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천년고도 공주에서 탐방할 박물관으로 ‘충청남도역사박물관’을 선정했다. 맨 처음 알아본 곳은 국립공주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의 지명도, 전시품의 내용, 역사적 가치 등으로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내가 최우선으로 꼽는 선정 기준은 문화해설사가 있느냐 이다. 국립공주박물관에 연락해 보니 상주하는 문화해설사가 없고 관람객이 자유로이 둘러볼 수 있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어서 알아본 곳이 이름도 생소한 충청남도역사박물관이었다.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서는 문화해설사가 상주하니 언제든 해설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문화해설사는 전시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관람객들에게 흥미로운 해설을 제공하여 전시물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훌륭한 전시품들이 있다 해도 눈으로만 보면 겉핥기에 그치기 쉽다. 그러나 전시품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의미를 스토리텔링으로 흥미롭게 풀어준다면 비로소 그 가치를 제대로 느끼고 기억에도 오래토록 남는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나 할까.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이는 서정국 문화해설사였다. 그는 감색 티셔츠와 청회색 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단정한 차림의 노인이었다. 체격은 마른 편이었고 머리에는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었다. 움직임은 다소 느렸지만 안경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은 매서웠다. 후속 취재를 해보니 그는 공주에 있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퇴직하고 주말역사체험교실을 이끌기도 했으며 십여 년 이상 문화해설사 활동을 해왔다. 그는 우리를 안내하며 해설을 시작하자마자 사자후를 토했다.
첫 번째 해설은 기획전시인 ‘한글, 마음을 적다’였다. 가족 간의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은 조선시대 왕실과 충청도 사대부가에서 남긴 한글 자료를 소개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사가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를 금기시하여 남은 수가 많지 않다고 했다. 이번 전시된 왕실 한글 편지는 사가에서 없애지 않고 소중히 보관한 귀한 자료들이었다. 《정조어필한글편지첩》은 정조가 큰외숙모인 여흥 민씨에게 보낸 편지 등을 모아 만든 편지첩이다. 전시된 편지 중에 정조가 원손(元孫)이었을 때 쓴 편지가 있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숙모님께
서릿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 알고자 합니다. (큰외숙모님을) 뵌 지 오래돼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편지 보니 든든하고 반갑습니다.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니 기쁘옵니다. 원손(元孫)”
어린이가 쓴 비뚤배뚤한 편지이지만 큰외숙모와 외할아버지의 안부를 여쭙는 정성스런 마음이 느껴졌다.
《자경전기》는 순조와 순원왕후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가 어머니의 명을 아버지의 『자경전기』에 토를 달아 한글로 옮겨 쓰고 이어서 번역문을 적은 글이다. “창경궁에 전각이 있으니 바로 자전께서 거처하시는 전각이다.”로 시작하는 글은 단아한 궁서체로 써내려갔다. 덕온공주의 정갈한 성품과 지극한 효심을 알 수 있었다.
〈망전단자〉는 어머니 순원왕후가 막내딸 덕온공주의 제사에 보낸 음식 목록이다. 덕온공주는 결혼한 지 7년 후에 2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밤다식, 오미자다식’ 등 딸이 생전에 좋아했을 떡과 과자를 어머니가 손수 챙겨 보냈다. 자식을 먼저 앞세운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했다.
《선비유언》은 한말 충청 지역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전재 임헌회의 어머니 남양 홍씨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남긴 유언으로 남긴 글을 정리한 글이다.
“내가 이제 죽기 쉬우니 너에게 이를 일이 있어 간신히 써서 준다. 나 죽은 후에 보고 싶거든 내 원을 내 원을 버리지 말고 부디부디 열지 말아라. 맥 보아 약명 내여 주었으니 나 살아 있는 것 같이 너 조심하여 잘 먹고 쉬 낫기 바란다. 모”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써내려간 글에는 자식이 몸조심하고 약을 잘 챙겨 먹길 당부하는 어머니의 진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찡했다.
두 번째로 공주의 백제 왕릉에 대한 해설이 이어졌다. 박물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무령왕릉을 일부를 재현해 벽돌로 쌓은 벽이 있었고 그 앞을 진묘수 모형이 지키고 있었다. 그 앞에서 서정국 문화해설사는 일제강점기에 공주 일대에서 벌어진 문화재의 수난사, 무령왕릉 엉터리 발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가치에 대해 해설했다. 때로는 울분을 토했고 때로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해설 중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진묘수에 관한 이야기였다.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 모형이 전시된 진묘수(鎭墓獸)는 무령왕릉 발굴 시에 출토된 것이다. 사람들이 무령왕릉을 발굴하기 위해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마주친 것이 진묘수였다. 진묘수는 외부 침입자로부터 망자와 무덤을 지키고 망자의 혼백을 저승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그 생김새를 자세히 보니 몸은 둥글둥글하고 통통했다. 눈은 올망졸망했고 입은 뭉툭했다. 머리에는 철로 만든 작은 뿔이 달렸고 등에는 사자 갈기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무령왕릉의 진묘수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것이라고 했다. 중국의 진묘수는 무서운 괴수 모양을 하고 있다는데 백제의 진묘수는 귀엽고 친근했다. 마치 근엄한 표정의 부처님이 백제에 오면 꾸밈없이 해맑은 미소를 짓는 서산마애삼존불처럼 변하는 것 같이 무령왕릉의 진묘수도 백제인의 해학을 보여주는 듯했다.
세 번째 해설은 2층으로 이동해 마련된 ‘조선통신사실’에서 진행되었다. 제일 먼저 눈을 사로잡는 것은 ‘입강호성도(入江戶城圖)’였다. 입강호성은 ‘강호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조선통신사가 일본 에도에 도착하여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시된 그림은 인조14년의 조선국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것으로 크기가 세로 30.7cm, 가로 595cm의 대작이었다. 맨 앞에 조선 국왕의 국서를 모신 가마에서부터 맨 뒤에 말을 탄 의원까지 475명의 사행단과 조선 통신사 일행을 호위하는 왜인들의 행렬을 상세하게 그렸다. 전시실 한편에는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신미통신일록(辛未通信日錄)』이 전시되어 있었다. 신미통신일록은 1811년 마지막 통신사의 정사로 파견된 죽리 김이교(金履喬, 1764~1832)가 저술한 사행기록으로 통신사의 인적구성 및 소지 물품, 서울에서 출발해 일본 대마도까지 가는 여정 등이 자세히 담겨 있다고 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과 과거에 어떻게 교류했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남역사박물관에는 해설을 들은 전시실 외에도 ‘역사문화실’, ‘충청감영실’, ‘생활문화실’, ‘실감영상실’ 등 다양한 전시실이 있었다. 일정상 1시간 밖에는 탐방에 할애할 수 없다고 귀띔하니 서정국 문화해설사는 매우 아쉬워했다. 아마도 시간이 허락했다면 그는 밤을 새워서라도 해설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혹시 충청남도역사박물관을 탐방할 계획이 있다면 서정국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을 수 있을지 물어보고 온종일 시간을 비워놓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