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리뷰 2/9
집주인은 순진해 보인다. “그 여자는 너무 순진해. 애들도 구김이 없어. 분명 돈 때문 일 꺼야.”라는 말에서, 명백하게 또 단순하게 순진해지지는 못 한채 그 말에 동조하게 되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맞아, 우리는 순진하지 못해—때론 악랄해지지 못해—자신을 나무라기에, 여기에 담긴 도덕, 돈의 도덕에 의문을 가지게 되기에 이른다. 목표로 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 한 A에게, 아직 아무것도 아닌 A에게, 친구는 과외자리를 부탁하려고 찾아왔다. ‘내가 유학 가 있는 동안 온갖 늑대들로부터 우리 B를 지켜줄 사람은 A 너 밖에 없다’고 말이다. 걱정에 앞선 A는 괜찮을까 거듭 묻지만, 친구는 괜찮다고, 사모님은 심플하다고 말하는데, 그 심플함의 원천이 나는 궁금한 것이다. 이러한 궁금증에는 다음과 같은 모순에서 일깨워진, 순진하지 못한 의도가 잠들어 있다. 어떻게 심플할 수 있을까 하는 나의 이 돈 안 되는 걱정, 어떻게 이러한 세상에서 구김이 없을-수-있을까 하는 나의 이 건강을 해치는 질투, 등 이 말이다. 그들의 심플함에는 돈이라는 수단이 목적에 합치되는 것 이상으로, 그 수단이 삶의 원리를 구성하게 될 때 저절로 체득되는, 이름하여 몸소 깨우쳐지는 어떤 원리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즉, 존재 지평에서 돈과 권력은 성을 짓는 것으로 그 단계 하나를 갈무리하며, 그때 성은 돈으로 쌓은 하나의 완성품, 그로 인해 이제 모든 것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믿는 단단한 마음, 결국 이것은 물질성에 근거한 것인데, 바로 명예란 것이다. 심플함은 이렇듯 수성하는 입장에서 내려-다-보이는 조무래기들에게서 떠오르는 승리의 확신이자 자연스러움이며, 심플할 수 있다는 것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닌 군주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그래, 여유로움.
명예는 어떠한 것인가? 한번 더 순진한 태도는 말한다. 세상에는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라는 희귀한 가치가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다고 말이다. 이 말에는 우리가 그렇게 알아줬으면 하며, 어떤 간절한 마음이 건너편 창문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는 삼권분립을 말하는 한국의 검사가, 자신에게 향한 기소를 검토할 때 주변을 살피게 되는 그러한 태도와 닮아있다. 돈과 권력은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이다. 이권과 삼권은 일권에게 대들지 않는데, 이것이 삼권분립의 전제인 것이다. 따라서, 명예라는 것을 우리 악랄한 마음으로 손가락질해보자. 명예로운 자, 그 명예의 실추로 이어지는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우리는 우리가 지닌 선입관부터 그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삼아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이 선입관이야말로 일종의 명예라면 우리의 명예일 것이기 때문이다. 선입관은 이렇게 작동한다. 명예는 고귀한 것이자, 고고한 것—바로 이러한 점에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면 명예 그것 스스로 깃든 이에게 물러날 것이라고 믿음—이 악랄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곧 스스로를 고귀하고 고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상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이를 보여주는 것은—이와 반대로 달라진 것이 분명 있다고 말할 때 그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이 조금씩 진보해나간다는 믿음일 것이다—달라진 바 없는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의 불균등한 분배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손가락질은 곳곳에서 발견되는 데, 때론 속 시원한 고함에서 때론 일침을 놓는 우월함에서, 그렇게 점점 더 명예는 돈과 권력과 함께 견고해지고 또 동시에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 기자들이 곧잘 소비해버리는 우리의 조급함.
명예는, 그래서, 상처입지 않으려 할 뿐이다. 그러함에도 상처 입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명예는 방패와 같아 몸을 보호하면 그만인 것이지 방패 자체는 원래 상처 입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내가 말하는 것은 몸에 난 흠집이자 훼손이지, 빌어먹을 명예 훼손 따위가 아니다. 명예는 결국 물질에 깃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장님과 사모님은 이를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연세대 졸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성적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카섹스가 아니라, 남겨진 팬티와 묻어 있을지 모르는 정액, 또 그 정액이 위치할 뒷자리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복숭아 알레르기나 결핵균의 가능성이 아니라, 남아 있을 타액과 휴지뭉치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듯 심플함이라는 하나의 원리에 의해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삶에는 복잡다단이라는, 가난 따위에나 깃든 삶의 다양성이 발 디딜 틈이 없다. 명예란 성에 의해 철저히 보호받기 때문이다. 이 보호받는 모습은, 넘실대는 냄새에도 아직 코를 손으로 막아야 할 절박성을 느끼지 않아도 될 때 드러난다. 아직 참을만하다는 듯, 그 선을 넘지 않는 모습으로, 즉 자신감으로 나타난다. 차 창문을 열고 마는 것이지 아직 코를 막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누군가는 몸을 씻고 누군가는 코를 막는다. 감추어보려 애를 쓴다, 그 자신의 조급함을.
그 두 사람은 박사장과 여동생이다. 이 두 사람은 방심했기에 가난에 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명은 각각 틈을 보이고 말았다. 여동생은 저택에서 몸을 씻고, 부의 세례를 입고, 향기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 냄새는 안 없어져, 그건 반지하 냄새야” 이 냄새를 꿰뚫고 아버지에게 악을 지른다. “남의 집 신경은 이제 그만 쓰고 나를 바라봐 달라”라고, 위치를 잊고 그만 방심해버리고 만 것이다. 지하에서 올라온, 가둬놓았다고 생각한 저택의 기생충, 사회의 기생충, 가난이 올라와 그의 심장에 식칼을 박아 넣는다. 이 가난은 아주 간단하게 제압되는데—무방비상태에서 기습해 들어온 것과는 별개로, 또 그 끔찍한 몰골과는 별개로 그는 아마 잘못 먹어 힘없이—‘음식을 가득 꽂은 꼬치’에 의해 꿰여 죽는다. 이와 동시에 박사장은 그저 가난을 본 것만으로 충격을 받아 쓰러진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 가난에 손을 대야만 했는데 그만 코를 막고 말았다. 선을 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그 스스로 그 선을 지키지 못하고 코를 막고, 가난에 손을 대고만 것이다. 이 빈틈으로, 이 여유 없음으로, 냄새가 역류해 들어온다. 그를 찔러 죽이고, 새로운 가난이 다시 저택의 지하, 사회의 바닥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이제 지상의 도움을 받아 그저 밥을 축내고, 옳지 못한 대상—그가 그만 놀라게 해버린 사장 아들에게 무의미한 희망으로—에게 모스부호를 날리며, 자족적으로 기생하는 가난은 죽고, 매번 위험을 감수하여 밥을 훔쳐 먹고, 정확한 대상—아들에게—에게 모스부호를 날리는, 어쩔 수 없이 기생하는 가난이 태어나고 말았다.
영화에서, 가난한 삶의 다양성은 안 좋은 냄새라는 하나의 냄새로 규정된다. 하지만, 이 복잡한 냄새를 꿰뚫어 얘기한 두 명이 가난에 의해 심판받는데—그것도 동시간적으로 말이다—이 장면에서 나타난 가난은 그 원천—소멸하고 다시 생성함으로써 재생산되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박사장의 예에선, 도무지 정의 내릴 수 없는 냄새는 많은 묘사물들을 요구하는데, 너절한 행주와 습기 찬 바닥, 땀에 쪄든 옷가지, 만원 지하철의 살 냄새 등, 즉 복잡한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얘기되는 것이다. 여동생의 예에선, 이와 반대로, 냄새는 근원적으로 반지하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냄새는 집만 옮긴다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반된 시선은 사회에 관한 베버와 뒤르켐의 학설을 떠올리게 한다. 가난은 사회적 사실로써 존재할 뿐이며 이를 둘러싼 전체 사회는 꿰뚫어질 수 없다는 것, 즉 사회는 이해될 수가 없다는 뒤르켐과 동시에, 가난의 자리가 지하에 놓여있다는 점, 그 자리를 두고 사람만 바뀐다는 점, 전체 구조로 집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사회와 그 속의 가난을 표상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베버를 말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영화에선 모두 부정되고 있다는 지점에 있다. 첫 째, 가난이 구조 지어지는, 다시 말해, 가난이 세대를 바꾸어 그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모양을 바꾸며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리앉고 있는 모습을 살인사건이라는 ‘사실’을 뒤로 한채 그 근본원인은 감추어져 있음으로 나타낸다. 카스테라사장이 여동생을 왜 죽였는지와 아버지가 박사장을 왜 죽였는지(죽여야만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난이 이렇게 신비화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을 영화는 명확히 하고 있다. 즉, 이들이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하나의 극단으로써 제시되고, 이 극단성은 이것을 이룬 개연적인 것들 전체를 하나의 꼭짓점으로 포괄하고 있다. 즉, 대만카스테라(사업)가 망하고, 아프고 또 병나고, 지하실(쪽방)에 들어와 몇 년 씩이나 힘들게 산다는, 각기 개별적인 사건의 뭉퉁한 개연성은 합을 이루는데. 곧 이 합은 이들 사건 사이의 곱으로, 다시 말해, 첨예한 이 인물들의 극단적 비극으로 나아가며 특유의 곡률—아마도 솟구치는 모양으로 날 선 각도를 그리며—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것은 칼의 모양이 될 것이기에, 따라서, 그렇게 등장한 칼은 필연적으로 누구를 찌르게 되는 것이다. 즉, 가장 솟구쳐 튀어 오른 자를 겨냥하여. 그래서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A가 죽어갈 때, 이윽고 죽고 말았을 때, 그를 죽인 B의 심정을. 따라서, 이 영화 속 언론이(감독이 묻고 있다) 이 사건을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정의 내릴 때, (우리는 언짢게 답한다) '그거 아닌데.......'라고 우린 자신도 모르게 살인범의 변호를 자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