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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tainsight Oct 17. 2023

당찬 아이와 멋진 남자

그리고 번개의 이야기

Stone Fox

By John Reynolds Gardiner


딱 싫어하는 그림체였다. 누가 추천한 책이 아니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표지였다. 아이들과 책 읽고 수업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니 이젠 표지만 봐도 느낌 온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틀렸다. 사실 사람도 책도 외모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 책은 진실로 재미와 감동, 박진감에 반전까지 갖춘 수작이다. 상을 몇 개나 탔는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이런 책은 반드시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다. 


어느 날 윌리의 할아버지가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아누우신다. 할아버지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감자농장이 밀린 세금 때문에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윌리의 결정은 신속하다. 주저하거나 고민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윌리는 농장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당찬 소년 윌리는 개 썰매 대회의 상금을 보고는 전재산 50달러를 내고 대회에 나가기로 한다. 동네 어른들은 잘못된 선택이라며 윌리를 말리지만 윌리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얼음 거인이 경주에서 진 적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윌리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기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윌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윌리는 이기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얼음 거인이라 해도 막을 수 없었다."

본문 중에서 


윌리는 충실한 친구 같은 반려견 번개와 함께 한다. 동심은 이미 삶아 먹은 지 오래된 책선생인 나는 매일 번개와 함께 달리는 윌리를 보며  '이런 다윗과 골리앗 게임에서는 당연히 다윗이 이기게 되어있지...'라고 생각하며 작가가 어떻게 이 게임을 마무리할까를 궁금해하며 읽어 내려갔다. 윌리는 경기 당일 꽤 선전을 한다. 그런데 결승전 통과를 눈앞에 둔 순간 당찬 윌리도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이 일어난다. 할아버지와 윌리의 사정을 아는 듯 주인을 위해 사력을 다해 뛰었던 번개가 죽은 것이다. 


"번개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결승전까지 30미터 남았다. 그때 번개의 심장이 터졌다.

번개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아무 고통 없이.

온 도시가 말없이 윌리를 지켜보았다.

윌리는 번개를 끌고 마지막 3미터를 걸어 결승선을 지났다."

본문 중에서 


이때  닳고 닳은 어른의 마음을 뒤흔든 결말이 나온다. 돈을 놓고 윌리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얼음 거인이 뒤 따라오는 모든 썰매를 막고 추월하지 못하게 한다. '누구든지 이 선을 넘는 자는 쏠 것이다!' 라며...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는 번개를 끌고 윌리가 결승선을 가장 먼저 지나게 한다. 이 장면에서 나이 먹은 독자는 또 콧등이 시큰해졌다. 이런 멋진 남자라니! 무자비할 것만 같은 인디언 얼음 거인에게서 '어른됨'를 발견하고 안도했다.

얇은 구닥다리 책에서 이런 멋진 어른을 만나다니... 여운이 꽤 긴 책이었다.

이 책의 원제는 'Stone Fox',  인디언 얼음 거인의 이름이다. 우리말 책의 제목 '조금만 조금만 더'는 윌리와 번개가 주인공인 제목이다. 그러나 작가가 내세운 원탑은 인디언 아저씨였다. 백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Stone Fox는 얼음 썰매 경기 상금을 차곡차곡 모아 땅을 다시 찾으려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경주에 임했던 그는 땅을 지키겠다는 윌리의 열망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생명이 떠난 자리에서 경쟁을 포기하는 인디언식 예의를 보여준다. 작가는 Stone Fox를 통해 아픔을 경험한 자가 다른 아픔을 감쌀 수 있다는 것을 나눈다. 그리고 경쟁과 성취, 이런 것들 보다 인간됨을 선택하자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런데 우리 둘째는 나와 눈물 흘린 지점이 달랐다. 책을 읽어보라고 준 며칠 후 밤에 잠을 자려는데 아이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오더니 엉엉 우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 무슨 일이냐 물었는데 아이의 대답이 너무 귀여웠다. 

"엄마...(엉엉) 번개가 죽었어요....(엉엉)" 

엄마는 딸이 너무 귀여워 웃고, 딸은 너무 슬퍼 울고... 그 밤의 기쁨이 글 쓰는 지금도 내 마음을 가득 채운다. 책을 읽고 그 슬픔과 감동을 전하러 엄마를 찾아온 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이렇게 책을 사랑하던 꼬맹이가 벌써 대학교 2학년이다. 오글거린다며 자기가 쓴 글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는 아이를 설득해 엄마 감상문의 한구석을 장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것이 아이들 키우는 맛 아닌가! 오랜만에 정리하다가 아이와의 교환 일기를 찾고, 감상문까지 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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