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책임의 슬로운

영화 <미스 슬로운>

by 한나


초중고를 대상으로 하는 영어학원에서 파트타임 영어 강사를 했던 적이 있다. 평생 학원이라는 곳을 다녀보지 않았던 내게 그 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강요받지 않는 삶을 살았던 내게 다른 누군가에게 ‘숙제 꼭 해와’, ‘78쪽 풀어’ 등과 같은 명령을 하는 것이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창 친구들과 뛰어놀 나이에 작은 공간에서 빽빽하게 앉아 나의 허술한 영어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이 참 안쓰러워 보였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원장 선생님과 학부모님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아이들이 하기 싫다고 하면 안 시켰다. 숙제도 잘 안 내주고 쉬는쉬간도 넉넉하게 줬다. 내 수업 중에는 무서운 원장 선생님과 고집스러운 부모님들 사이에서 아이들의 숨통이 조금이라도 트이길 바랬다.


영화 <미스 슬로운>의 주인공 슬로운은 어느 날 상원의원에게 ‘총기 구제 법안’ 반대 측의 대표로 나설 것을 제안받지만 그녀는 코웃음 치며 거절한다. 총기협회의 엄청난 로비를 생각하면 이미 정해진 승자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그녀의 선택은 상원의원에게도 관객에게도 반전을 안겼다. 그녀의 일처리 방식은 매 순간이 반전이었는데, 팀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 일단 조용히 그를 감시하고 확신이 되는 순간에 터뜨린다. 절대 미리 말하지 않는다. 미리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서 계획해내고 진행하는 그녀의 모습에 상사는 한 번이라고 평범하게 군적이 있냐면서 나무란다. 승리라는 목적으로 자신의 동료마저 수단으로 삼는 그녀의 방식은 주변인들에게 비난과 질타를 받지만 결국 그녀는 승리한다.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치열하고 철저하게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자신의 신념이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마 자신을 믿고 스카우트한 상사와 따라와 준 팀원들에게 결과로써 보여주는 것이 아녔을까,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결국 그 방법의 무게는 그녀를 감옥이라는 통제된 곳에 있게 했다. 나와 슬로운이 비슷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난 슬로운처럼 계획적이지도 예리하지도 못하다. 그녀가 일하는 방식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진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내 얘기로 돌아오면, 나는 결국 그 일을 관뒀지만 내 신념 때문은 아니었다. 아, 아직도 갈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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