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24일 명동 YWCA 기억

by 정영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날은 1979년 10월 26일이다. 그리고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은 그로부터 한 달쯤 뒤인 11월 24일에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의 사회 분위기는 매우 삼엄했다.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었고,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사람들 사이에도 긴장감이 팽팽했다. 바로 그런 시기였는데, 11월 20일 전후로 임기상이 나에게 함석헌 선생님이 명동 YWCA에서 집회를 연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임기상은 대학에서 CCC 활동을 하다가 CBS 기자로 일했던 친구다.


그가 굳이 나에게 이 소식을 알려준 것은, 함께 지내는 동안 내가 함석헌 선생님 이야기를 자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함석헌 선생님을 깊이 존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직감적으로는, 이런 엄혹한 계엄 상황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는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함석헌 선생님을 좋아했고, 그분이 나오신다면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함석헌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서점에서 선생님의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를 읽으면서 내 삶은 크게 달라졌다. 이어서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읽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뒤에는 함석헌 선생님의 친구이었던 김교신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서점에서 『김교신과 조선』이라는 책을 발견한 뒤, 나는 그 책에 큰 힘을 얻었다.


이처럼 나는 함석헌 선생님과 김교신 선생님 두 분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컸다. 그 감화를 깊이 받고 있었기에, 함석헌 선생님이 나온다는 집회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나는 혼자 명동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조심스럽고, 한편으로는 다소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나는 서울 신림동 고모 댁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고모부는 경찰 공무원이었다. 나와 고모부는 입장이 달랐고, 관계도 다소 난처했다. 그래도 내 생각에는, 내가 나쁜 짓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존경하는 선생님을 뵈러 가는 것이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고 여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회가 이른바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런 사정을 잘 몰랐다. 나에게는 그저 함석헌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한 번 뵙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YWCA의 꽤 넓은 강당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분위기는 낯설면서도 설레었다. ‘과연 어떻게 진행될까’ 하는 웅성거림과 소란스러움이 가득했다. 나는 뒤쪽에 조심스럽게 앉아 집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오후 5시 30분쯤 집회가 시작되었다. 대회장은 함석헌 선생님이었고, 주례는 박종태 씨였다. 겉으로는 결혼식을 가장한 자리였기 때문에 사회자가 “신랑 입장”을 외쳤고, 실제로 신랑이 입장했다. 그러나 신부는 입장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앞쪽에서 누군가가 유인물을 뿌리며 성명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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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대통령 선거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의 목적은 바로 그런 간선제 대통령 선출 방식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데 있었다.


성명서 낭독이 시작되자마자 경찰이 매우 빠르게 진입했다. 출입구 쪽에서는 의자로 입구를 막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기억으로는 출입구가 뒤쪽 중앙에도 있고 양옆에도 있었는데, 여러 곳에서 동시에 경찰의 진입과 이를 막는 사람들 사이의 충돌이 벌어졌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반정부적인 성격의 모임일 수 있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했지만, 이런 상황을 직접 겪는 것은 처음이었다. 두렵고 조마조마했다. 경찰이 우리를 잡으러 들어오는 상황이었지만, 모인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내 기억으로는 300명 이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YWCA 공간은 구조상 폐쇄적이어서 쉽게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이미 많은 경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기에 더욱 답답하고 두려웠다.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한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문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도 머뭇거리다가, 그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나가는 소리와 움직임을 보고 결국 그 흐름을 따라 빠져나왔다.


나중에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니, 백기완 선생님이 큰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우리 앞으로 나갑시다!”라고 외치며 앞장섰고 많은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경찰은 그 행렬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던 것 같다. 나 역시 그 물결 속에 섞여 YWCA를 빠져나와 좁은 골목길로 나왔다.


그때는 누가 경찰이고 누가 집회 참석자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모두가 한꺼번에 우르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몇몇 사람이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찰 간부로 보이는 사람이 부하 경찰들에게 “저 놈 잡아라”라고 명령했고, 경찰이 달려가 그 사람을 붙잡는 장면을 나는 바로 옆에서 보았다. 나 역시 괜히 노래라도 따라 불렀다면 잡혀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나는 경찰서에 끌려가는 일은 피했다. 만약 경찰서에 잡혀갔다면, 내가 살고 있던 고모 댁과의 관계는 정말 난감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잡혀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자리에는 함석헌 선생님과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해 여러 시민운동가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연행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여기서 신랑 역할을 맡았던 홍성엽 씨 이야기를 하고 싶다.


홍성엽 씨는 연세대학교 사학과 73학번이었다. 당시 연세대의 기독교 모임에서 이 위장 결혼식 사건을 논의했다고 한다. 계엄 상황이 워낙 삼엄하여 일반적인 집회는 허용되지 않자, 결혼식이라고 허위 신고를 내고 집회 허가를 받았던 것이다. 신부 이름은 윤정민 씨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신랑 역할을 맡을 사람이 아무도 없자, 홍성엽 씨가 “내가 하겠다”라고 나섰다고 한다.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스스로 “내가 이 희생을 감당하겠다”라고 나선 그 태도는 지금 생각해도 놀랍고 숙연하다.


집회 전날 밤, 홍 씨는 어머니에게 “큰일을 하고 죽어야 하는데 동의해 주셔야겠다”라고 말하며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어머니는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하면서도 동의했다고 한다. 그의 여동생 홍성재 씨의 증언에 따르면, 담당 형사가 몇 차례나 찾아와 “아들이 정말 결혼하느냐”라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분명하게 “결혼한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아들이 잡혀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따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날 홍 씨의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그 자리에 함께 정장을 입고 참석했다는 점이다. 참으로 대단한 어머니요, 대단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 ‘신랑’ 홍성엽 씨가 서빙고에서 당한 고문의 강도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도 그는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자신이 당한 폭행을 모두 말하지 않았다. “폭행당한 내용을 전부 말하는 것은 군의 체면을 위해 그만두기로 하겠다”는 취지로 말을 아꼈다고 한다. 그 의연함과 품격 앞에서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이후 홍성엽 씨는 1년 남짓 수감 생활을 한 뒤 출소했고, 그 뒤에도 독신으로 지내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1988년 이후에는 천도교에 귀의해 조용히 살았고, 수행과 수련에 힘썼다고 한다. 그러나 1997년 백혈병이 발병했고, 결국 2005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환경운동연합을 이끌었던 최열 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매우 조용하고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의로운 일 앞에서는 스스로 나서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홍 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 여동생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지만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조용히 삶을 마감했다.


나 역시 1980년대를 지나오며 시위와 집회에 많이 참석하였다. 그럴 때마다 ‘만약 내가 경찰서에 잡혀간다면 어머니가 얼마나 절망하실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경찰서에 끌려갈 만큼 극단적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의로운 일에 자신의 삶을 걸었던 그 숭고함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홍성엽 씨의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셨을지를 생각하면 오래도록 숙연해진다.


홍성엽 씨와 그 어머니 심혜수 여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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