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리뷰 1/9
“사회라는 것은 없다. 개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계급따윈 없다. 유능한 자와 부지런한 자, 그리고 그렇지 못한 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상품이라는 것은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이란 말인가? 돈으로 무엇이든—신뢰할 수 있는 사람—살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큰 넌센스인가 말이다. 만약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면, 그는 계급도 없이, 돈도 없이, 스마트폰도 없이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가 밥만 축내다 죽고 말리라. 하지만, 그는 기어올라온다—이러한 넌센스 한 복판에서—계급으로, 돈으로, 스마트폰을 가지고 동굴 밖으로. 인간은 그저 그러한 사회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것이다. 이 동물은 가난한 친구에게, 그의 가족에게 부탁겸하여 손에 선물을 안고 굴에 들어오는데, 이 선물이 돌이다. 존재와 동물의 차이는 이것에 있지 않을런지. 선물로 돌을 주는 이러한 사려-깊지-못함 . 우리는 이렇듯 사려 깊지 못해 그만 사회라는 덤탱이를 쓰고만 동물. “차라리 먹을 걸 사오지”라는 존재의 음성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사회 속으로 파묻히는 동물.
자연에 있는 돌은, 자연에-있는-돌이다. 자연과 돌은 분리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돌은 곧 자연이 된다. 이것을 깨트려, 무기로 만든다. 연장으로 쓴다. 곧, 도구로 활용함은 하나의 큰 도약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그 자연과 돌의 분리불가능에 깃든 신성성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리될 수 없음, 깨트릴 수 없음, 곧 지배할 수 없음을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그저 돌 하나를 깨트리는 행위는 어머니-자연의 얼굴에 내는 깊은 상흔이 된다. 그의 명예에 가하는 어떤 낙인이 되고, 그렇게 사건은 상징이 되고, 의미를 매개하여 반복될 수 없는 것을 반복시킨다. 우리는 돌로 시작해 돌로 끝을 보는 것일지 모른다. 수석이 그러한 끝에 놓여져 있다. 수석은 보석이 아니다. 수석에게 부여한 가치, 사회적 가치?, 희귀하다는 것은 상품이 되기에 충분한 바, 돌은 상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은 없다. 관상용-자연물의 존재는 자연마저 분업화 하는 거대한 모멘텀을 드러내는데, 돌 하나에서 자연 전체를 발견하고자 하는 프로세스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자연의 포드주의에서 우리는 자본가의 보편적 심성인 관리하는 자의 태도를 곧 돌을 관상하는 우리에게 대입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착취해 가고야 마는 수완좋은 자본가의 마음이기도 한 지배자의 마음은 이렇듯 자연지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수석은 그냥 돌이 아니라, 사회-속에-돌이라 할 수 있다. 수석과 사회는 분리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수석은 곧 사회인 것이다.
이 수석이 말을 건다. 자신을 더욱 더 깊이 안으라고. 나를 이 물바다에서 건져내달라고. 이 동굴 속에서 나를 꺼내, ‘그 집’에—즉 사회 속에—나를 데려가 달라고. 이는 사회와 인간의 관계, 즉 사회에 의한 인간지배를 보여주는 알레고리로 볼 수 있다. 베버는 합리화 과정—앞서 말한 것에 대입하였을 때엔 돌이 상품이 되는 과정—을 탈주술화과정이라고 말하였다. 원시제전사회에서 돌을 숭배하던 인간이 계몽에 의하여 그 미신을 떨쳐내는 것이 바로 합리화의 위력인 것이고, 또한 세계지배를 가능케한 원동력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 탈-주술화과정이 다시 주술로서 우리를 지배해 왔음을 역설한다. 즉, 우리가 자기보존을 위해 만든 사회가 다시 우리를 관리하려 드는 것, 개개의 합리화 된 것이 비합리적인 총체가 되어 위력을 발하는 것, 결국 사회의 절대적 우위가 특수하고 개별적인 인간의 폐기를 명하는 사회를 말이다. 이 탈주술화의 주술화 과정이 영화에서 보이고 있는데, 돌을 받고, 안아 들고,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데려가는 것이다, 집으로, 지하실로. 이렇듯 '우연으로’ 돌을 지하 계단에서 놓치고만—혹은 돌이 ‘의도적으로’ 굴러 내려간—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올가미였기 때문이다. 가난이, 그저 그러한 가난이 아닌, ‘그 집’의 지하실에 기생하는 ‘사회적 가난’이 늘어뜨린 올가미에 말이다. 그는 그가 들고온 돌에 되맞게 된다. 돌을 통해 자신의 몸을 지키며 또 동시에 사회 밑바닥으로 가난을 죽이러 갔던 그는 도리어 그 돌에 의해 심판 받는다. 그가 심판받기전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내가 ‘이집’에 어울리냐”는 하나의 사실을 도리어 강조하는데, 그가 그 집에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가 돌에 되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 그가 단순히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그래, 이제 희망을 가진 가난한 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난으로부터의 구원의 열망을 지닌 일종의 세속화된 종교인으로서, 자본주의의 신자가 된 그의 순진하고 심플한 의도와 순진한 가난함으로 그는 재탄생한 것이다. 언젠가 그 집을 사게 될 부자가 될 날을 기다리면서. 이와 반대로 그의 동생은 ‘이집’에서 가난을 씻어내버리고자 했다. 부모에게 더이상 남의 걱정일랑 그만두고 나에게 신경써달라고 했다. ‘이 집’에서—적어도 사장의 아들 위에서—군림하고자 했다. 그러한 이유로 진정한 심판은 동생에게 내려지게 된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한 죄로. 기생충 주제에 숙주를 지배하려고 한 죄로, 그 의도의 심플함에서 드러난 부유한 자의 태도를 감히 지니려 한 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