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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 씨! 영원회귀가 뭐예요?

by 메티콘

K는 쿤데라 씨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그러나 읽는 도중 철학적인 모티프를 만날 때마다 작가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K는 소설의 첫 장에 등장하는 영원회귀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K는 작가 쿤데라 씨를 찾아가서 다짜고짜 물었다.


K: 쿤데라 씨! 저는 K라고 합니다. 영원회귀란 무엇인가요?

쿤데라 씨: K라고? 자네가 혹시 카프카의 『성』에 등장하는 K가 아닌가? 내가 카프카의 소설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K: 저는 쿤데라 씨가 말하는 K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독자 K입니다. 제가 책장을 펼치자마자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세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영원회귀에 대해 저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난감해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쿤데라 씨: 당연히 난감해하라고 그렇게 한 거야.

K: 네?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고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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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 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들어있는 니체의 핵심 사상을 알아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자네처럼 어려움을 겪을 것이 뻔해. 그래서 아예 첫 페이지에 핵심 사상 중 하나인 영원회귀를 넣었네. 이해하기 힘든 글을 애써 읽지 말라는 뜻이야.

K: 너무한 것 아닌가요? 저 같은 사람들에게 니체의 책은 정말 읽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더 많이 읽는다고 하네요.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말이죠.

쿤데라 씨: 그렇군. 출판사에는 좋은 소식이군. 자네가 용기를 내어 나를 찾아왔으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이유를 말해줄까? 나는 니체가 스스로 제5의 복음서라 불렀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견줄 만한 소설을 쓰고 싶었네.

K: 왜 그런 소설을 쓰고 싶으셨나요?

쿤데라 씨: 그걸 알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소설을 왜 쓰는지 이해해야 해. 나는 인간의 실존, 즉 인간이 될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쓰지. 이를 위해서는 현재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하고. 데카르트에 의해 근대가 시작되었을 때, 인간은 신을 대신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어. 그러나 지식과 기술이 계속 발전함에 따라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단순한 사물처럼 취급받으며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지.

K: 맞아요. 저도 그런 느낌을 자주 받곤 해요. 사람들은 심지어 이런 말도 하죠. 산업 사회에서 인간은 부속품에 불과하고 부속품 하나쯤 없어도 사회는 돌아간다고 하죠.

쿤데라 씨: 그렇지. 이런 현실을 예전에 예견한 분이 계셨어.

K: 그분은 누구신가요?

쿤데라 씨: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 나는 세르반테스를 근대 소설의 문을 열어젖힌 인물이라고 생각해. 아, 맞다! 이번 도서관 지혜학교 과정에서 『돈키호테』에 대한 수업을 받을 예정이지?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면 너무 길어지니,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지.

K: 네.

쿤데라 씨: 다시 소설을 쓰는 이유로 돌아가면, 나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탐구하여 존재의 의미를 다시 찾기 위해 글을 쓴다네. 다시 말해, 인간 내면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할 수 있지. 카프카도 미로에서 길을 잃은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를 탐색했지. 그러니 내가 카프카를 각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자네가 K라고 소개했을 때 내가 왜 흥분했는지 이제 좀 이해가 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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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네. 쿤데라 씨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는 어떻게 연결되나요?

쿤데라 씨: 인간에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외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니체야. 그리고 니체의 이러한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낸 책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고. 나도 니체처럼 삶을 긍정해. 그래서 나는 우선 니체의 사상을 전범(典範)으로 삼아 소설을 구상했어.

K: 제가 니체의 핵심 사상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쿤데라 씨: 알겠어. 자네의 정성이 기특해서 해 주는 거야. 그런데 자네, 좀 거저먹으려는 것 같아!

K: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서 해 주세요.

쿤데라 씨: 니체 이전의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는 인간이 사는 현실의 세계를 불완전하고 부정적으로 인식했어. 그들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완벽한 관념의 세계를 상상했지. 플라톤의 이데아와 기독교의 천국을 그 예로 들 수 있지. 고대와 중세만 그런 것이었을까? 천만에! 관점은 이데아와 천국에서 지상으로 바뀌었지만, 데카르트나 칸트도 별반 다르지 않았어. 그들은 살아 있는 인간의 현실 감각이나 경험보다는 본성에 초점을 맞춘 ‘본유관념’이나 인간이 인지하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인 ‘물자체’라는 개념에 매달렸지. 한마디로, 현실과 감각의 세계를 등한시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중요시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이어졌어.

K: 아! 네.

쿤데라 씨: 니체가 연구를 해보니, 그런 이분법적 사고는 문제가 많을 뿐만 아니고 망치로 깨부숴야 할 정도였어. 예를 들어 예수의 경우 니체가 성경 원전을 직접 연구해 보니, 그는 이 땅에서 실천하는 삶을 보여준 위대한 분이었거든. 그런데 기독교 신학자들과 교회는 천상의 세계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진실한 예수를 죽였다고 니체는 생각했어.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나온 거야. 니체가 신, 즉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기독교 신앙이 그를 죽였다는 의미지.

K: 아, 그렇군요. 그래서 니체가 이분법적 관념을 대표하는 기독교를 비판하고,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게 된 것이군요.

쿤데라 씨: 그래서 니체는 현실 세계와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강하게 긍정했어. 그는 세상의 존재들을 움직이게 하는 근본 동력을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과학 논문을 읽었지. 그 결과, 그 동력이 신의 뜻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지닌 ‘힘에의 의지’라고 선언했어. 그런데 현실 세계는 변화와 생성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계야. 스스로 힘에의 의지를 가진 인간이 모든 것이 변화하는 세계에 던져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K: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요? 음… 저라면 ‘어차피 바뀔 건데 대충 살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인가요?

쿤데라 씨: 그럴 리가 있겠는가. 어쨌든 변화가 반복적으로 영원히 일어나는 삶을 사는 인간은 자네 말대로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지.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이런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을 긍정할 수 있겠냐는 말이야. 니체는 이러한 상황을 ‘영원회귀’라고 명명했어.

K: 그렇다면, 여기서 니체의 사상도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 아닌가요?

쿤데라 씨: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니체는 그런 허무주의, 즉 영원회귀의 상황을 회피하지 말고 강하게 긍정하라고 외쳤어. 그리고 이렇게 영원회귀의 상황을 극복한 인간을 ‘위버멘쉬’라고 불렀어. ‘위버(Über)’는 ‘넘어’를 뜻하고 ‘멘쉬(Mensch)’는 ‘인간’을 의미해. 니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을 보통 ‘초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신화적이거나 영웅적인 이미지가 강해서 본래의 뜻을 왜곡하는 것 같거든. 니체의 메시지는 이거야. 영원회귀의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매 순간 삶에 직접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며 살아가야 한다.

K: 그렇다면 니체 사상의 핵심은 네 가지 키워드로 말할 수 있겠네요. ‘신의 죽음’,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위버멘쉬’.

쿤데라 씨: 빙고!

K: 이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영원회귀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네요. 그런데 니체의 핵심 사상과 소설의 내용이 다소 다른 것 같은데요?

쿤데라 씨: 내가 전범으로 삼았다고 했지, 그대로 따라서 썼다고 했나? 니체는 철학자고 나는 소설가야. 니체는 자신의 철학적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인간을 영원회귀의 상황에 내몰고 이를 극복한 위버멘쉬를 창조하지. 소설가는 그렇게 하지 않아. 실제로 있을 법한 인물과 상황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지. 나는 소설 속의 인물들을 영원회귀 같은 우스꽝스러운 상황으로 몰아넣지 않아. 그들은 우리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고, 죽으면 끝이지. 회귀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말이야.

K: 그러면 니체 사상의 개념들은 소설 속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쿤데라 씨: 음……. 영원회귀의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인간의 개념은 무거움과 가벼움, 영혼과 육체 사이에서 갈등하며 오락가락하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이야기와 연결될 수 있지. 신 또는 이데아와 변화무쌍한 현실의 개념은 키치적 프란츠와 반키치적 사비나의 이야기와 연관 지을 수 있고.

K: 키치라고요?

쿤데라 씨: 자네는 키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사람들이 이데아와 천국의 공백을 키치로 메웠다고 생각하네. 이데아와 천국의 관념이 무너졌지만, 위버멘쉬가 될 수 없는 평범한 인간들이 어떻게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을까? 인간들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지상 낙원을 상상하지. 너와 내가 동질성을 갖는, 바로 키치의 세계 말이야. 프란츠는 키치에 자신을 내던지고 대장정에 합류하지. 프란츠의 정체성은 키치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하지만 사비나는 키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반과 탈출을 계속해. 사비나가 키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위버멘쉬처럼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지키겠다는 몸부림이지. 물론 사비나도 너무나 인간적으로 키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

K: 키치에 대한 또 다른 의미를 알게 된 것 같네요. 이 소설의 3부 「이해받지 못할 말들」은 어떤 내용인가요? 갑자기 툭 튀어나온 돌부리 같았어요.

쿤데라 씨: 3부뿐만 아니라 키치가 주제인 6부 「대장정」도 마찬가지이지 않았나? 이 두 부분은 내가 소설 속에 끼워 넣은 에세이라고 볼 수 있어. 즉, 소설 속에서 작가인 내가 직접 목소리를 내는 셈이지. 소설 속 인물들에게 내 생각을 모두 이야기하도록 할 수 없어서, 내가 직접 표현했다고 생각하면 돼.

K: 예, 쿤데라 씨의 다른 소설들에도 직접 등장하는 부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3부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쿤데라 씨: 철학자들은 명제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나가잖아. 명제가 흔들려서는 안 돼. 하지만 소설가는 사람들이 같은 사안에 대해 가지는 다양한 생각에 더 관심이 있지. 3부 「이해받지 못할 말들」은 소설가가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표현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어. 물론 이는 사비나와 프란츠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배경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

K: 그럼 마지막으로 카레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쿤데라 씨: 어, 테레자의 애완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런 말이 나와. “인간은 위버멘쉬와 짐승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 건너편으로 건너가기도 어렵고 되돌아보기도 어렵고 멈춰서기도 어렵다.” 카레닌은 짐승이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적이 없잖아. 카레닌은 인간이 동경했던 키치 이전의 이데아와 천국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지. 테레자와 토마시와 같은 평범한 인간들은 영원회귀를 극복한 위버멘쉬의 세계에도 낙원에서 추방된 적이 없는 카레닌이 사는 천국에도 갈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로 생각해 봐. 그 밧줄 위에서 추락하지 않고 흔들리는 삶을 사는 것이 현실을 사는 인간의 실존이지.

K: 쿤데라 씨!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K는 쿤데라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헤어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에 쿤데라 씨의 부고 기사가 실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별세···“문학은 프로파간다가 될 때 그 가치를 잃는다.”

체코계 프랑스 작가 밀란 쿤데라가 프랑스에서 사망했다고 유럽 매체들이 12일 전했다. 스탈린 전체주의에는 반대한 공산당원이자 체코 민주화운동 ‘프라하의 봄’에 참여한 활동가였다. 향년 94세.

프랑스 대표 시인 중 하나인 루이 아라공은 쿤데라를 “금세기 최고의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 주는 소설가”라고 <농담> 서문에 썼다.

1982년 대표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집필을 마무리해 1984년 출간한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역사의 상처라는 무게에 짓눌려 단 한 번도 ‘존재의 가벼움’을 느껴 보지 못한 현대인의 삶과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쿤데라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오른다.

쿤데라는 자신의 작품이 반체제나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경계했다. 그는 1980년대 파리 리뷰에 자신의 주제는 정치나 사회 비판이 아니라 “현대 세계 인간 존재의 복잡성”이라고 말했다. 1981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와 인터뷰할 때는 “예술과 문학은 공산주의든 반공주의든 프로파간다(선전)가 될 때 그 가치를 잃는다”라고 했다.


K는 쿤데라 씨와 같은 거장이 떠나는 운명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쿤데라 씨가 언급했듯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K에게 그러한 운명의 삶은 여전히 미궁 속의 물음표와 같았다. K는 쿤데라 씨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게 된다면 삶의 긍정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K는 쿤데라 씨의 명복을 기원했다.


∎ 참고 자료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역, 책세상, 2019.

- https://www.youtube.com/watch?v=지혜의 빛 : 인문학의 숲.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feat. 신의 죽음,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위버멘쉬)’

- https://www.khan.co.kr/article/202307121817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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