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엄마라는 구원을 기다린다.
이태준 글. 김동성 그림
<헨쇼 선생님께>의 리 보츠가 아빠를 늘 그리워하며 전화를 기다렸던 것처럼 엄마를 간절히 기다리는 아가 이야기를 해야겠다. 도서관에서 책을 덮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계속 닦아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네댓 살 되어 보이는 아가가 표지에서 멀뚱히 나를 쳐다본다. 할 말이 있는 듯... 표지를 넘기면 아가가 아장아장 걸어서 내려왔을 꼬불꼬불 골목길이 보인다. 다음 페이지에선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다시 한번 나를 보고는 부지런히 아장아장 걸어간다. 아가는 전차 정류장에서 엄마가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차장에게 "우리 엄마 안 오?"라고 물어보지만 싸늘한 대답만 돌아오고 아가는 엄마가 타고 올 전차가 어디쯤 왔을지 상상한다. 코 끝이 빨개지도록 추운 겨울이지만 아가의 마음속에서 엄마의 전차는 총천연색 들과 바다, 하늘을 날아오고 있다.
전차 몇 대가 지나가고 맘 좋은 차장님이 이름 모를 이 아가를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라고 불러준다. 그리고 전차에서 내려와 어디 가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라고 당부한다. 아가는 그 당부를 꼭 붙잡는다.
아가는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안하고,
전차가 와도 다시는 묻지도 않고,
코만 새빨개서 가만히 서 있습니다.
<엄마 마중> 중에서
이 한 문장이 내 마음을 두드리는 동안 카메라가 줌인 하듯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고 얼어서 새빨개진 코에 매달려있는 콧물이 내 콧등을 시큰하게 한다. 그리고 눈이 펑펑 내리는 하늘을 아가가 올려다보며 책의 마지막 장이 끝난다.
이게 무슨 결말이냐... 뭐 이런 불친절한 작가가 다 있나! 처음 읽고는 울컥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아가는? 이태준 선생이 이 글을 쓰셨던 시기가 일제강점기인 만큼 작가는 나라 잃은 설움, 그 황망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건 싫다... 하며 한 장을 더 넘기는데 처음에 등장했던 아가네 골목길이 나온다. 이번엔 눈이 펑펑 쏟아진다.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책을 덮으려는데 빨간 점이 하나 보인다. 응? 자세히 보니 '엄마 기다리는 아가'의 손에 들린 사탕이다. 아가의 다른 손은 엄마 손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이번엔 또 다른 눈물을 흘리며 웃고 난리다. 다행이다... 엄마를 만났어... 혼잣말 작렬... 주책...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원작에는 없는 결말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신 김동성 작가님이 너무 고마웠다. 이태준 선생님도 김동성 작가님의 버전이 훨씬 더 좋다고 칭찬하실 것 같다.
이 아가처럼 엄마를 엄동설한에 기다려본 일도 없는데 무엇이 나의 마음을 건드렸을까? 차장의 당부를 들은 뒤 절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의 모습에서 '구원'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가에게 엄마는 구원이다. 추위로부터의 구원, 배고픔으로부터의 구원, 두려움으로부터의 구원. 이 아가의 이름은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가 되었고 그 이름을 얻은 후로 전차가 오는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구원'을 묵묵히 기다린다. 속절없이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인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 없는 하늘 아래 남겨진 아가를 보며 눈물이 흘렀고 손잡고 걷는 모자의 뒷모습에 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다.
그림 작가는 자기가 창조한 결말을 볼 눈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도록 해놓았다. 무심코 지나치면 보이지 않는다. 원작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또 읽는 이들의 아픈 마음도 위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배려에 나는 충분히 위로받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김동성의 <엄마 마중>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