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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tainsight Nov 12. 2023

황금빛 마음

<할머니의 찻잔>을 읽고

The Blessing Cup

By Patricia Polacco


건반 악기나 현악기를 연주할 때 '동조진동'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피아노의 건반을 눌러 A라는 음을 내면 몇 옥타브 위나 아래의 다른 A현도 진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처음 현의 진동이 다른 현의 진동과 정확히 조응하고 공명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책을 읽을 때, 영화를 볼 때 내 마음이 울리는 것을 동조진동현상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내가 작품에 감동했다는 것은 창작자와 내가 함께 공명했다는 것이고 것은 그와 내가 같은 '조'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패트리샤 폴라코의 작품은 늘 이렇게 울림을 준다. 그녀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동일하기에 나는 그녀의 작품에 늘 동조진동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할머니의 찻잔>. 패트리샤 폴라코의 공전의 히트작 <할머니의 조각보>에 등장한 패트리샤의 증조할머니 안나가 다시 이 책의 표지에 등장한다. <할머니의 조각보>는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 가족이 고향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건너간 뒤의 삶이 7대에 걸쳐 펼쳐지는 이야기다. 안나 할머니가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이 조각보가 되어 그 오랜 세월 소중하게 지켰던 가치와 아름다움이 후대에 전달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할머니의 찻잔>은 <할머니의 조각보>의 프리퀄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가족이 겪었던 일이 이야기의 소재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살던 가족은 느닷없이 삶의 터전에서 떠나라는 황제의 명령 앞에 두려워 떤다. 그럴 때마다 안나의 엄마는 결혼 선물이었던 찻잔 세트를 꺼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이 찻잔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단다. 평생 배고프지 않고, 넉넉한 삶을 살 거야. 사랑을 알고 기쁨을 알고... 가난하지 않을 거야.' 안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평안을 되찾곤 했다.

황제의 명령으로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내고 유대인들을 내쫓기 시작했는데 안나의 가족도 결국 짐을 싸서 떠나야 했다. 그 짐 속에는 당연히 엄마의 '마법의 찻잔'도 담겨 있었다. 남의 집 헛간에서, 축축하고 차가운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던 가족은 늘 추위에 떨었고 아빠는 미국으로 갈 뱃삯을 마련하느라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다 아빠가 쓰러졌고 엄마는 의사를 불러왔다. 그 친절한 의사는 선뜻 안나의 가족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한다. 페르시아 양탄자가 깔린 근사한 집에서 아빠는 정성스러운 치료를 받았고 아이들과 엄마도 회복될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유대인을 집에 들인 의사에게 경고가 들어왔고 가족들은 떠나야 했다. 의사는 가족들이 국경을 무사히 넘을 수 있도록 필요한 서류와 기차표, 배표까지 마련해 왔다. 엄마, 아빠의 눈물 앞에 의사는 '지금 자네가 무릎 꿇고 있는 그 양탄자... 그것만 팔면 돼!'라고 활짝 웃는다.

가족은 가족의 보물, 마법의 찻잔 세트를 의사 선생에게 남겨두고 간다. 이 쪽지와 함께...


친애하는 아저씨, 언제나 기억할게요. 아저씨는 우리를 먹여 살린 빵이에요. 우리 삶을 맛있게 해주는 소금이에요. 우리를 함께 묶어주는 사랑과 기쁨이에요. 아저씨의 그 친절한 황금빛 마음이 아저씨를 정말로 부유하게 해 줄 거예요... 아저씨는 평생 가난해지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정말 소중히 여기는 찻주전자 세트를 남기고 갑니다. 잘 지켜주실 거라고 믿어요. 찻잔 하나만 가지고 갈게요. 우리는 이거면 충분해요. 우리 네 식구가 모두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가족은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며 엘리스 아일랜드에 입성했고 할머니의 조각보가 넘겨지는 곳에 마법의 찻잔도 함께 전달되었다.

내 마음의 '진동'은 이 마음 따뜻한 러시아 의사가 궁지에 몰린 이방인들에게 조건 없는 선행을 베풀 때 일어났다. 의사에게 페르시아 카펫은 죽은 아내를 의미한다. 돈 많은 상인이 그 카펫을 엄청난 돈을 제시하며 팔라고 했을 때도 그는 팔지 않았다. 아내가 좋아했던 카펫을 처분하는 것은 아내를 마음에서 밀어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이 가족을 위해 카펫 처분을 결심한다. 그들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소중한 보물을 내어준 것이다. 힘이 들고 지쳐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내라는 위로는 참으로 공허하다. 마중물이 필요하다.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도움이 그들을 일어서게 한다. 그러나 그 선행은 받는 사람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선행을 행한 사람의 마음을 더욱 부유하게 한다. 그 마음은 황금빛이기 때문이다. 그 러시아 의사 선생님은 황금빛 마음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황금빛 마음 덕을 본 적이 있다. 큰아이를 기숙사가 있는 대안학교에 보내고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 들었는데 예상보다 큰 금액이 찍혀있었다. 우리는 시부모님이 만들어 놓으신 빚을 갚느라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혼자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대학 선배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뜸 계좌번호를 달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아들이 장학금을 탔는데 나에게 좀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안나의 부모님이 털썩 주저앉아 눈물 흘린 것처럼 나도 울었다. 넉넉하지 않은 목사의 사모가 선뜻 내어주기에는 큰 금액이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우리 인생 가운데 가끔씩 나타나 지치고 힘든 우리에게 시원한 샘물이 되어준다. 내가 그 샘물을 마셨으니 나도 누군가에게 샘물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패트리샤 폴라코의 글을 읽을 때면 유대인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방식이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믿음, 축복, 나눔, 사랑, 희망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구체적인 물건에 담아 그들의 스토리를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하고 듣는다. 조각보 이야기, 찻잔 이야기를 통해 얼굴도 보지 못한 조상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고생과 헌신을 통해 현재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쉬지 않고 각인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세대 차이니 꼰대니 하며 어른들의 이야기에 젊은 세대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말만 앞서고 말한 대로 삶을 살아내지 않는 위선에 질렸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지혜가 아이들에게 이어지려면 말한 대로 살아내는 성실함이 있어야 하리라. 아이들에게 물질적 유산은 물려주지 못할지라도 '지혜'라는 선물을 주고 싶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유명한데 그는 지혜를 '듣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 듣는 마음이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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