 이뤄진 수업 중 음악을 선택해서 일주일에 한 번 30분씩 아이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3개월 동안 하는 것이라고는 다양한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을 가져와서 소리를 내는데 ‘이런 물건으로도 소리를 낸다고?’ 의아했다. 만 1세 정도 되는 아이들은 그저 신기한지 물건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던져보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이따금 선생님은 바이올린 연주했는데 우진이는 신기하게 생긴 악기를 보고 고개를 한참 위로 든 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 아이의 두 눈을 바라보니 맑고 투명한 두 눈은 약간은 낯설지만 뭔가 신비로운 소리로 가득한 이 세상이 그저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만 3세 또는 4세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등 악기를 배우는 것이 아닌 세상의 다양한 소리를 그저 듣고 발견하고 탐색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프랑스식 음악 교육. 고사리 손으로 꾸역꾸역 억지로 바이엘 체르니를 배우는 것이 아닌 즐겁고 신나게 음악을 즐기는 것부터 하는 것이 진정한 음악 교육의 시작이라는 것을 배웠다. 어느 날 아이는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잡더니 책상을 몇 차례 두드리고 그다음 유리컵을 몇 차례 두드리며, 마치 신기한 것을 발견한 듯 소리쳤다.
“엄마, 두 개소리가 다르게 나!”
“그래, 정말 소리가 다르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음악 교육이 아닐까? 조그만 연습실에 들어가서 1시간 동안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무한 반복 연습하고 도장 깨기라도 하듯 선생님이 그려놓은 포도알을 연필로 쓱쓱 그어가며 하나씩 없애는 방식이 아니다. 내 주변에 있는 익숙한 물건에서 어떤 소리가 나고, 각 물건마다 어떻게 미묘하게 소리가 다른지 스스로 호기심을 가지고 발견해 나가는 것이 이 시기 아이들에게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아이는 자연 속에서 물이 흘러가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벌레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한 해, 두 해를 보냈다.
프랑스 음악 교육원, 콩세르바뚜아
어느덧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악기를 하나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학교 생활 적응하랴 악기 배우랴 힘들거나 자칫 스트레스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음악원 등록은 6월에 하는데 사실 작년 6월에 피아노 등록에 성공했다. 경쟁이 심한 편인데 성공했으니 수업을 받게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스멀스멀 드는 생각이 9월 개학과 동시에 혹시 학교 다니면서 피아노도 같이 하면 스트레스받지 않을까 싶어서 고민 끝에 등록을 취소했다.
아이는 초등학교 금세 학교 생활에 적응했고 읽기 및 쓰기를 곧잘 따라갔다. 학교 생활이 안정적인 것을 보고, 한 학기가 지났을 무렵,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음악원에 피아노 또는 바이올린 남는 자리가 있는지 문의했다. 피아노는 자리가 없고, 다행히 바이올린은 현재 3자리가 남았다고 했다. 매년 등록은 6월에 하는데 사실 작년 6월에 피아노 등록에 성공했다. 만 7세가 가까워진 아이는 2023년 1월 중순부터 처음으로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첫 사교육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아이들은 각 동네마다 있는 꽁세흐바투아(Concervatoire)라고 불리는 음악원에서 음악을 배운다. 물론 이 외 사립 음악원 또는 개인 방문 과외 등 다양하지만 주로 이를 통해악 기를 배운다. 각 동네마다 있는 음악원마다 입학 연령 및 수업 내용 등이 조금씩 상이하지만 큰 틀은 비슷하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뇌이쉬르센 음악원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기타, 하프, 클라리넷, 오보에, 색소폰, 첼로, 성악 등 악기 수업 외 연극 수업도 있다. 이곳 기준으로 수업료는 30분당 20유로(약 26000원)정도. 적지 않은 가격이다. 또한, 음악원은 각 가정 수입에 관계없이 정해진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음악 교육은 사이클 대로 움직인다. 사이클 1은 만 7세부터 12세까지, 사이클 2는 만 12세부터 만 17세까지, 사이클 3은 만 17세부터 성인까지이다. 개인의 실력에 따라 조금씩 사이클이 앞당겨지거나 느려지기도 한다. 수업은 1:1 개인 악기 수업 및 그룹 이론 수업으로 이뤄진다. 그 외, 기타, 드럼, 키보드, 보컬로 구성된 스쿨 오브 락이라는 밴드도 만 7세 이상부터 활동 가능하다. 이처럼 음악원에 한번 들어가면 음악원이 맞춰놓은 사이클대로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면 된다. 여기저기 더 좋은 학원 없나 기웃거릴 것 없이 음악원을 믿고 아이를 맡기면 되니 편하다.
만 4세부터 6세까지는 음악 일깨우기 수업으로 약 8명으로 구성된 그룹이 함께 다양한 소리와 음악을 듣고 악기를 경험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학교에 가지 않는 수요일에 음악원 수업이 가장 많으며, 그 외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나고 수업을 받는 경우도 있다. 아이는 현재 매주 수요일 음악원에서 30분 개인 수업을 받는다.
연습은 집에서 따로 해야 한다. 음악원에서 연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된다. 아이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수준이다. 매일 꾸준히 연습을 해야 실력도 늘지만 강하게 억지로 시키면 있던 흥미도 달아날 것 같아서 매일 15분씩 연습하자고 말은 하지만 아이가 연습하기 싫어하는 날에는 그냥 넘어간다. 실력은 거의 제자리 수준이지만 괜한 욕심부리다 악기를 멀리할까봐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음악은 연습이 중요한데 일주일에 30분 수업 받는게 거의 전부다. 집에서는 연습을 잘 안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한국의 학원 문화가 장점도 있다. 집이 아닌 학원이라는 공간에서 친구들과 같이 연습하면 재미도 있고 친구들과 은근한 경쟁도 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 임윤찬 씨 등 유명한 음악가들도 다들 처음에는 동네 학원에서 시작했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악기를 탐색하고 발견하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부담 없이 즐기길 바란다. 이처럼 프랑스는 음악을 처음 시작하는 방식이 동네 음악 학원에 가서 레슨 받고 연습하는 것이 아닌 음악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재미를 붙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음악이란 콩쿠르에서 1등을 해야 하는 경쟁의 대상 또는 무대 위에서 하나도 틀리지 않고 연주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닌 나와 다른 사람들의 귀가 즐겁고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즐거운 세상이다.
자유롭고 편안한 음악 발표회
음악원에서는 한국의 학원 발표회처럼 중간중간 학생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악기 실력을 무대 위에서 선보인다. 이메일로 초대장을 받고는 아이와 함께 음악회가 열리는 곳으로 갔다. 동네 도서관 옆에 위치한 Hotel Arturo Lopez로 아이 손을 잡고 갔다. 이곳은 이전에 대부호가 살았던 저택이었는데 이곳에서 사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집주인과 친분이 있던 살바도르 달리도 이곳을 드나들며 사교 활동을 했다. 천정을 포함한 온 사방 벽이 실제 조개껍데기로 가득한 조개껍데기의 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달리의 발자취를 느끼며 음악을 듣는다.
약 25명 정도의 만 5세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의 학생들이 각자 악기를 연주했다. 어떤 아이는 기타를 치다가 틀리기도 했고, 악보를 잊어버려서 몇 초간 멈춤의 순간도 있었다. 했던 부분을 계속 연주하다가 결국 대충 마무리하고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조개껍데기 방에 모인 약 70명가량의 청중들은 그 어느 누구도 안타까워하는 표정 또는 기색이 없었다.
악기 실력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닌 그저 음악으로 하나 되어 즐기는 것이 전부다. 악보를 외우지 못해도, 틀려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음악회를 통해 내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앞으로 어디를 더 연습하고 개선해야 하는지 동력의 기회로 삼게 된다. 음악회를 평가하는 자리로 여길 경우 음악회에서는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앞서고 음악회에서 틀렸을 경우 관중석에서의 안타까움이 나온다면 아이들은 음악을 하는 것이 겁이 나서 더 이상 안 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프랑스가 음악을 대하고, 음악 교육을 하는 방식이다.
음악은 경쟁이 아닌 나와 네가 함께 즐기는 것
아이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L은 만 5세부터 개인 과외로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L엄마 Y는 워킹맘인데 세 명의 딸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유대인 출신 가정이다. 언젠가 그녀의 집에서 아이와 함께 플레이 데이트를 하는데 한창 아이들이 놀다가 거실에 놓인 전자 피아노를 켜더니 나란히 앉아서 한 소절씩 피아노를 연주했다. 엄마들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들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면서 마치 작은 음악회 같았다. 아이들은 건반을 치다가 틀리면 다시 쳤다. 이에 라이브 연주를 배경 삼아 어른들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나는 생전 느껴보지 못한 벅찬 감동을 받았다. 음악이란 이런 것이구나. 나는 어릴 적 피아노를 많이 쳤지만 단 한 번도 이런 풍경은 접해보지 못했다. 피아노란, 악기란 혼자 고독하게 피나는 연습을 해서 완벽해졌을 때 사람들 앞에서 연주해야 하며, 콩쿠르에서도 1등을 해야 하는 그런 대상이었다. 완벽하지 않다면 절대 보여줘서는 안 되는 그것. 그런데 아이들은 건반을 잘못 눌러도, 계이름을 몰라도 그저 깔깔 대며 웃으면서 치고 싶은 대로 연주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도 따뜻함 그 자체였으며,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만들기도 했다.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몰입의 순간 그 자체였다. 이런 시간을 통해 아이들은 음악이란 재미있고 즐거운 놀이와 같은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하며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음악이라는 멋진 세계로 점점 몰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