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의 또 다른 이름
며칠 전 퇴근하고 들어왔는데 남편의 얼굴 표정이 안 좋다. 이 사람은 얼굴이 리트머스 종이 같아 그대로 다 읽히는 사람이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는데 입을 달싹이다 그냥 자겠다고 한다.
남편은 퇴근할 때 집까지 걸어온다. 걸어오는 길에는 늘 마주치는 노숙자 여사님이 계시다. 경복궁역을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꽤 유명한 분인데 몇 년째 그렇게 길에서 사신다. 짐도 점점 늘어나 캐리어 4~5개 되는 정도의 보따리를 늘 끌고 다니신다. 그렇게 길 위의 삶을 유지하고 계신 걸 보면 돕는 손길이 계속되고 있나 보다. 우리 남편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처음엔 왜 이러고 계시냐, 가족은 없냐... 등을 물었나 보다. 대화를 하며 조 OO이라는 이름까지 알게 되었는데 이름을 알게 되니 더 마음이 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출근도 걸어서 했는데 그 바쁜 와중에 여사님이 아는 척을 하면 또 그걸 받아줬나 보다. 돈 좀 달라고 요구하면 현금이 없는 우리 남편은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다 드리곤 했다고 한다. 한 번은 추운 겨울 저녁 시간에 마주쳤는데 배가 고프다면서 콕 집어 어느 식당에서 파는 황태해장국이 먹고 싶다고 했다나? 남편은 경복궁역 근처 어느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황태해장국을 사다 줬다고 했다. 그런데 그 집이 조여사님의 단골집이란다...
작년 겨울엔 남편이 퇴근해 들어오더니 따뜻한 누빔 바지를 좀 주문해 달라고 했다. 조 여사가 남편을 보고는 근처 옷가게 앞으로 데리고 가서 겨울에 입을 바지를 사달라고 했나 보다. 그 옷가게 사장님이 질색팔색 한 것 같다. 노숙자가 가게 앞에 서있는 것도 싫은데 옷을 사겠다고 들어오려고 하니 싫을 만도 했겠다. 남편은 다음에 사드리겠다고 하고 집에 돌아와 나에게 주문해 달라고 한 것이다. 뭘 그렇게 까지 해야 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남편의 마음이 진심인 걸 알기에 난 말없이 로켓배송으로 주문을 했다. 남편은 다음날 배송된 옷을 가지고 출근했고 나는 잊어버렸다. 며칠 후 생각이 나서 전해주었냐 물으니 필요 없다고 했단다. 다른 경로를 통해서 기어코 옷을 마련한 것이다. 거기에서 나와 남편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나는 '이런... X 같은 경우를 봤나...'였는데 남편은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필요를 채워주는 게 맞는 것 같아...'였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며칠 전의 그 '무슨 일'도 조여사 걱정이었던 것이다.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강추위가 시작되는데 길바닥에 앉아있는 여사님을 보고 와서는 그렇게 세상 무거운 표정을 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추운데 길에 있으니까...'
우리 남편의 이런 모습과 마주 할 때마다 난 나의 무감각한 마음이 부끄럽기도 하고,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를 앞에 둔 것 같이 답답하기도 한 복잡한 마음이 된다. 그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자꾸 그의 어려움이 보이고 생각나고 뭐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우린 따듯한 방에서 잘도 잔다.
남편은 조여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한다. 남편의 어머니, 나의 시어머니는 무너져가는 아버님의 회사를 살리려다 꽤 많은 재산을 다 날리셨다. 억울함과 분노가 쌓여있어 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는데 조여사에게서도 그 분노와 억울함이 느껴졌다고 한다. 아마 남편은 그래서 길바닥의 조여사를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방금 전에 자려는 남편에게 여사님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이름을 알려주면서 '왜? 기도하게?' 란다. 이 티 없이 맑은 소년 같은 50대 아저씨를 어찌하면 좋을꼬.
남편의 팀에서 강사를 초빙해 각자의 성향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팀워크를 위해 서로가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들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MBTI 검사와 비슷한데 여러 질문에 답을 한 후 결과를 보는데 성향이 동물로 표현되었다 한다. 결과를 듣고는 빵 터졌다. 자기만 제외하고 모든 팀원들은 표범인지 퓨마인지 맹수가 나왔다고 했다. 경쟁적이고 장악하려 하고 성취욕이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남편만 사슴이란다. 사슴이라니... 처음엔 큰 웃음이 나왔지만 이내 살짝 눈물이 고였다. 사슴이 포식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풀 뜯고 싶은 사슴에게 맹수들처럼 송곳니를 키우라 하고 그들과 함께 사냥하라 하니 고단 했겠다.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용쓰는 곰의 탈을 쓴 사슴이 매우 짠했다.
나의 남편이 성공하고 잘 나가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길바닥에서 겨울을 나야 하는 아주머니를 보고 마음 아파 잠을 설치는 그런 남자, 그리고 그의 기도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런 남자가 나의 남편인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