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의 <만세전>을 읽고
교육이라는 것은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요 기계를 제조하는 것이 아니니까, 학문을 당장에 월급 푼에 써먹자고 하는 것도 아니요, ‘똥테’(나는 어느 때든지 금테를 똥테라고 불렀다) 바람에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도 하여 드리고, 개성은 소중한 것이니까 제각기 개성에 따라서 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문제를 들추어가지고 늘 변명을 하여 왔다. 그러나 결국은 단념하는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세계와 자기의 세계에는 통로가 전연히 두절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마치 무덤 속과 무덤 밖이 판연히 다른 딴 세상임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e-book 124/231]
금을 똥으로 바꿔 부르는 한 인간의 세계이해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금과 똥을 어지러히 섞어버림으로 무엇이든 애써 구분하려 않고자 하는, 그렇게 명백한 차이에 눈을 감아버리는 계획된 어리석음일까? 혹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금언처럼, 두 대상은 이미 확고하게 정해진 가치를 갖고 있기에 잠깐 동안이나마 그 틀에서 벗어나 세상을 보아도 두 대상의 위계는 여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위선일까? 모두 아니다. 나는 잘못 불려지고 있는 것에 제대로 이름을 붙여 진실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한 사람의 노력이 보인다. 주인공은 ‘아니하여도 좋을 말을 오금을 박듯이 입바른 소리를 하고’야 마는 사람인 것이다. 이 덕분에 우리는 이인화가 일본인에게 던진 질문처럼 ‘바로미터’로써 그의 정당한 의문을, 그의 구차함에 대한 모멸감을, 그의 게으름을, 어디한 곳 뿌릴 데 없는 분노를, 그 모두를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단지 똥을 금으로 부르게 된 것과 똥이 금이 되어버린 것―두 개념이 융합되어 더 이상 구분이 어려워진 것―그 사이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이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만큼에 비례하여 일본제국 식민지로서 조선이 굴러 떨어져야 할 구렁텅이의 폭과 깊이가 결정되는 것이다. <만세전>을 통해 그리고 이인화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만세’ 전 조선인들은 영겁의 세월을 느끼며 기약 없는 추락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시든 배춧잎 같고 주눅이 들어서 멀거니 앉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빌붙는 듯한 천한 웃음이나 ‘헤에’ 하고 싱겁게 웃는 그 표정을 보면 가없기도 하고, 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소리라도 버럭 질렀으면 시원할 것 같다. ‘이게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혼자 속으로 외쳤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174/231]
무덤은 이미 저질러진 일들의 공간이다. 이미 끝난 것들의 공간인 것이다. 무덤은 식민지 조선의 상황 자체이다. 이미 끝나 버린 인간들의 나라, 망국인 것이다. 인간이 과연 끝날 수 있는가에 대한 그리고 어떻게 끝나는 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인간은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다. ‘태어나-죽는 것’은 누구나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태어나 죽는 것과 사뭇 다르다. 그 방식을 저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써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인간은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 가능성을 안아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은 ‘조선인’으로 태어나. ‘조선인’으로 살다-죽는다. 이 ‘살다-죽는’ 것이 문제이다. 조선인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거짓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조선인으로 태어나 조선인으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게 그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에게서 가능성을 빼앗아간 공간, 인간이 가능성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공간이 바로 무덤이다. 공동체로써는 공동묘지가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보기에 이미 주어진 관습, 인습, 문화 등에서 비롯된 그 모든 것들―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 내키지 않는 것을 하는 것, 구차하게 사는 것, 즉 거짓으로써 사는 것 등―은 실상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조차 없는데, 이는 또 다른 중요한 문제를 대두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것은 바로 교육의 문제이다. 교육은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 매개의 수단이다. 교육이 지향하는 목적이 애초에 없는 곳에서, 교육은 그 자체로 개인의 미래를 결정하는 유일한 가능성이 되어버리기에, 지식인인 주인공이 조선인들을 비하하는 것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것만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도 그중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 사람은 외국인에게 대해서 아무것도 보여 준 것은 없으나, 다만 날만 새면 자리 속에서부터 담배를 피워문다는 것, 아침부터 술집이 번창한다는 것, 부모를 쳐들어서 내가 네 애비니, 네가 내 손자니 하며 농지거리로 세월을 보낸다는 것, 겨우 입을 떼어 놓는 어린애가 엇먹는 말부터 배운다는 것, 주먹 없는 입씨름에 밤을 새고 이튿날에는 대낮에야 일어난다는 것……그 대신에 과학 지식이라고는 소딩뚜껑이 무거워야 밥이 잘 무른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것을 외국 사람들에게 실물로 교육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기 때문에 그들이 조선에 오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를 경멸할 수 있는 사실을 골고루 보고 많이 안다는 의미밖에 아니 되는 것이다. [111/231]
조선 사람 어머니에 길리어 자라면서도 조선말보다는 일본말을 하고, 조선옷보다는 일본 옷을 입고, 딸자식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조선 사람인 어머니보다는 일본 사람인 아버지를 찾아가야겠다는 것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정리를 지나서 어떠한 이해관계나 일종의 趨勢라는 타산이 앞을 서기 때문에 이별한 지가 벌써 칠팔 년이나 된다는 아비를 정처도 없이 찾아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제, 이 계집애의 팔자가 가엾은 것보다도 그 어미가 한층 더 가엾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114/231]
조선인들이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주인공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동경에서 출발하여 다시 동경으로 가는 그 여정은 그야말로 바닥 없는 구렁텅이, 나락이다.
……소학교 선생님이 사벨(환도)을 차고 교단에 오르는 나라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는 그런 나라 백성 이외다. 고민하고 오뇌하는 사람을 존경하시고 들어 주신다는 그 말씀을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내성(內省)하는 고민이요 오뇌가 아니라, 발길과 채찍 밑에 부대끼면서도 숨이 죽어 엎디어 있는 거세(去勢)된 존재에게도 존경과 동정을 느끼시나요? <중략>우리 문학의 도(徒)는 자유롭고 진실된 생활을 찾아가고 이것을 세우는 것이 그 본령인가 합니다. 우리의 교유, 우리의 우정이 이것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입니다. 이 나라 백성의, 그리고 당신의 동포의 진실된 생활을 찾아나가는 자각과 발분을 위하여 싸우는 신념(信念) 없이는 우리의 우정도 헛소리입니다…….’ [228/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