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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라캉의 ‘아버지의 이름’

by 메티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1995년 〈환상의 빛〉으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후,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 〈브로커〉 등의 작품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뤄왔다. 2023년에 개봉한 〈괴물〉도 이러한 연장선에 있는 영화이다. 〈괴물〉은 고레에다 감독의 16번째 장편 영화로, 사카모토 유지가 각본을,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을 맡았다. 이 영화에는 학교 폭력부터 학생 인권 보호, 교권 추락, 동성애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에 연이어 등장하는 ‘아버지’라는 모티프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자크 라캉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정신분석학자이다. 그는 인간의 언어를 욕망을 통해 분석하는 독창적인 정신분석학 체계를 구축하였으며, 프로이트의 사상을 계승하여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 언어학으로 재해석하였다. 라캉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과 무의식이 언어를 통해 구조화된다고 주장하였다.

본 에세이에서는 〈괴물〉에 등장하는 ‘아버지’라는 모티프와 인간의 욕망을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 중 ‘아버지의 이름’과 ‘욕망’의 개념을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괴물〉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아들들인 미나토와 요리의 모습과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에 따라 영화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계승하지 하지 못한 미나토와 요리에게 어떤 모습이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겠다. 또한, 그들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살펴보고, 영화의 제목이자 핵심 모티프인 ‘괴물’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자 한다.

∎ 〈괴물〉의 줄거리


어느 해안가 도시의 고층 건물에서 화재 사건이 발생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괴물〉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야기는 미나토의 어머니인 사오리, 미나토의 담임인 호리 선생, 그리고 미나토 본인의 세 가지 시점으로 전개된다.

남편을 사별한 사오리는 혼자서 미나토를 키우고 있다. 미나토는 호리 선생에게 ‘돼지 뇌를 가진 인간’이라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하며, 그의 물통 속에서는 진흙이 나온다. 미나토가 학교에 가기를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사오리는 미나토가 호리 선생에게 괴롭힘당하고 있다고 의심하게 된다. 이에 사오리는 바로 학교를 찾아가 면담을 요청하지만, 교장을 비롯한 책임 있는 교사진의 반응은 답답하기만 하다. 미나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따져보려는 사오리에게 교사들은 공허하고 기계적인 사죄의 말만 반복할 뿐이다. 사오리는 “당신들, 지금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게 맞냐”고 되물을 정도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오리가 다시 학교에 찾아갔을 때, 호리 선생은 오히려 아들 미나토가 친구 요리를 괴롭히고 있는 가해자라고 주장한다. 사오리는 이해할 수 없는 불안한 날들이 반복되는 가운데, 어느 태풍이 불던 날 미나토가 사라지고 호리 선생이 들이닥친다.

호리 선생은 아버지가 없는 모자(母子)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책이나 잡지에서 오타를 발견하여 출판사에 알리는 강박증에 가까운 취미를 가지고 있다. 호리 선생에게는 미나토가 같은 반 친구인 요리를 괴롭히고 있다고 단정 짓을 나름의 근거가 있다. 그러나 호리 선생은 미나토의 행동을 막으려는 과정에서 미나토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오해를 사게 된다. 호리 선생은 자신이 미나토를 때리거나 괴롭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장과 동료 교사들의 압박에 못 이겨 미나토의 어머니와 학부모에게 사죄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교단에서 물러난 호리 선생은 자신을 괴롭히는 일들이 계속되자, 학교로 미나토를 찾아가 자신의 무죄를 말해달라고 애원한다.

미나토는 같은 반 친구인 요리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요리는 행동이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다른 남자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미나토는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요리와 단둘이 학교 준비실에 있게 되면서 묘한 감정을 느낀다. 남자아이들은 요리를 괴롭히며 미나토에게 동참하라고 하지만, 미나토는 이를 거부한다. 미나토는 남자아이들이 요리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교실 뒤쪽에서 난동을 부린다. 미나토의 선의를 확인한 요리는 미나토를 자신만의 아지트인 폐터널 너머에 있는 폐전차로 데려간다. 폐전차에서 놀던 미나토는 요리가 고층 건물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자아이들이 요리를 학교 화장실에 가둔 상황에서 미나토는 호리 선생과 마주치자 피해버린다. 요리의 아버지가 요리를 전학시키려는 상황에서 미나토는 요리와의 관계가 서먹해진다. 미나토가 요리를 찾아가자, 요리는 병이 다 나았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내 거짓말이라고 말하자 요리의 아버지는 요리를 끌고 집으로 들어간다. 태풍이 몰아치던 날, 미나토는 요리의 집에 찾아가 욕조에 쓰러져 있는 요리를 발견하고 깨운 후 함께 폐전차로 간다.

∎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라캉은 인간의 심리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나누었다.

상상계는 거울 단계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생하는 단계로 구성된다. 거울 단계는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기가 거울 이미지에 매혹되어, 거울 속 아기가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과정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는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며, 이 상상적 인식으로 인해 아이에게 자아가 형성된다. 상상계 속의 아기는 어머니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의존한다. 아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나르시시즘을 느끼고, 어머니의 품에서 구강적 성감대의 쾌감을 경험한다. 그러던 중 아기-어머니 관계에 아버지가 등장하게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리 엄격하며, 법의 세계를 대변한다. 이 단계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생하는데, 아이는 아버지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끼지만, 아버지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상상계는 이미지, 즉 상이 형성되는 시기로, 무의식적이고 언어 이전의 세계이다. 상상계는 단순히 성장의 한 단계라기보다는 한 사람이 일생 가질 수 있는 심리적 상태 중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

상징계는 아기-어머니 관계를 극복하여 진입한 아이-어머니-아버지의 삼자 관계의 세계이다. 아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함으로써 어머니와 이자 관계에서 아버지를 포함하는 삼자 관계로 나아가며, 이를 통해 어른으로 성장하고 원활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상상계가 자연의 영역이라면, 상징계는 문화의 영역이다. 상징계로 들어선다는 것은 신체를 기반으로 하던 물질적 관계에서 사회적 교환의 관계, 즉 문화의 세계로 들어섬을 의미한다. 이는 아이가 어른으로서 살아가는 세계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이다. 상징계는 언어로 상징되는 세계이다. 상상계가 이미지의 세계라면, 상징계는 언어의 세계이다. 사회의 구성은 언어를 전제로 한다. 법, 학문, 교육 등 사회를 이루는 체계는 언어에서 시작하고 언어로 명기된다. 언어는 사회 제도의 기본이며, 사회의 본질은 상징적 질서와 언어적 질서이다. 언어는 상징계뿐만 아니라 상상계와 실재계와도 관계가 있다. 상상계에서 아이는 언어를 통해 주체가 구성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도 언어와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상징의 세계로 들어간다. 한편, 주체는 언어를 통해 욕망과 감정을 나타내는데, 욕망은 실재계와 관련이 있다.

실재계는 현실 세계인 상상계와 상징계 밖의 세계이다. 상징계가 언어적 세계라면, 실재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 밖의 세계이다. 실재는 환상적인 현실을 파괴하며, 현실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다시 말해, 실재를 환상으로 은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실제는 현실에서 환상을 걷어낸 상상이나 상징이 아닌 세계이다. 실재는 불안의 대상이자 욕망의 대상이다.

∎ 아버지의 이름


라캉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존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프로이트는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경쟁하며, 아버지에게 보복이나 거세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보았다. 그 아들은 결국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이을 통해 자신의 초자아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라캉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불가능한 것들을 금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아버지는 아들과 어머니가 융합하도록 도와주며, 아이가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존재로 해석했다. 라캉은 아이가 주체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어머니와의 융합으로 인해 자신에게서 소외된 아이가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분리되어 주체로 나아가게 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아이를 어머니와의 자기애적 상상적 관계에서 언어와 문화의 상징계로 이끌며 아버지의 법과 질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법칙을 내면화하게 한다. 라캉은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심리적인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인할 경우 도착증에 이르게 되고, 아버지의 이름을 배척할 경우 정신병으로 이어지며,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였으나 결여를 인정하지 못하고 억압할 경우 신경증이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모티프의 하나는 ‘아버지’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처음으로 각본을 쓴 작품인 〈원더풀 라이프〉(1998)부터 아버지가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시오리는 생전에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18세에 사망하여 연옥에 남게 된다. 현장 로케이션에서 돌아온 시오리를 가와시마가 나무라자, 시오리는 “가와시마 씨의 사쿠라코짱하고 같아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라고 화를 내며 이야기한다. 가와시마는 이승에 남겨두고 온 딸이 스무 살에 성인식을 치를 때까지 연옥에 남기로 한 상황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디스턴스〉(2001)의 원래 주제가 ‘부성, 부권의 부재’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 크랭크인 직전에 고레에다 감독의 아버지가 타계하여 상실감에 빠졌다고 한다. 〈아무도 모른다〉(2004)에서는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다. 아키라, 교코, 시게루의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으며, 유키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들도 아버지 역할을 거부한다. 아키라가 편의점에서 도둑으로 몰렸을 때, 점장은 아버지가 없다는 아키라의 말을 듣고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걸어도 걸어도〉(2008),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태풍이 지나가고〉(2016)에서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모두 료타이다. 이름뿐만 아니라 남자 주인공들은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숙제를 짊어지고 있다. 이 료타들은 각기 비혈연 아이를 보내고 혈연의 아이를 찾아야 하거나, 혈연의 아이를 다른 남자(전 아내의 새 남편)에게 보내야 하거나, 다른 남자와 혈연인 아이를 자기의 아들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요컨대, 모두 자의 또는 타의로 ‘혈연으로 맺어진 핵가족’이라는 전형적인 가족 모델에서 벗어나 새롭게 ‘부자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에서 코이치와 류노스케의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보다는 자신의 꿈이 우선인 인물이다. 코이치와 동급생인 후쿠모토 유의 아버지는 파친코에 빠져 자식들을 돌보지 않는다.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서 세 자매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간 지 15년 만에 딸 스즈를 남기고 죽는다. 아버지 없이 주위의 도움을 받아 성장한 세 자매는 처지가 곤란한 스즈를 거두어 함께 살아간다. 〈어느 가족〉(2018)에서 쥬리의 아버지는 아내와 딸을 학대한다. 쥬리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당한 괴롭힘을 딸에게 되풀이한다. 시바타 부부는 쥬리를 데려다가 딸처럼 키우려 하지만, 부부는 경찰에 붙잡히고 경찰은 쥬리를 아버지의 가학적인 상황이 계속되는 원래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브로커〉(2022)에서 아버지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인 우성의 생부는 자신의 핏줄을 거부한다. 아이를 지우라 강요하는 우성의 친부와 실랑이하다가 소영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영화가 막을 내릴 때까지 우성의 친부를 대신할 아버지는 정해지지 않는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아버지는 결코 축복받고 예정된 인물이 아니다. 많은 경우, 그는 가족을 힘들게 하며 때로는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들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정도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는 새로운 가족 형태의 출현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어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아버지의 부재가 초래하는 문제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만들어지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는 고레에다 감독이 자신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들에서 가족의 이별과 새로운 가족의 만남 과정을 통해 가족의 새로운 형태와 그 의미를 탐구하는 가족영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 아버지의 이름을 승계하지 못한 미나토와 요리

고레에다 감독의 최근작 〈괴물〉(2023)에서 이러한 흐름이 깨진다. 〈괴물〉에서는 고레에다 감독이 그동안 추구해왔던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의 이름이 부재한 채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들을 품어 안을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형성되기는커녕, 이미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그들을 고달픈 삶으로 몰아넣는다.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파 드라마 작가인 사카모토 유지이다. 사카모토 작가는 트렌디 드라마의 전설적인 작가에서 2000년대 중반 이후 아동 학대, 왕따 등 사회 문제를 다루는 사회파 작가로 진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친구에게 잘해주지 못한 일, 싸웠던 일, 아니면 어른들과의 대화가 통하지 않았던 경험, 당시 보았던 풍경, 그날그날 느꼈던 감정들, 그리고 쓰라린 고통과 같은 선명한 기억을 작품에 반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각각에 대해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등의 이력을 상세히 작성하였다. 사카모토 작가의 치밀한 인물 설정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승계하지 못한 아이들인 미나토와 요리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나토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정하는 인물이다. 사오리는 미나토의 고인이 된 아버지를 기리는 불단에서 아들과 아버지를 연결해 주려고자 한다. 그녀는 미나토가 럭비 선수였던 아버지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미나토는 아버지가 노구치 미나코라는 여성과 온천에 갔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나토는 자신이 결코 아버지처럼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오리가 폐터널에서 미나토를 발견하여 차에 태우고 돌아오는 도중에, 미나토는 사오리에게 “난 아빠처럼 될 수 없어”라고 말한다. 미나토는 어머니의 결여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인해 분열된 상태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이름을 억압하고 있다. 미나토는 어머니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요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배척하는 존재이다. 요리의 아버지는 요리가 동성인 남자아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요리를 학대한다. 요리는 인간의 뇌가 아니라 돼지의 뇌를 이식받았고, 그 부작용으로 인해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괴물이라고 주입받는다. 미나토가 “그러면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거네, 웃기다”라고 말하자, 요리는 담담히 긍정한다. 요리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놀리고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다. 대신, 폐터널 너머에 있는 폐전차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 요리는 자신을 학대하는 아버지와 아이들에게 외부적으로는 저항하지 않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들을 배척하며 자폐적인 성향에 빠진다. 요리에게 아버지의 이름은 자신의 무의식에서 축출된 상태이다. 요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과하지 못했고, 상징계로 들어서지 못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나토와 요리는 태풍이 지나간 후, 폐전차 아래의 수로를 통해 밖으로 나온다. 요리가 “다시 태어난 걸까?”라고 묻자, 미나토는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아.”라고 답한다. 요리가 다시 “없다고?”라고 말하자, 미나토는 “응. 원래 그대로잖아.”라고 대꾸한다. 요리는 신나는 모습으로 “그렇구나. 다행이다!”라고 외칩니다. 이어서 미나토와 요리는 맑게 갠 하늘과 빛나는 햇살 아래서 즐겁게 소리 지르며 풀밭을 가로질러 뛰어간다. 이때 흐르는 음악은 사카모토 류이치가 작곡한 ‘Aqua’이다. ‘Aqua’는 작곡가의 딸이 태어났을 때 축복의 의미를 담은 곡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뛰어가는 모습이 두 소년을 축복하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Aqua’를 삽입했다. 아버지의 이름을 승계하지 못해 억압적인 상황에 힘들어하던 미나토와 요리가 자유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고레에다 감독의 마음이 느껴졌다.

∎ 욕망


라캉은 인간의 욕구를 필요(need), 요구(demand), 욕망(desire)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필요란 갈증, 식욕과 같은 생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욕구를 의미한다. 필요는 그 대상이 명확하므로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장기간의 양육 과정을 거치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타자에게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의존성 때문에 필요는 언어를 매개로 타인에게 전달되는 요구로 변모한다. 아이의 필요는 타자인 어머니를 통해 인정받고 언어로 표현될 때 비로소 의미 있게 된다. 이때 아이의 필요를 요구로 전환하도록 강제하고 언어적으로 개입하는 타자(어머니)의 기능을 라캉은 대타자(Other)라고 부른다. 대타자는 언어를 통해 아이의 필요를 기호화하고 상징계에서 소통되도록 하며, 아이를 주체로 인정해 주는 타자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반면 소타자(other)는 주체가 마주하는 타자로, 주체의 파트너처럼 상상적으로 가정되는 존재이다. 대타자와 소타자의 구분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차이를 통해 이론화된다. 아이는 대타자의 법에 따르며 자신의 요구를 인정받고자 하면서 언어에 더욱 종속된다. 그러나 필요가 요구로 변할 때 불가피하게 어떤 간격이 발생한다. 아이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필요를 해소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무한정 공급하고 인정해 줄 대타자의 무제약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제약적 사랑은 실제 삶에서는 불가능하기에, 언제나 요구하는 과정에서 전달되지 않거나 왜곡되는 부분이 발생하며, 라캉은 이 틈에서 욕망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욕망은 필요가 요구로 변할 때 충족되지 못하고 부족함처럼 남는 결여이며, 이는 주체의 욕망이 타자에게 인정받고 승인된다는 조건에서 발생하는 괴리이다. 필요와 요구의 차이는 라캉이 말하는 근본 결여이며, 욕망은 이 속에서 대상이 아니라 대상 너머에 있는 결여 자체를 겨냥한다. 언어 때문에 만들어진 결여의 효과는 어떤 대상을 통해서도 채워지지 않기에, 욕망은 끊임없이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옮겨가며 끝없이 반복된다. 욕망의 대상은 라캉이 사물(the Thing)이라고 부르는 실재이다. 그러나 실재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결핍 상태이다. 따라서 욕망이란 결핍에 대한 욕망이다. 욕망은 구체적인 물질성인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결핍과의 관계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 욕망이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욕망의 존재 이유는 만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욕망을 재생산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현실 세계는 주체가 대문자의 사물(the Thing), 즉 절대적 행복을 포기하고 대체물에 불과한 기표(記表, signifiant)들에 만족하도록 종용한다. 그러나 이 대체물은 결코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없다.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은 결핍이기 때문이다. 결핍은 우리에게 영원히 만족을 줄 수 없다.

∎ 욕망하는 사람들, 그리고 괴물의 의미

사오리는 죽은 남편과의 약속을 미나토에게 이야기한다. 그 약속의 내용은 미나토가 결혼하여 평범한 가족을 이루기까지 잘 돌보겠다는 것이다. 사오리는 미나토에게 ‘남자는 꽃 이름을 몰라야 인기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오리는 미나토를 통해 죽은 남편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사오리의 욕망은 평범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미나토는 아버지의 실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미나토는 스스로 동성애적 성 정체성을 확인한 상황이다. 사오리의 욕망은 미나토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실재이다. 사오리는 미나토의 결핍을 갈망하고 있다.

호리 선생은 매스 게임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2층에서 버티지 못한 미나토에게 웃으며 “그러고도 남자냐?”라고 말한다. 호리 선생은 미나토와 요리가 교실에서 미술 물감을 뒤집어쓰고 다툰 후, 양호실에서 두 사람에게 “남자답게 악수해.”라며 화해를 권유한다. 이는 학교에서 선생이 남자아이에게 흔히 할 수 있는 말이다. 대다수 사람은 이것이 어떻게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남자다운’ 아버지의 이미지에 콤플렉스를 가진 미나토에게는 사오리의 경우처럼 결핍으로 다가올 뿐이다.

요리의 아버지는 가정 방문한 호리 선생에게 자기 아들을 ‘머릿속에 인간의 뇌가 아니라 돼지의 뇌가 들어있는 괴물’이라고 지껄인다. 그리고 요리를 사람으로 되돌리겠다고 덧붙인다. 요리의 아버지는 결코 요리의 동성애적 성 정체성을 용납할 수 없다. 심지어 그는 요리의 머릿속에 돼지의 뇌가 들어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다. 게다가 요리의 아버지는 요리의 성 정체성을 바꾸겠다는 강박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미나토가 요리를 찾아오자, 요리의 아버지는 요리에게 병이 다 나았다고 거짓말하게 하고, 요리가 미나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자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고 폭행한다.

교장 선생이 욕망하는 대상은 자신이 평생 몸담아 온 학교다. 교장 선생은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남편에게 전가했지만, 답답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교장 선생에게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도덕이나 정의보다 학교 자체가 무엇보다 우선이다. 호리 선생에 의해 학교가 외부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을 상황에 직면하자, 동료를 보호하기보다는 희생양으로 삼고 진실을 밝히지 않고 덮어버린다.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네 사람이 처한 상황은 채울 수 없는 욕망이 불러오는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오리와 호리 선생은 악천후와 산사태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라진 미나토와 요리를 찾기 위해 나선다. 폐터널을 지나 산사태로 덮인 폐전차의 흙더미를 헤치고 창문을 열어젖히지만,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요리의 아버지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리에서 술에 취해 헤매다 비틀거리며 널브러진다. 교장 선생은 세찬 비를 맞으며 회한에 찬 눈빛으로 배수로를 거세게 흐르는 물을 내려다본다.

호리 선생이 학교로 미나토를 찾아온 날, 미나토는 계단에서 넘어져 상담실로 갔다가 난간에 나갔고, 우연히 교장 선생과 마주게 된다. 교장 선생을 따라 음악실로 간 미나토는 “잘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아이가 있어요. 말할 수 없어서 거짓말했던 거예요. 행복하지 못할 거라는 것이 들통나니까요.”라고 털어놓는다. 교장은 자신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하는 미나토에게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것을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쓸데없는 생각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을 행복이라고 부르는 거야.”라고 읊조린다. 사람은 욕구를 충족할 때 행복해진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욕구에는 필요, 요구, 욕망이 있다. 교장 선생의 ‘누구나 가질 수 있다’라는 말은 필요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생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욕구인 필요는 그 대상이 명확하므로 만족시킬 수 있으며, 그 욕구를 충족한 모든 사람은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것’은 욕망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욕망의 대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실재이며, 욕망은 결핍에 대한 갈망이므로 충족되지 않으며 행복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교장 선생은 미나토에게 요리를 자신의 성 정체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욕망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한 사람의 친구로 대하라고 이야기해 주었다고 이해된다. 교장 선생의 말을 듣고 미나토는 친구를 찾아 요리가 사는 집으로 향한다.

영화 예고편에서 등장하는 “괴물은 누굴까? (怪物はだれだ?)”라는 대사는 관객들에게 진짜 ‘괴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괴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요리의 아버지나 교장 선생님 같은 인간성을 잃어버린 존재를 ‘괴물’ 같다고 지칭하는 것은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들보다도 주인공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사람들은 가까운 엄마나 부모와 선생님이라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사오리가 말하는 ‘평범한’이나 호리 선생이 언급하는 ‘남자다운’이라는 표현에 의도치 않은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이 폭력성은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요리의 아버지나 교장 선생의 욕망은 누구나 쉽게 문제가 있다고 인식할 수 있지만, 사오리와 호리 선생의 경우처럼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 속에는 그 말을 듣는 누군가에게 결핍과 억압으로 다가올 수 있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간파하기는 쉽지 않다. 괴물은 바로 그런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참고 문헌


https://namu.wiki/w/자크 라캉.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6731, [박정자 칼럼] 한 스타 저술가의 터무니없는 오독 - 라캉의 실재.

『원더풀 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저, 송태욱 역, 서커스, 2016.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저, 이지수 역, 바다출판사, 2020.

권은선,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서 부성의 의미에 대한 연구」, 『인문사회 21』 제13권 제4호, 2022.

정수완,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영화에 나타난 가족의 의미 연구」, 『씨네포럼』 제19호, 2014.

https://www.sedaily.com/NewsView/2D5A5O9AMJ,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지목한 ‘괴물’은? 감독이 직접 밝혔다 [정지은의 무비이슈다].

https://namu.wiki/w/사카모토 유지.

http://m.cine21.com/news/view/?mag_id=103941, [인터뷰] 어쩌면 진실은 이야기 바깥에, 〈괴물〉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

권영란, 「아버지의-이름이라는 은유에 대하여: 라깡의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상담학회지』, vol.31, no.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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