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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Oct 23. 2021

오늘 남편이 떠났다.

오늘 남편이 떠났다. 천안으로.

두 달 전 남편은 직장을 잃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퇴근해서 인사부에서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나 아이보다 회사를 먼저 생각하는 남편이 해고를 당하다니. 자초지종을 묻는 물음에 남편은 고개를 떨군 채 한숨만 내뱉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하자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남편과 지내는 하루하루가 답답하기만 했다. 본인의 심정이야 오죽하랴마는 내 가슴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뭐라고 할라치면 남편은 슬며시 자리를 피했다. 그런 뒷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꼴 보기 싫었다.


한 달 반쯤 지나 남편은 천안에 있는 중소기업에서 면접을 보고 합격했다. 2주 후로 출근 날짜가 잡혔다. 당장 생계가 남편의 벌이에 달린 상황이라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회사에서 사택으로 15평 아파트 한 호를 제공한다고 하니 남편의 거처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았다.

 

출근하기 바로 전날인 일요일 오전에 남편이 사택에서 지낼 살림살이를 챙겼다. 남편은 차려준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든든히 천천히 먹으라고 했더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자동차에 살림살이를 옮겨 싣고 남편은 그렇게 천안 외곽에 있다는 사택으로 떠났다.

    

    남편이 보낸 사진에 사택 앞은 휑한 들판이었다. 천안 시내까지 가려면 차로 삼십 분 정도 가야 한다고 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런 촌구석에서 어떻게 지낼까 싶었지만, 남편은 시골 출신이라 적응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다행이다.     

남편은 회사까지 차로 출퇴근했다. 출퇴근 시간은 보통 십여 분이지만 신호에 차가 밀리면 그 이상 걸린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 주 후에는 차를 세워놓고 걸어서 출퇴근한다고 했다. 편도로 삼사십 분 정도 걸리는 시골길을 알게 되었는데 다닐만하다나.


걸어서 회사에 출퇴근하면서 남편은 곧잘 전화를 걸어왔다. 혼자 지낸다고 신세 한탄을 하는가 하면 전 직장에 대해 분노의 말을 내뱉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들어줬는데 계속해서 들으니 짜증이 났다. 자꾸 그런 말을 하려면 전화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삐졌는지 한동안 남편의 전화가 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남편이 나팔꽃 사진을 보내왔다. 바로 이어 전화가 왔다. 남편의 목소리가 약간 설렌 듯이 들렸다. 꽃을 보고 상황을 묘사하는 남편의 설명이 걸작이었다.     

 

길가에 발그레하게 피어 있는 나팔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겠어. 나뭇가지를 감고 올라간 덩굴의 끝자락에 꽃송이가 다소곳하더라고. 마치 당신처럼. 나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지. 순간 환하게 빛을 발하는 수술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고 말았다니까. 그러고 나서 주위를 돌아보니 길가 여기저기에 꽃들이 지천이지 뭐야.

    

그날 밤 남편은 통화에서 꽃을 본 이후의 심경 변화를 이야기했다. 마음에 항상 응어리가 느껴져 괴로웠는데 아침에 꽃을 보고 나서 조금은 편안해 졌다고 했다. 며칠이나 다니던 길이었는데 이제야 나팔꽃이며 코스모스며 민들레 꽃씨가 눈에 들어온다나. 당신 마음에 걱정이 줄어드니 나도 기쁘다고 했다.


다음 날부터 남편은 출퇴근 시간에 시도 때도 없이 꽃, 작물, 잡초 사진을 보내왔다. 처음 몇 번은 볼만했는데 계속 날아오는 사진에 무감각해졌다. 심하다 싶으면 역정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은 혼자 신나서 어떠냐며 나의 반응을 궁금해했다. 어쨌거나 남편이 밝아지는 모습이 나쁘지만은 않아 좋다고 맞장구쳐 주었다. 

    

날이 서늘해지자 남편은 반팔 셔츠를 벗어놓고 긴팔 셔츠를 갈아입었고 서리가 내리자 두툼한 점퍼로 무장하고 천안을 오갔다. 한 번씩 내려올 때마다 남편의 인상이 편안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스테레오에서 여가수의 노래가 나와 누구냐고 했더니 박강수라고 했다. 웬일로 당신이 노래를 다 듣느냐고 했더니 박강수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했다. 음치 남편이 흥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긴 했지만, 눈감아 주었다.

     

크리스마스에 내려온 남편은 내년에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으로 출근하게 되었다고 했다. 남편은 천안의 사택을 떠나는 게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나는 남편을 다독였다. 천안에서 당신이 밝아져서 좋았지만 다른 곳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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