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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Sep 23. 2021

청조〔병졸〕와 채란〔기생〕은 약속이나 한 듯이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第二十四絶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第二十四絶 

    

최부(崔溥) 지음, 고광문 역주(譯註)                         


靑鳥彩鸞如有期 청조〔병졸〕와 채란〔기생〕은 약속이나 한 듯이

護予呵擁城中馳 나를 에워싸고 ‘물렀거라’며 성안으로 달려가네

奔迎拜跪稍知禮 달려와 맞이하고 절하고 꿇어앉으니 자못 예를 아는 것 같은데

聒耳語音譯後知 떠들썩한 말소리를 통역을 해야 알아듣겠네


청조(靑鳥) 채란(彩鸞)

청조(靑鳥)와 채란(彩鸞)은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신조이다.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에서 ‘서왕모는 궤(几)에 몸을 기대고 있으며, 머리에는 번쩍이는 옥꾸미개를 쓰고 있다. 그녀가 있는 곳의 남쪽에 크고 파란 새가 세 마리(三靑鳥) 있는데, 모두 용맹하고 건장하며 오직 서왕모만을 위해 음식을 찾는다.’라고 청조(靑鳥)에 대해 적고 있다. 청조(靑鳥)는 서왕모(西王母) 곁에 머무는 새로, 서왕모가 하강할 때면 먼저 날아온다고 한다.

채란(彩鸞)은 빛깔이 고운 난조(鸞鳥)로 노래를 부르는 새이다.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에는 ‘난새가 절로 노래 부르고 봉새가 절로 춤춘다. 〔鸞鳥自歌 鳳鳥自儛〕’고 하였고, 「서산경(西山經)」에는 ‘이곳의 어떤 새는 생김새가 꿩 같은데 오색의 무늬가 있다. 이름을 난조(鸞鳥)라고 하며 이것이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有鳥焉 其狀如翟而五采文 名曰鸞鳥 見則天下安寧〕’고 하였으며, 「대황서경(大荒西經)」에는 ‘오색 빛깔의 새는 세 가지 이름이 있다. 하나는 황조(皇鳥), 하나는 난새, 하나는 봉새라고 한다. 〔有五采鳥三名 一曰皇鳥 一曰鸞鳥 一曰鳳鳥〕’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청조(靑鳥)는 병졸(兵卒)을, 채란(彩鸞)은 기생(妓生)을 의미한다.

최부는 제주도 조천포구에 신임 목사 허희와 함께 도착했는데 조천포구에서 제주 관아까지 이동하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조선 시대에 새로 부임하는 관리의 행차를 그린 행렬도인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이다.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에는 1785년 악산헌(樂山軒)의 아버지가 안릉(安陵)의 목민관(牧民官)으로 부임했을 때, 그 행렬의 성대함을 보고 약산헌이 화원 김홍도에게 그리게 했다는 글이 적혀 있다. 각종 깃발을 든 기수 마흔 여덟 명과 군뢰(軍牢), 중군(中軍) 등 병졸, 악대, 병방(兵房)과 집사(執事), 아전과 노비, 악사와 기생, 가마를 앞세운 아녀자들의 행렬이 앞서 나가고, 이어 열여덟 명의 수종원이 받드는 쌍가마[雙轎]가 등장하여 행렬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 뒤에는 수행하는 인원과 군뢰가 따르고 좌거(坐車) 뒤에는 책실(冊室), 책객(冊客), 중방(中房), 기생, 그리고 좌수(坐首)와 예감(禮監) 일행이 이어진다.

최부와 허희는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에 나오는 행렬과 비슷하게 이동했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먼저 푸른 색 관복을 입은 병졸(兵卒)들이 앞장을 서거나 주위에서 호위하고 화려하게 치장을 한 기생(妓生)들이 뒤를 따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푸는 수작·진연·진작·진찬 등의 연회에 관한 전말을 기록한 『진연의궤(進宴儀軌)』(1744)에는 정재(呈才, 대궐(大闕)에서 잔치 때 하던 춤과 노래의 연예(演藝))의 종목과 참가할 기생의 명단이 나오는데 성천 기생 채란(彩鸞)과 안주 기생 채란(菜鸞)이 기록되어 있다. 

 

   

가옹(呵擁)

가옹(呵擁)은 존귀한 사람의 행차 앞에서 종자(從者)가 큰 소리를 질러 행인을 금하며 옹위(擁衛)함을 말한다.

      

괄이어음역후지(聒耳語音譯後知)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도의 말〔語〕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투리가 난삽하다. 촌 백성의 말이 난삽하여 먼저는 높고 뒤는 낮다. 〔俚語艱澁 村民俚語艱澁 先高後低〕

최부도 제주도의 말〔語〕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 통역을 해야 했다. 그런 제주도의 말〔語〕을 사투리로 봐야할 지에 대해 고종석은 『고종석의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만약에 여러분들 누군가가, 강남구 분이라도 좋고 전라도 분이라도 좋고 충청도 분이라도 좋고 경기도 분이라도 좋고 어려서부터 배운 말을 사용하고, 제주도에서 자란 어떤 분이 어려서 배운 말, 그러니까 텔레비전이나 학교를 통해서 배운 말 말고 어려서 배운 말, 어머니한테서 배운 말 가지고 서로 얘기를 한다고 칩시다. 의사소통이 될까요? 불가능합니다. 제주도 사람 말과 육지에 사는 사람 말은 사실은 다른 언어입니다. 언어학적 기준으로는요. 물론 서로 굉장히 가까운 언어이긴 합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선 언어학적으로 두 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어와 제주어, 이 두 개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주라는 곳은 아주 예전부터 한반도에 부속돼 있었고 한반도와 한 나라, 한 정치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는 국민국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주어는 한국어의 방언이 아니라 한국어와 다른 언어다, 누가 이런 주장을 했다고 해보세요. 제주 사람들에게나 육지 사람들에게나 이건 절대 좋은 뉴스가 아닙니다. 정치인들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제주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날지도 모르죠. 그런 염려 때문에 제주어는 한국어의 방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육지 사람과 '다른 언어'를 쓰는데도 우리는 그냥 '제주 방언'이란 표현을 씁니다. 제주 방언이란 말은 사실은 정치적으로 오염된 표현입니다. 아시겠죠? 그러니까 실제로 제주어는 한국어와 다른 언어인데, 만약에 제주도에서 쓰는 말을 곧이곧대로 다른 언어라고 하면 국민통합에 치명적 지장이 생깁니다. 골치 아픈 문제죠. 그래서 정치적 고려로 제주어는 한국어의 한 방언이다, 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물론 제주어가 한국어와 다른 언어이긴 하지만, 모든 자연언어 가운데 한국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인 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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