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5일, 비 예보가 있던 금요일이었다. 나는 대구 백안동에 계신 문절공 정수충 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동대구역에 내렸다. 처음 가보는 길이었지만, 조상님을 뵙고 문중 제사에 참여한다는 생각에 설렘 반, 긴장 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 예보는 있었지만 동대구역에 내렸을 때는 아직 비가 오지 않았다. 나는 챙겨 온 우산을 들고 급행 1번 버스에 올랐다. 동대구역에서 약 40분 정도 가면 목적지인 백안삼거리 서당마을에 닿는다고 했다.
버스 중간쯤 창가 자리에 앉은 나는 앞 좌석 손잡이 아래 달린 플라스틱 고리에 우산을 슬쩍 걸어두었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대구 시내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동구청을 지나고,
아양교 사거리를 시원하게 건너고,
수십 년 전 신혼여행 때 잠시 스쳤던 대구국제공항 앞을 지나고,
창밖으로 보이는 한국폴리텍대학과 공단 지역 풍경까지 바라보니,
이 버스 한 대가 마치 짧은 여행의 차창 같았다.
대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이렇게 도시를 구경한 것은 처음이라, 괜히 마음이 들뜨고 정겨웠다.
목적지인 백안삼거리 서당마을 정류장이 가까워지자 나는 내릴 채비를 했다. 종점 근처라 그런지 버스 안에는 승객이 대여섯 명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막 땅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버스 중간쯤에 앉아 계시던 한 아주머니의 다급하면서도 또렷한 외침이 버스 안을 가르며 울렸다.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아, 내 우산!’
앞 좌석 고리에 걸어둔 우산을 까맣게 잊고 몸만 내린 것이었다.
다행히 버스가 아직 출발하기 전이라 얼른 다시 올라가 우산을 챙겨 내릴 수 있었다. 아주머니께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자, 버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길을 떠났다.
길가에 다시 서서 생각해 보니, 아주머니의 그 한마디가 참 정겹고도 놀라웠다.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버스 기사님께는 잠시 멈춰달라는 신호를, 내게는 잊은 물건이 있다는 경고를 동시에 전해야 하는 그 찰나에, "우산!"이라는 한 단어가 모든 상황을 단번에 해결해 버린 것이다.
뒤쪽 자리에 앉아 계시면서도 대각선 방향 좌석 고리에 걸린 내 우산을 눈여겨봐 주신 아주머니의 세심함, 그리고 버스가 떠나기 직전 재빨리 외쳐주신 그 기지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급하게 우산을 챙기느라 아주머니께 제대로 인사를 못 드린 것이 오히려 마음에 남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제사가 열리는 이곳 문절공 정수충 할아버지의 묘소 근처는 기운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예부터 많은 사람이 이곳 인근에서 공부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기분 좋은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처음 찾아간 낯선 길에서 우산을 잃어버릴 뻔한 위기를 넘긴 일이, 어쩌면 할아버지의 좋은 기운과 아주머니의 따뜻한 배려가 함께 닿은 덕분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산이야 값으로 따지면 그리 대단한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고마운 마음과, 그 짧은 외침 하나로 문제를 해결하는 감각은 우산보다 훨씬 큰 인상을 남겼다.
만약 그때 아주머니가 “기사 아저씨, 잠깐만요. 저분 우산 두고 내리셨어요!” 하고 길게 설명하셨다면, 그 짧은 틈에 버스가 그냥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그 다급한 순간,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날아온 "우산!"이라는 외침은 복잡한 설명을 단숨에 생략해 버린 번개 같은 한 수였고, 골든타임을 붙잡아낸 가장 통쾌한 직구였다.
대구 여행길에 있었던 작은 소동은 그렇게 아주머니의 따뜻한 배려 덕분에 오래 기억에 남을 좋은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