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 유승준
어린 시절, 동네 남자 아이들 중에서 꼭 한 명은 유승준 흉내를 내며 어른들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역할을 맡는 친구가 있었다. 어린 남자 아이들의 우상이었던 그는 이제 멀리 떠나갔지만 아직도 되뇌는 가사가 있다. 사람들에게 손에 꼽는 노래를 한 곡 말해보라고 한다면, 가위, 나나나, 열정, 찾길 바래 등을 말하기도 하지만, 비전을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쓰지? 라고 생각하는 곡 중에는 이 노래가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자신이고 싶은 삶이라니. 10-20대 때는 미친 것 같다(N)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지금도 다시 태어난다 해도 자신이고 싶은 삶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10대와 20대를 다시 겪을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 내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10대와 20대로 돌아간다면 아마 지금 나의 모습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비 효과라는 게 있으니 미래는 달라지겠지? 더 훌륭하게 되었을지언정 지금의 마인드셋은 형성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잠깐 글이 다른 길로 가는 듯하다.
다시 돌아와서, 지금은 MBTI 열풍이 한번 휩쓸고 이제는 과거 혈액형 성격 판단처럼 정착하여 자리잡았지만,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유료 MBTI를 꾸준히 받아왔다. 어릴 적부터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해왔기에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고, 선생님은 이렇게 짧은 기간 사이에는 MBTI는 바뀌지 않는다고 몇 번을 설명했지만 매주 찾아오는 나에게 기꺼이 유료 MBTI 검사지를 건내주셨다. 나는 대학생 때까지도 상담 센터를 찾아가 MBTI를 받았고, 이에 더하여 애니어그램 해석 책까지 찾아가며 나를 분석했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공무원 면직까지 나는 ISTJ로 중학교 때부터 변함없는 결과를 건네받았다. 아마 대학생 때까지 변함없었기에, 이것이 나를 고정시켜버리는 바람에 결국에는 '나는 ISTJ 이어야만 해'로 결과에 종속되어 검사지를 작성했을 것이다.
ISTJ라고 하면 굉장히 루틴적인 하루를 보내는 사람으로 인식이 된다. 지금은 몰랐지만 과거에는 그게 꽤 재미 없게 느껴졌다. 메뉴얼을 가지고 있는 사람, 지루한 사람, 그게 나였다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사람 중 대부분이 이 MBTI를 가졌다고 했고, 또 나는 그저 평범한 MBTI라는 것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프리하게 지내는 요즘의 나에게 이 루틴이라는 걸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고, 메뉴얼을 가지고 지키는 사람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ISTJ는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하루의 루틴은 ISTJ처럼 살아내야겠지만, 나만의 목표가 있다면 지금처럼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라는 시스템은 내가 다른 길로 새지 않게 확고히 내 인생의 사이클을 잡아주었다. 긴 연휴를 보내는 동안 잠만 자고 먹기만 엄청 먹어 대서 옷이 조금 낑길 때 쯤엔, 아무래도 회사에 출근하는 게 낫긴하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시스템이 내 인생에 차지한 부분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험해 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있는데 회사의 굴레 속에서 어느 것 하나 시작할 수가 없었다. 대학생, 대학원생 때는 잠을 줄여도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하루 밤을 새면 삼 일은 병이 든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무력감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퇴사를 하겠다는 말을 뱉을 수 있었다. 퇴사하기에는 회사 업무와 복지가 너무 좋았지만, 나이는 들어가고 달력의 숫자만 하나씩 밀려가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 둔 후회보다 못해본 것에 대한 후회가 더 클 것 같았다.
퇴사 직전에 이 노래 가사가 많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남겨진 어제를 이제는 벗어나기 위해 망설이던 퇴사를 한 것이다. 정말 내 삶을 사는 것은 나 밖에 없으니, 내가 하고 싶던 일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해준다면 과연 내가 만족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내가 해보고 성공과 실패를 내가 직접 느껴야 한다. 지금도 내가 생각해온 것들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여러 시도중이지만(원래 확고히 하고 퇴사하랬지만, 나에겐 확고히 생각할만한 시간조차 없었다), 이제야 가닥이 잡히기 시작하기 때문에 곧 이게 실패를 할지 성공을 할지 알 수는 없다. 실패라면 다시 털고 일어나면 되는거고 성공이면 그것대로 좋은 것 아닌가.
다시 태어난다해도 자신이고 싶은지, 결과를 가지고 논하자면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건 내가 인생을 마무리할 즈음에 판단하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가지고 말하자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또 그런 모습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루하루 잘 살아가고 있다. 지금 내 주변의 상황에 감사하며, 그리고 과거의 내 자신들에게도 고생했고 이젠 내가 이어받아 즐겁게 잘 지내보겠다고 내 자신에게 다짐한다.
(이번 앨범 커버 사진은 넣고 싶지 않아서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