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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실주인 Jul 03. 2020

짝사랑

담장을 뛰어넘은 플라토닉 사랑


짝사랑이 아름답다 말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추억이 지금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 할 때나 비로소 한 번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짝사랑을 할 당시에는 상대방의 눈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치는 어깻짓을 곱씹으며 심력을 낭비한다. 밥 먹었냐는 흔한 인사 한 마디에도 수많은 가능성을 부여하고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다 보면 종국에는 이성이 망상을 따라잡지 못한다. 나만의 오해들이 모아져 확신에 차고 상대방에게 내 모든 것을 내던져버린다. 그리고 내가 상대방에게 어떠한 의미도 아닌 존재인 것을 알게 될 때, 관심이라 느꼈던 것이 혼자만의 착각임을 알게 될 때. 스스로를 절망의 늪에 빠뜨리고 자신의 불행을 못 견뎌한다. 그러나 다시 안녕이란 말 한마디에, 숨 막히는 눈웃음에, 그 모든 절망을 잠시 내려놓는다. 이 반복되는 굴레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미친 듯이 일방통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짝사랑을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A에게 편지가 왔다. 보낸 사람 이름을 보더니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편지 한 통을 쓱 읽더니 한숨만 내쉬고 또 내쉬었다. 짧은 한 장 짜리 편지에는 이별 통보가 적혀있다고 했다. 끝이 이럴 거라고 예상했고, 여자 친구의 결정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마음이 착잡하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잘못을 빌고 싶다 했지만, 현실은, 담장은 그것을 허락해줄 리 없었다. 그저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B의 표정이 밝았다. 평소에도 인상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 날 따라 더 생기 있어 보였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무슨 저리 좋은 일이 있을까 궁금해서 물었더니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한다. 처음에는 B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OO친구' 앞의 OO가 내가 모르는 수용자들만의 줄임말인가 싶었다. 마치 '아아'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인 것처럼. 한참을 되새김질하고야 OO가 여자이고, 그 여자가 내가 아는 단어와 뜻이 같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까지 오는데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불필요한 오해들로 가득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들어보니 같은 거실 수용자의 공범을 펜팔 친구로 소개받은 거라고 했다. 얼굴 한 번 못 본 사이어였고, 그러니 따지고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닌 거였다.(수용자  서신은 자필 서신외 동봉 금지이다. 편지로 수용자끼리 사진을 주고받을  없다.) 그런데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귀기로 했고, 여자 친구가 먼저 출소하는데 나가서 옥수발을 해준다고 했다. 희망에 부풀어 오른 얼굴에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안 듣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B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쫑알쫑알 시끄럽게 하루 종일 여자 친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이 관계가 과연 연인 사이라 부를 만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으나, 오히려 담장조차 뛰어넘는 플라토닉적인 사랑을 체험할 수 없는 나를 안쓰러워하며 위로했다. 나는 B에게 현실을 알리는 것을 포기했다.


A는 고2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거기서 친구의 누나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했다. 세 살 많은 대학생이었는데 그때 고등학생 눈으로 본 대학생의 성숙미가 잊히지 않았다고 했다. 반대로 그녀는 그때 교복의 동생 친구는 그냥 동생과 다를 바 없는 느낌이 강해서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10년을 쫓아다닌 끝에 겨우 결실을 맺었는데, 그 결실을 이제 좀 누리려고 했는데... 그 결실을 맺기 위해 저질렀던 많은 죄로, 담장 안을 들어오게 됐다고 했다. A는 사기로 들어온 수용자였다.


B가 시무룩하다. 며칠 전만 해도 접견 연출 직원이 사무실 노크만 해도 버선발로 뛰어나가더니 하루 종일 표정이 죽상이다. 먼저 출소한 여자 친구(펜팔 친구)를 기다리는데 출소한 지 며칠 지났는데도 접견을 오지 않아서 애가 탔나 보다.


펜팔은 수용자들의 지루함과 무료함을 달래줄 하나의 창구다. 많이 하는 사람은 한 번에 다섯 명과 동시에 하는 경우도 봤고, 심지어 유부녀 유부남이 하는 경우도 봤다. 그러나 출소 후 담장 밖에서도 그 인연이 이어졌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서로가 좋은 일을 하고 들어온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누군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이에게는 한 때의 유희처럼, 누군가처럼 일방통행의 마음일 수도.


B가 출소할 때까지 여자 친구(펜팔 친구)는 끝내 접견을 오지 않았다. B는 여자 친구가 오지 못 할 상황에 대에 오만 가지 가능성을 제기하다 제풀에 지쳤다. 그래도 이따금씩 소식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누구에게는 일방통행이고 누군가에게는 한 때의 유희였던 것이다.


A도 B도 같은 때 힘든 시기를 보냈다. 같이 일하는 수용자 세명중에 두 명이 동시에 비슷한 일을 겪으니 나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걱정이 조금 달랐다. 짝사랑이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그 끝이 헤어짐일 때 사람이 얼마나 무너지는지, 많이 지켜봤음에도. 나는 그들의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사고로 이어지지 않길를 바랐다. 사고가 나비효과처럼 얽히고설켜 내가 피해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나는 나와 수용자 사이에 회색 담장만큼이나 높고 삭막한 벽이 여전히 가로막고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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