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성의 정치 성의 권리> 리뷰
이러한 역사가 있다. 무언가를 괴물로 만드는 역사와 다양성을 박해하는 체계로써의 역사. 모두 인간의 역사이다. 전자는 후자의 그 ‘체계’를 세우는 데 필수적인 공통의 적을 제공한다. 공통의 적은 괴물로 통칭되는 이름 없는 말뚝들로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경계선을 형성한다. 반면에 후자는 언제나 그 ‘전체’라 인식되어져야만 하는 (일부의) 것들을 감싸는, 말 그대로, 더 큰 범주의 이 전체를―이 경계 바깥의 것들을―우리의 인식의 범위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작동하고 있다. 다양성은 이 체계에 용인될 수 없다. 이 체계가 두 가지 이성 위에 뿌리내려져 있고, 이 기저 토대가 되는 두 이성은 서로 완벽한 한쌍이 되어 ‘나머지 모든 것들’을 간단히 나머지로써 처리(박멸)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성異性은 생식기의 차이로 ‘다름’을 포착한다. 이 다르다고 하는 것 자체가 오묘한 성질의 것인데, 오직 공통적인 것―즉 동질성을 바탕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는, 앞서 말한 체계와 억압의 역사와 같이, 서로를 서로의 존재근거로 삼아 이 고리를 더욱 단단히 만드는 것이다. “정말 ‘다르다’면 굳이 차이를 강조할 필요가 없으며, 정말 ‘같다’면 굳이 이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른 말로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성의 정치 성의 권리(http://aladin.kr/p/qU3E), 권김현영 외 4명, pp.71] 다양한 억압의 사례를 살펴볼 때, 우리는 만들어진 차이, 만들어진 차별, 즉 만들어진 억압을 볼 수 있다. 억압은 지배의 발명품인 것이다. 동시에 이성理性은 마치 이 모든 구분을 위해 태어났다는 듯이 본연의 역할을 맡는다. 우리가 흔히 권력의 도구라 부르는 갖가지 형태의 학문들―법학, 범죄학, 의학, 심리학―은 이 이성의 극한을 발휘해야만 하는, 그래야만 도달할 수 있는 전문성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성은 구분하고, 구분된 것은 차별을 위한 전초기지로 사용된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성의 사용이 점점 더 세련되어져만 간다는 것이다. 이성의 세련된 사용은 차이를 개성으로써 장려한다. 하지만 여기서 개성이란, 그 다양한 개성의 발현이란 방식에도 불구하고, 허락된 다양성으로 그 가치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괴물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무언가를 우상으로 만드는 사회에서 기존 체계의 연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차이와 그것을 근거로 한 차별은 지금의 눈에 띄는 매력과 그것을 근거로 한 숭배와 일맥상통한다. 전자의 그것은 억압과 그의 반작용으써 위반을 가시화한다면, 후자는 억압하지 않고 장려한다. 장려함으로써 우리가 규범(정상성)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과 그 순간순간을 자책하게 한다. 무엇이 더 세련된가? 기존의 규범적 여성성과 남성성에 비교해 봤을 때, 지금의 규범성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경계는 비가시적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혼란을 야기하지만, 이 혼란 또한 만들어진 억압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