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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Sep 23. 2021

먼 지방 사람들이지만 왕명의 존엄함을 잘 알아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第二十三絶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第二十三絶 

   

최부(崔溥) 지음, 고광문 역주(譯註)


遠人頗識尊王命 먼 지방 사람들이지만 왕명의 존엄함을 잘 알아

扶我登途笳鼓競 나를 부축하여 길에 오르니 피리 북소리 요란하네

浦口巉嵓道士羊 포구의 울뚝불뚝한 바위는 도사양인 듯하고

路周磊落仙人鏡 길가의 우뚝한 돌무더기는 선인경처럼 보이네


원인(遠人)

원인(遠人)은 멀리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제주와 같이 먼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가고경(笳鼓競)

가고경(笳鼓競)은 북과 피리가 다투듯 여러 악기들이 시끄럽게 연주한다는 뜻이다.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 소량(蕭梁)의 조경종(曺景宗)의 시(詩)에 나오는 말인데 『남사(南史)』 「조경종열전(曹景宗列傳)」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양 무제(梁武帝) 때의 장군 조경종(曹景宗)이 일찍이 위(魏)나라를 격파하고 개선했을 적에 무제가 화광전(華光殿)에서 연회를 베풀고 연구(聯句)를 지으면서 심약(沈約)으로 하여금 운자를 나누어 주게 했던바, 조경종 차례에 와서는 운자를 이미 다 사용하고 ‘경병(競病)’ 두 자만 남았는데, 조경종이 즉시 붓을 잡고 시 한 수를 대번에 이루어 “떠날 때는 아녀자들이 슬퍼했는데, 돌아오니 피리 북소리 다퉈 울리네. 길 가는 사람에게 시험 삼아 묻노니, 내가 저 곽거병과 어떠한가. 〔去時兒女悲 歸來笳鼓競 借問行路人 何如霍去病〕”라고 하자, 무제 및 군신(群臣)들이 모두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한다. 

    

참암(巉嵓) 뇌락(磊落)

참암(巉嵓)은 ‘가파르다’라는 뜻이고 뇌락(磊落)은 ‘우뚝하다’라는 뜻이다.

신라(新羅)시대 최치원(崔致遠)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참산의 신령에게 제사 지낸 글〔祭巉山神文〕」에는 ‘오직 이 산의 신령만은 뇌뇌락락(磊磊落落)하여 제학(鯷壑)에 높이 솟아 군림하고, 참참암암(巉巉嵒嵒)하여 경담(鯨潭)을 굽어보며 진압합니다. 〔惟靈 磊磊落落 高臨鯷壑 巉巉嵒嵒 俯壓鯨潭〕’라는 말이 나오는데 최부가 이 시(詩)에 차용(借用)하지 않았나 싶다. 

    

도사양(道士羊)

도사양(道士羊)은 황초평(黃初平) 전설에 나오는 돌들이 변해서 된 양(羊)으로 여기서는 포구의 기암괴석을 의미한다.

진(晉)나라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 「황초평전(黃初平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단계(丹溪) 사람 황초평은 열다섯에 양을 몰고 산에 갔다가 어떤 도사를 만났다. 그가 착하고 공손한 것을 안 도사는 금화산(金華山)의 석실에 데려가 도술을 가르쳤고, 그는 40여 년간 집에 가지 않았다. 형 초기(初起)가 여러 해 산을 헤맸지만 동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초기는 한 도사를 만나 “아우의 이름이 초평인데 양을 몰고 나간 지 40여 년이 지났건만 생사를 알지 못하니 점을 좀 쳐달라”고 부탁했다. 도사가 “금화산에 양치는 사람 하나 있어 성이 황이요 이름은 초평인데, 그대의 동생이 아닌가 싶다”고 하자 즉시 그 도사를 쫓아가 아우를 만났다. 형이 양은 한 마리도 없는 걸 의아해하자 초평은 “형이 보지 못할 뿐”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양들아 일어서라!” 하고 소리치자 흰 바위가 순식간에 수만 마리의 양으로 변했다. 

황초평의 전설을 이르는 말로는 질석성양(叱石成羊), 질석위양(叱石爲羊) 질석양귀(叱石羊歸), 초평질양(初平叱羊), 동석위양(動石爲羊), 초평질석(初平叱石), 금화양질(金華羊叱)이 있다.   

  

노주뢰락선인경(路周磊落仙人鏡)

노주뢰락선인경(路周磊落仙人鏡)은 말 그대로 옮기면 ‘길가에 우뚝한 선인경’인데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인경(仙人鏡)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선인경(仙人鏡)은 고려 동경(高麗 銅鏡)의 한 종류이다. 고려 동경은 그 형태에 있어 원형이 가장 많고, 단뉴(單紐, 꼭지가 1개 달린 것) 형식이 주류를 이룬다. 여기에 나타나는 무늬는 대개 동물문, 식물문, 산경문, 기하학문, 문자문 계통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물무늬로는 사신(四神, 사수(四獸)라고도 함)을 비롯하여 용, 학, 봉황, 잉어, 앵무 등이 있고 식물무늬에는 국화, 파초, 갈대, 포도, 초화 및 당초 등이 있다. 인물문, 산경문으로는 옛 인물 이야기와 상상적인 세계를 나타낸 것으로서 허유세이경(許由洗耳鏡), 불상거울, 선인거울(仙人鏡) 등이 있다.

제주의 길가에는 방사탑(防邪塔)이 있는데 위에서 보면 둥그렇고 꼭지가 있는 형태가 선인경(仙人鏡)과 유사하다. 방사탑(防邪塔, 답 또는 거욱대라고도 부름)은 마을의 안녕을 위해 풍수지리상 허한 곳에 쌓은 원형의 돌무더기 탑이다. 어떤 곳에서는 그 위에 동자석 같은 석상이나 새 모양의 자연석 석상을 얹어 놓기도 한다. 그 세운 모양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이호동의 방사탑은 돌무더기 위에 ‘까마귀’를 세우고 까마귀라고 부른다. 한경면 용수리는 매를 세운 뒤 ‘매자매기’라고 부른다.

최부가 조천포구에서 제주 관아까지 이동하는 도중에 길가에 세운 원형의 방사탑을 보고 선인경에 비유하였으리라 유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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