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초원은 넓고 사람들의 시선은 좁다
어른들이 언제 정보를 공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 일정에 참석하기 위헤 동생과 숙소동 앞에 도착한 버스로 터덜터덜 걸어왔을 때였다. 한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자매가 참 달라. 언니는 아예 머리를 숏으로 쳤네, 쳤어." 라고 말을 붙이셨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이, "여자가" 로 시작해서 "머리가 짧다"로 끝나는 말이다. 대체 아직도 성별 구분을 머리 길이로 하는 때인가 싶다. 하지만 상대는 나이 드신, 엄마보다도 더 연세가 들어 보이는 분이시라 그냥 웃음 한번 지어주고 버스로 올라탔다.
그 분도 곧바로 버스에 올라타셨고 우리 자리까지 다가오길래, 선글라스를 가림막 삼아 그 분을 노려보며 '왜 다가온담' 하고 경계를 했다. 우리 좌석의 앞자리에 앉는 것을 보니 어제부터 우리 앞에 앉아 계셨던 분이었고,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자매라는 걸 아셨는가 싶었다. 앞좌석을 여전히 노려보며, 저 분은 피해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나 둘씩 어른들이 버스에 탑승하셨고, 지나 가이드님이 마지막에 탑승하시면서, "센베노-" 하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여러분, 센베노 가 무슨 뜻이라고 했죠?"
"우리는 그런 거 몰라. 이젠 하나 외우는 것도 힘들어!"
지나 가이드님은 웃으시며, 그럼 계속 알려드릴게요, 몽골어 안녕하세요. 입니다, 라고 하시면서, 오늘의 첫 일정 장소를 소개해주시면서 차를 출발시키셨다.
"이번 트레킹 장소는 테를지 국립공원 안에 있는 열트산 입니다. 여기는 정말 이상하게도, 한국인들만 와요! 몽골은 다른 아름다운 트레킹 장소도 많지만, 여러 일정을 소화하려면 이 장소로 가는 게 좋아요. 2-3시간이면 끝나거든요. 하지만 경치는 너무 예쁘답니다. 트레킹 하다가 사람을 만나면, 그냥 "안녕하세요" 라고 해도 괜찮아요. 다 한국인일거예요."
오래가지 않아 버스는 곧 멈추었고, 우리도 하차하여 가이드님을 따랐다.
"길을 따라 정상까지 가면, 늑대가 하늘을 바라보며 우는 동상이 있어요. 거기가 끝입니다. 거기서 다시 직진하시면 안돼요. 왔던 길로 다시 내려와서 이 버스에서 만납시다. 11시 30분까지 오시면 됩니다."
가이드님이 추가로 이 늑대 동상과 징기스칸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 해주시고는 우리 일행들은 흩어져 걷기 시작했다.
밤과 새벽은 매우 추웠지만 해가 뜨고 나니 땀이 나기 시작했다. 몽골에 올 때에는 한국의 사계절 옷을 다 챙겨오라는 말이 맞았다. 하지만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기에 나는 맨투맨에 자켓은 벗고 판쵸를 둘러 입고 나왔다. 동생도 얇은 바람막이를 입고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 챙겨 하차했다.
사람들이 많이 빏고 다닌 곳은 닳고 닳아 하얀 모랫길이 나 있었지만, 대체로 바닥은 잔디 아니면 소똥이었다. 어차피 버릴 신발을 신고 왔고 피할 수 없는 지뢰라고 생각하며 트레킹을 시작했다. 우리가 소들의 거주지에 들어왔으니 뭐. 눈 앞에 펼쳐진 평야, 바위산, 하늘을 비행하는 새들, 군데군데 풀을 뜯는 소들. 동서남북 다 들판이었지만, 시야를 조금만 바꿔도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달라서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늘은 매우 맑아 선글라스가 필요했지만, 선글라스를 끼면 초원의 온전한 색을 눈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도로 벗었다. 눈에 담고 담고 계속 담아도 부족했다. 나이가 들면 자연이 그렇게 예뻐보인다던데, 나도 나이가 든 걸까? 생각하며 동생을 보았다. 동생도 경치에 푹 빠져있었다. 몽골의 자연은 어린 애의 마음도 빼앗을 만한 매력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동생도 30대였지 참.
하지만 모르겠다. 지금의 30대는 과거의 20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과거 드라마 김삼순을 노처녀라고 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여전히 애기(는 오바지만)일 뿐이다. 사실 나는 나이에 대해 크게 부담을 갖지 않는다. 정말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약속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정책적으로 유아기/청소년기/청년기/중년기/노년기 등 구분을 위한 것, 국가적으로 인구를 관리하기 위해 통계를 내기 위한 좋은 기준이 되는 것. 많은 사람들이 30대에 직무 변경을 해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할 때면, 나는 "뭐어땨용" 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이것저것 시도했다. 물론 나는 상관없지만, 내가 지원하고자 하는 직무에서 면접관이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사실 나는 그 점도 고려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남들이 자기 자신을, 또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내 자신만이 나를 그렇게 제한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남들 기준에 충족하기 위해 나를 제한할 필요는 없다. 숨쉬듯 평가받는 시대에, 나만이 내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난 뭐든 할 수 있다. 해도 안되면, 다른 거 하면 된다.
어쩄든 나이가 들면 자연이 좋다, 꽃이 좋다라는 프레임은 너무 학습이 되어버렸다. 의식적으로 자연 사진, 꽃 사진은 찍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는 나도, 무의식적으로 나이에 대한 것이 학습이 되어버려서 약간은 슬프다. 하지만 몽골 자연의 압승. 카메라를 여기저기 들이대며 풍경을 찍을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늑대 동상에 다가올 때쯤엔, 커피를 파는 야외 카페가 있었다. LP판으로 노래를 틀고 캠핑 의자를 좌석 삼아 사람들이 그 곳에서 커피를 즐기고 있다. 가이드님 말씀대로 다 한국사람이겠지. 나도 저 곳에서 경치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이 곳은 화장실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대로 지나쳐 정상을 향했다.
정상 부근에 다다를 땐 땀이 쏟아졌다. 이 곳은 바람도 강하게 불어서 땀을 금방 훔쳐내 주었지만, 해가 높이 떠오를수록 기온도 급히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에는 온 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는데 정말 하루에 한국의 사계절을 다 겪을 수 있는 날씨이다.
늑대 동상에 도착했을 때, 한 할머니가 계셨다. 우리에게 "자매님들, 제 동생은 어디까지 왔나요?" 라고 물으셨다. 짧은 순간 머리를 굴려보니, 아마 기독교인이고 우리와 같은 관광버스를 타고 이동해 온 분일테고, 자신들이 함께 온 무리에서 혼자 앞서 오신 분이구나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뭐 안다면 어디까지 오셨더라고요, 라고 할테지만 그 무리를 몰랐기에, 모르겠어요, 라고 답해드리고 사람들이 다 도착하기 전에 얼른 사진을 남겼다.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나랑 동생도 헉헉대며 오른 이 동산을, 저 분은 가뿐히 먼저 올라와 쉬고 계셨단 사실이 말이다.
오를 때의 경치와 내려갈 떄의 경치 또한 다르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았을 때 펼쳐지는 광경은, 사람들이 왜 등산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공감 포인트이다. 사진과 동영상을 마구 남기며 신나게 뛰어내려오다가 우리는 겁에 질려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당황한 건 얘네도 마찬가지이다. 이 소들을 몰고 있던 사람은 없었고 그냥 소들끼리 풀 뜯다가 이 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버스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목인데, 소 떼를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기는 처음이다. 우리는 당황한 나머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고, 소들도 우리와 마주한 이후 더 앞으로 걸어오지 않고 우리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초원을 바라보다가 반복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동생과 나는 서로 "지나가도 되나? 이 길이 아닌가? 저기 보이는 게 우리 버스면 이 길이 맞지 않나?" 하며 우왕좌왕했다.
동물을 좋아해서 소들을 보니 기분이 좋긴 한데, 그래도 예쁜 거랑 예쁜 애들을 실제로 마주한 건 다른 것 같다. 곰도 좋아하는데 곰 무리를 내가 이렇게 마주하면, 그 기분이 다르듯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는데, 뒤에서 산을 내려오시는 한 아저씨가 소들 사이로 휘적휘적 자연스럽게 걸어가셨다. 소들도 딱히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도 기회다 싶어서 아저씨 뒤를 따라 서둘러 지나왔다. 그 아저씨는 우리가 탔던 버스로 올라타셨다. 아, 우리 일행이었구나 생각하며 신발에 묻은 흙더미들을 털어내고 따라 버스에 올랐다.
간식을 까먹으며 기다라니 사람들이 모두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한번 눈에 익으니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분은 내 머리 짧다고 하신 분, 저 분은 정상에서 만난 할머니. 저 분은 소 사이로 지나가신 분. 오 저기 형제끼리 여행 오신 어른 두 분도 돌아오시네. 이렇게 말이다.
멋진 경관을 보며 두세 시간 걷다 보니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우리 버스는 출발했고, 일반 가정집으로 초대 받아 허르헉이라는 몽골 전통 식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서 만든 유체품 간식도 먹고 그 후에 승마 체험을 한다고 했다. 이런 내용을 가이드님이 움직이는 버스에서 설명을 하셨는데, 그때 또 아저씨들이 한 마디 했다. "어이 제주 아가씨들! 아가씨들은 제주도에서 말 많이 타봤겠네! 잘 타겠다!"
경계를 잘하는 내 성격상 100% 기분 좋게 들릴 말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 아저씨들을 대충은 안다. 저렇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어른들 참 이상하다 생각하지만서도 이왕 다같이 움직이는 거 분위기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분들이 미워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시끌벅적하게 몽골의 한 게르 가정집을 향해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