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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Sep 23. 2021

이도우 작가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황량한 들판에 알곡이 떨린 짚들을 포근히 감싸 안아주는 하얀 원통모양의 곤포 사일리지. 사람들은 곤포 사일리지라는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 비슷한 형상을 떠올려 흔히 마시멜로라고 부른다. 이도우 작가가 오랜만에 펴낸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에서 나오는 마시멜로는 여러 개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 작품 전반부에서는 남자 주인공 은섭이 ‘무관심’ 또는 ‘기억 못함’이라는 꽃말을 붙이고 작품 후반부에서는 여자 주인공 해원이 ‘뒤늦게 깨달은 사랑’이라는 꽃말을 붙인다. 

우리가 보통 마시멜로 하면 과자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마시멜로는 본디 허브과 식물의 이름이며 그 꽃말은 ‘자애, 어머니의 사랑, 은혜’라고 한다. 그런데 작가가 마시멜로의 진짜 꽃말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따뜻한 사랑과 화해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데 버젓이 드러내기 겸연쩍어 마시멜로를 들어 에둘러 표현한 건 아닐까?   

사랑과 화해의 이야기


십오 년 전에 일어난 과실치사. 그 사건으로 인해 해원과 주위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해원 아빠는 그 자리에서 죽고 해원 엄마는 칠년 형을 살게 되면서 해원은 강원도의 농촌 마을 북현리에서 소설가인 이모 명여와 같이 살게 된다. 

고등학생이었던 해원은 친구 보영에게 사건에 대해 고백을 했는데 보영은 다른 친구에게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학교에서 떠도는 소문으로 깊은 상처를 받은 해원은 가출을 하고 만다. 해원의 옆집에 사는 동창 은섭도 양부모를 떠나 혼자 살려고 집을 나온다. 은섭은 기차역에서 해원을 발견하고 청도의 민박집까지 조용히 뒤를 따른다. 은섭의 연락으로 이모는 해원을 찾아온다. 이모가 해원을 데리고 떠나는 모습을 본 은섭은 자신도 양부모가 계신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서른 살의 미술 강사 해원이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껴 북현리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북현리에는 이모가 운영하는 펜션 ‘호두하우스’가 있다. 해원이 다시 찾은 호두하우스는 이미 폐업한 상태였고 두 번째 소설 이후 절필한 이모는 한쪽 눈을 실명하도록 내버려둔다. 이모가 남긴 편지로 해원은 오래전 사건에 대한 전모를 알게 된다. 그로 인해 해원은 이모를 거세게 몰아붙이지만 본인 또한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그런 해원에게 은섭은 사랑과 믿음으로 대하고 해원은 화해의 길로 들어선다. 해원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이모는 자신의 인생을 찾으러 떠난다. 그리고 호두하우스에는 화해하게 되는 또 한 사람, 해원의 엄마가 돌아온다.      

굿나잇책방


시골 기와집을 개조해 만든 ‘굿나잇책방’은 은섭이 운영하는 독립서점이다. 굿나잇책방에서 해원이 삶의 활기를 회복하고 은섭과 사랑을 키워간다. 책방에서 은섭은 수정, 현지, 승호, 근상과 함께 독서모임을 한다. 책방에서 일을 하게 된 해원은 독서모임 사람들과 북스데이 이벤트를 기획한다. 해원은 이벤트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정을 느낀다. 독서모임 사람들은 해원이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이 작품에 나오는 굿나잇책방은 내게 여러 의미로 다가왔다. 해원과 은섭에게 그런 것처럼 누군가의 존재를 알아가고 함께 하는 특별한 공간을 나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 속의 독서모임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성장해가는 모임을 만들고 싶어졌다. 끝으로 소설 속의 굿나잇책방처럼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소통하며 사람들과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를 나눌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모의 고백 그리고 화해


이모는 은섭을 통해 해원에게 자신이 과실치사를 저질렀음을 고백을 한다. 해원은 이모에게 싸늘한 말들을 내뱉는다. 해원의 엄마는 진실을 묻어두고자 했지만 이모는 더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지난 십오 년 내내 생각했다. 네 엄마는 그러지 말자고 했지만, 나는 언젠가 네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p.363)  

   

자신이 저지른 죄와 무고한 언니가 형을 대신 치렀다는 죄책감으로 이모는 십오 년 동안 자신에게 벌을 내렸다. 그리고 이모는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독자인 나로서는 해원이보다 이모에게 동정이 가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모를 보며 《죄와 벌》의 로쟈가 생각났다. 로쟈는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극심한 고뇌로 고통스러워한다. 로쟈에게 진정한 벌은 8년의 징역형보다 자수하기까지 겪었던 괴로운 마음이었다. 하물며 이모는 십오 년간 마음의 형벌을 받고 자수도 할 수 없는 처지여서 더욱 안타까웠다. 하지만 로쟈가 소냐에게 자신의 범죄 사실을 고백하고 참회함으로써 갱생의 길로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이모도 해원에게 죄를 고백하고 삶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떠났다고 믿는다. 이모가 지난날의 무거운 죄책감을 털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사랑은 상대를 변화시킨다


은섭의 마음에 해원은 학창시절부터 의미 있게 자리 잡은 존재이다. 그렇지만 은섭에게 해원은 단지 짝사랑의 대상이었을 뿐, 그마저도 잊힌 듯 했다. 그러다가 해원이 서울생활을 잠시 접고 북현리로 돌아오면서 희미한 사랑의 불꽃이 되살아난다. 동창회에서 은섭은 자신의 속마음을 해원에게 슬쩍 내보인다. 해원이 은섭의 책방에서 일을 돕고 한파로 호두하우스가 동파되자 해원은 은섭과 한집에서 지내게 되면서 둘의 사랑은 무르익어 간다. 하지만 이모의 고백을 은섭이 해원에게 대신 전하면서 둘의 관계는 서먹해진다. 마음이 불편했던 해원은 산으로 떠난 은섭을 찾으러 나섰다가 조난을 당한다. 해원은 자신을 구하러 달려온 은섭에게 다시 한 번 사랑을 확인한다.

     

“…내 멋대로여서 나한테 실망했지.”

“아니.”

“한심하지 않았어?”

“아니. 언제나 예뻐. 늘 그랬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예뻐.”

“…그럼 나 서울 가지 말까?”

“아니, 그래도 가.”

해원은 또 한 번 풋 웃어버리고는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조금 울었다. 가슴속에 박혔던 가시가 스르르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pp.397~398)

     

겨우내 얼어붙은 계곡물이 봄을 맞이하면서 서서히 녹듯이, 봄날처럼 따스한 은섭의 사랑이 얼어붙은 해원의 마음을 녹이기 시작한다. 사랑은 상대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대단한 힘을 지녔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고 그들의 사랑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당신과 나우리의 공동체는 안녕하신지요?”


작가는 굿나잇책방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들만의 관계에 국한된 폐쇄적인 공동체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독서 모임 사람들이 자칫 소외되기 쉬운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소박한 사랑을 실천하는 대목에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승호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 

혜천의료원 응급실인데요. 거기가 호두하우스인가요?”

“네, 그런데요.”

“어떤 할아버님이 119에 실려 오셨는데 보호자가 어린아이뿐이에요. 아이가 아는 어른이 그쪽에 있다고 했어요.” (중략)

“저체온증으로 쓰러지신 걸 마을 주민이 발견해 구급차를 부르셨나봐요. 지금 의식은 돌아오셨지만 폐렴 증상이 보여서 입원하셔야 합니다.” (pp.321~322) 

    

의지할 데가 없는 어린 승호는 병원에 도와 줄 어른이 호두하우스에 있다고 말한다. 소식을 들은 해원과 은섭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고 책방 모임에도 알린다. 수정과 현지도 부랴부랴 달려와 걱정과 위로를 한다. 야간 간병은 은섭이 남아서 하기로 하고, 해원은 승호를 호두하우스로 데려가서 돌본다.

소설에서는 승호 할아버지가 마을 주민과 독서 모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혹한기나 혹서기에 보일러나 에어컨을 돌릴 돈이 없어서 독거노인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종종 듣는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현실과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게 하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작 김승섭이 물었던 말이 생각난다. “당신과 나, 우리의 공동체는 안녕하신지요?”

     

내 마음에 자리한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불경기로 세상은 날로 각박해지고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사람들은 더욱 고독해져만 가는 분위기이다. 디지털 세상은 빠르고 편리한 반면, 사람들의 마음이 건조해지기 쉽다. 아날로그 방식인 책을 통해 글을 만나는 동안 소소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지면에 가득 나열된 글자들은 웹소설과 달리 글의 의미를 천천히 음미하게끔 해 주고, 충분히 사색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에 아날로그 방식의 독서가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 소설의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되었고 제목부터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언제 한번 얼굴 보자’ ‘언제 한번 만나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언제 만날지 확실하지 않는 애매하고 두루뭉실한 표현인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많은 말을 쏟아내지만 그 말들 중에 의미 있고 진심이 담긴 말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책을 읽고 나서 은섭과 해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은섭은 봄날처럼 따스하고 지속적인 사랑이 상대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게 할 수 있음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해원이 마음의 갈등을 내려놓고 이모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용기가 중년의 내게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마음이 경직되어 사람들과 화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 마음 속에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던 이모는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이모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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