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제가 바다를 ‘보는’ 것 좀 도와주세요”

by 정영기

“아빠, 제가 바다를 ‘보는’ 것 좀 도와주세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바다를 처음 본 아이가 그 거대함에 압도되어 아빠에게 속삭였습니다.


“아빠, 제가 바다를 ‘보는’ 것 좀 도와주세요”


이 말은, 단순한 시각적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 무너진 자신의 세계를 다시 세워달라는 실존적인 호소에 가깝습니다.


# 마주함과 압도됨의 경계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바다'를 만납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사랑일 수도 있고, 때로는 거대한 사회적 시스템이나 운명이라는 이름의 파도이기도 합니다.


대상이 너무 크면 눈은 그것을 담아내지 못하고 흩어집니다. 풍경은 형체가 없는 덩어리가 되고, 관찰자는 그 풍경 안으로 침몰합니다. 이것은 물리적 거리의 상실입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의미가 포착되지 않을 때, 우리는 '보고 있음'에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 놓입니다. 이것은 해석의 부재입니다.


거대함 앞에서 개인의 존재론적 부피는 0에 수렴합니다. 이때 아이가 느낀 것은 경이로움인 동시에 철저한 고립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체의 위축입니다.


# '본다'는 행위의 재구성


아이가 요청한 '보는 법'은 단순히 망막에 상을 맺는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한한 대상을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입니다.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거나 어깨를 감싸 쥐었을 때, 아이는 비로소 바다와 자신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확보합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던 풍경이 타자의 온기를 통과하며 비로소 견딜 만한 온도의 이미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대상을 장악하는 오만이 아니라, 대상과 나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는 겸손한 시도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나 철학자의 문장, 혹은 예술이라는 필터를 빌려 거친 현실을 응시합니다. 홀로 서서 마주하기엔 세상이 너무나 시리고 광활하기 때문입니다.


# 함께 바라보는 등의 따스함


결국 "도와달라"는 아이의 속삭임은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연대를 지시합니다. 바다는 결코 작아지지 않습니다. 파도는 여전히 거세고 심연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변하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그 바다를 마주 보는 아이의 마음 근육입니다.


우리는 일생에 걸쳐 각자의 바다를 마주합니다. 때로는 내가 아이가 되어 누군가의 소매를 붙잡고, 때로는 내가 아버지가 되어 누군가의 곁에서 묵묵히 수평선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거대함에 삼켜지지 않고 끝내 응시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한 바다가 지나치게 푸르러 눈이 시리다면, 잠시 곁에 있는 이의 손을 빌려도 좋을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나약함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강인해지는 인간만의 유일한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 1940~2015)는 우루과이 출신 작가이자 사상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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