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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Oct 17. 2021

시망스럽다

도서관 데스크에서 책을 기다리는데 엄마, 아들, 딸이 두 바퀴 손수레에 책을 싣고 지나간다. 딸은 유치원생처럼 보이고 아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같다. 엄마는 딸의 손을 잡고 아들이 손수레를 끌고 문밖으로 나간다. 장애인용 경사로부터 내달리던 아들이 갑자기 손잡이를 놓아버린다. 손수레는 뒤뚱거리다 넘어지고 책이 바구니에서 우르르 쏟아져 보도블록 위로 널브러진다. 엄마는 딸의 손을 놓고 쓰러진 손수레를 세우고 책들을 털어 다시 바구니에 책을 차곡차곡 담는다. 아들은 엄마 주위를 펄쩍거린다. 

   

그 모습을 망연히 보고 있는데 문득 떠오른 말이 ‘시망스럽다’이다. 시망스럽다는 ‘몹시 짓궂은 데가 있다’는 뜻을 지닌 우리말이다. 그 말이 나도 모르게 생각이 난 이유가 뭘까? 내가 어려서 할머니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리라. 할머니는 어릴 적의 나를 보고 “그놈 시망스럽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내가 동네방네 뛰어놀던 개구쟁이였기도 했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부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할머니는 비록 같은 울타리였지만 별채에서 거처했다. 별채에는 다락방이 있었는데 그곳에 할머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넣어 두었다. 계에서 여행 가서 사 온 슬라이드 만화경과 사진첩. 잔치 때 쓰고 남은 강정, 유과. 복약하고 후 쓴맛을 다스리기 위해 잡수던 사탕. 친척으로 선물 받은 꿀단지. 또 뭐가 있었더라? 그 다락은 나에게 별천지였다. 워낙 빈번히 드나들며 어지럽히고 먹거리가 눈에 띄게 줄자 할머니는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일이 태반이었다.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엄마에게 혼나도 그때뿐이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다락에서 이것저것 뒤졌다.


할머니는 급기야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할머니는 다락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며칠 동안 할머니에게 조르고 떼썼지만, 다락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거기에서 포기했다면 할머니는 나에게 시망스럽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 하지 않았으련만. 나는 할머니가 다락 옆 이불장에 열쇠를 보관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할머니가 외출하는 틈을 타서 다락에 숨어드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밖에서 신나게 놀고 들어왔는데 할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할머니는 내 손을 끌고 다락문 앞으로 갔다. 아버지는 연신 “그놈 참. 그놈 참.” 내뱉으시면서 뒤따랐다. 다락문 앞에 서니 자물쇠 걸이가 뜯겨 있었다. 할머니는 “이놈아 시망스러워도 정도가 있지. 이게 뭐냐, 이게 뭐야! 똑바로 말해라. 네 짓이지?” 나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동안 지은 죄가 있어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저지른 범행으로 이미 결론 내린 상황이라 무슨 말을 해도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사건으로 나에겐 ‘시망스럽다’는 낙인이 찍혔고 할머니는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 글을 빌려 하늘에 계신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그 사건이 내가 저지른 잘못이 아님을 고한다. 내가 아무리 시망스러웠을지라도 자물쇠 걸이를 뜯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심증이 가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영원히 침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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