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도시전설
성공신화라는 것이 있다: 어떤 하층 노동자가, 한 분야의 일을 여러 해동안 반복하고, 그렇게 숙달되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그 후 자기만의 노하우로 더 나은 가게 혹은 제품을 만들어낸다. 떡볶이집, 주물공장, 옷가게, 술공장, 고깃집, 빵집 등등이 그래왔다. 대기업이 골목상권을 침해하기 전까지 이러한 성공신화는 실제로 어느정도의 계급사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골목상권이 붕괴된 이후(대자본–유통업이 모든 사업을 장악한 이후), 이 성공신화는 온라인 쇼핑몰의 성공 서사와 동일시 됐다. 굳이 이 성공신화를 추가하자면, 주식과 부동산이 있겠지만, 이는 보통 신화라 부를만치 신화적이지 않다. 지금도 다분히 ‘있음직한’ 일일 뿐이다. 따라서 신화라기 보다는 소설에 가깝다.
도시 전설
온라인 쇼핑몰 신화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성공의 바운더리가 하층민에게 어느 선까지 인식가능한가라는 점이다. 그 성공의 틈은, 대기업의 불꺼지지 않는 감시에도 불구하고, 하층민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충분히 캐치—알아차릴 수 있었던—할 수 있었던 선상에 있었다. 신화를 풀자면 이렇다. 내가 매일 입고 또한 잘 입는 옷, 보이는 옷, 인식가능한 ‘트렌트’가 있다. 이 흐름안에서 수요는 (지극히 개인적, 주관적으로) 예측가능하고, 실험적으로라도 도전해봄직한 ‘느낌’을 준다. 마지막으로, 나는 자신감이 있다 그리고 행한다. 물론, 이곳에서 반복적이고 숙달된 어떤 능력은 도움이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할 수 있는’ 능력이지, 성공의 틈을 발견하는데에 쓰이는 능력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식이 가능하냐라는 점이며, 해봄직한 느낌을 주는 가이다. 이게 된다면, 하층계급은 상층으로 갈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성공신화는 파괴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파괴됨을 넘어 이제 이런 신화는 쓰여지지 않을 것이다. 주장에 앞서, 빌 게이츠의 MS, 주커버그의 FB 등은 이러한 성공신화에 대척점에 있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어떤 식으로든 간에 ‘수혜자’이다. 영웅의 서사시 정도는 쓰여질 수 있겠지만, 신화는 아니다. 그들은 시대에 맞게, 특정한 곳(선진국, 좋은대학), 특정한 기술(CE,IT)을 가장 잘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대치를 가졌을 뿐, ‘신화적인’ 무에서의 유를 창조했음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나는 앞으로 더 이상 이러한 성공신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공의 틈은 이제 하층민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 틈이 있는 공간의 차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정확히 내가 개발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숙취해소음료를 마셔보고 흥미가 생겼고 관련 문서를 찾아봤다. 헛개나무가 숙취에 좋다는 내용이 담긴 중국의 고문서를 봤다“
숙취해소음료 스타트업 82LABS 이시선 대표 인터뷰/ 해장으로 물·이온음료 마시는 미국인 겨냥해 음료로 만들어/
테슬라 출신의 대단한 노동자가 숙취음료 회사를 창업할 때 확실해졌다. 그 이전에는 고려대 경영학과가 해외직구 앱을 만들거나, 대기업 과장 출신이 영어단어장을 만들게 된 순간, 그 언저리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똑똑하고 ‘살만한’ 사람들이 똑똑하고 ‘할만한’ 일들을 찾는다. 먹힐만한 사업을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낸다. 반대로 하층민은 무엇을 새로이 만들어내지 못한다. 반복하고, 숙달한다, 오직 ‘소비’ 그 자체만을. 즉, 하층민은 소비하는 법 외에는 배우지 못한다. 이는 고등교육을 받았다, 안받았다라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다. 아니, 고등교육이란 것이 바로 이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 초중고등학교 10년 여의 시간동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배우는가? 포기하는 법. 무한대로 이어지는 강약약강의 선위에 자신의 위치를 점찍는 것. 나 아닌 다른 이의 문법을 익히기 위한 글자들과 숫자들. 20년 전,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의 숫자와 인터넷 보급률을 대비시켜보자. 그 사람들 중 하층민은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지금 이 스마트폰 시대에서, 앱 만들 수 있는 하층민의 숫자와 스마트폰 보급률은 우리에게 어떤 바를 시사하는가. 하층민은 멀어지고 있다, 어떤 위치에서든, 거대한 돈의 흐름으로부터.
가업으로서 옷가게 자식은 옷집을 하고, 라면가게 자식은 라면집을 하면 일단 헛꿈꾸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옷가게 자식과 라면가게 자식은—즉, 노동자의 자식들은 대학에 가게 됐다. 남들이 다 가니까, 동시에 가게 만드니까, 갔다. 가서 진보의 가치든, 경제의 흐름이든, 뭐든 간에 배우는 댓가로 학자금 빚을 지게 된다. 노동자의 자식은 다시 가게로 가지 않는다. 대학에 간 하층민의 자식은 사회에 나온 순간부터 빚쟁이가 된다. 나는 대학에 오지 않는 편이 현명한 결정이었을지 모른다. 나같은 경우, 옷집아들로서,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버는 것이 내 계층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었을지 모른다. 옷집 아들은 마치 거대한 흐름인 줄 ‘착각하고’ 대학에 가서,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회가 왔다고 ‘착각하며’ 인문학을 배웠다.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모두 미친짓이었다. 누구를 위한 인문학인가. 같은 시기에, 강남 어딘가에선 코딩학원이 성행 중이고, 유학 다녀온 소위 ‘얼리어답터’는 사업아이템을 골몰한다. 나는 플라톤을 읽는다. 하층민은 돈의 흐름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렇게 바보같이 ‘택도없는’ 결정만 한다.
학자금 빚을 지게 된 학생들은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잘 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을 빚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는 시스템 안에선, 그들은 생각을 할 시간조차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승일로의 교육비는 일종의 훈육법인데, 대학생이 졸업할 때 쯤 되면 그들은 단순히 빚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 이 규율적 문화를 내면화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들은 소비사회경제를 이끄는 유능한 일원이 된다. -노암 촘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