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문, 마이클콜린스, 칼세이건, 화성 그리고 결국 숲과 아이
2018년 어느 여름날 오후, 그늘막과 헌 이불을 싸들고 한강변의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갔다. 시민들에게 무료로 천체관측 프로그램을 제공해준 서울시 덕분에 캠핑을 하면서 개기월식을 관측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 해의 더위는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날이 잦을만큼 기록적이어서, 도심 한 복판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장소에 한참을 머무는 일에는 조금 용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생전 캠핑이란 것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인지라 낡은 그늘막을 쳐놓고 아홉살 아이를 데리고 하룻밤을 지새려니 이런저런 걱정거리가 동반되었다. 그러나 걱정거리와 짐보따리를 이고지고라도 가고 싶었다. 밤새 달을 볼 수 있다기에.
주차장에 차를 두고 꽤나 올라가야 도착하는 공원은 멀찌감치 떨어진 강 너머의 아파트촌을 조망하지 않는 이상 서울 한복판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 곳이다. 차라리 어느 산골 목초지라면 믿을 풍경이다. 넓은 풀밭 가장자리로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오이나 토마토같은 밭채소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그 사이로는 띄엄띄엄 뱀조심하라는 팻말이 무심하게 꽂혀있기도하다.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도착하여 여기저기서 팔뚝을 불끈불끈하며 타프를 쳤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뽀얀 아홉살 아이들도 불끈불끈 아저씨들 사이에 끼어 장작을 배급받아 불을 피우는 법을 배우고, 수돗가로 가서 상추와 깻잎을 씻었다.
예상대로 무더운 반나절을 보냈으나 제 아무리 긴 여름 해라도 저녁 여덟시 즈음이 되자 자취를 감췄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졌다. 그날따라 유난히 붉으면서도 커다란 보름달이 떠서 저녁 식사가 한창인 풀밭 위의 탁자들을 드문드문 비췄다. 고층 건물에 가려지지 않은 넓은 하늘의 보름달은 어느 동화에서 본 것처럼 탁자 위로 쑤욱 떨어질 것만 같았고, 감탄하며 아무리 핸드폰으로 찍어봤자 그 존재감을 담기엔 역부족이었다. 올려다보느라 뒷목이 뻐근해질 때 즈음, 천체망원경이 이리저리 설치되고, 준비된 커다란 스크린에 강연자가 또 다른 달을 띄워 돌려주었다.
“우리는 지금 태양과 달의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곧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조금씩 가리기 시작할 거예요. 오늘 달이 유난히 붉어보이죠? 지구 대기를 통과한 빛 중 붉은 빛만이 굴절되어 달에 닿았다가 반사되기 때문입니다. ...... 지금 스크린에 보이는 곳은 우리가 지구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절대로 볼 수 없는 부분이에요. 바로 달의 뒷면이죠.”
하늘을 안내해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좋은 톤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천체관측을 하러가면 늘 과한 친절이나 과한 호들갑 없이 편안하고 조곤조곤하게 우리를 우주로 안내하는 사람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안내는 항상 지구에 대한 염려로 마무리된다. 이날도 그랬다. 낮에 나온 반달을 공기가 깨끗한 시골에서는 볼 수 있지만 도시에서는 잘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의 이야기.
새벽 3시. 천체망원경 렌즈로 보이는 둥근 달에 드디어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구의 그림자, 내가 조금이나마 지분을 차지하는, 그러니까 나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그 그림자가 천천히 달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발딛고 있는 지구의 둥글고 거대한 정수리를 거울에 비춰본 기분이랄까.
1990년에 보이저 1호가 61억 킬로미터 바깥에서 찍은 지구는 그저 하나의 작은 점이었다. 칼 세이건이 이 점 사진을 보고 감응하여 쓴 책 <창백한 푸른 점>에서 그는 인류의 긴 역사와 역사 속에 존재했던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긴 우주의 시간 속 짧은 찰나에, 광활한 우주 속의 겨우 작은 점,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를 점유했다가 사라진 문명과 이데올로기와 권력다툼. 그들이 일어나고 스러지는 과정에서 생겨났던 오해와 만행, 증오와 망상 같은 것들. 그는 이 많은 일들이 벌어진 우리의 고향이 우주에서는 그저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하늘을 해설해주는 그 많은 천문대의 안내자들은 그렇게 나긋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던걸까. 나는 천문학을 공부하기는 커녕, 달을 가린 지구의 둥근 그림자를 보고 있을 뿐이었는데도 이상한 경외감이 들었다. 둥글던 보름달이 완전히 가려졌다가 서서히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는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모습을 보며 꼬박 밤을 샜지만 졸리지가 않았다.
달로 여행을 떠나 달의 원주민과 한판 붙고 돌아오는 모험을 그린 SF 영화가 만들어진지 100년이 훌쩍 넘었다. 인간이 실제 달에 착륙한지도 50년이 넘었다. 아폴로 11호 사령선 조종사로서 유일하게 달의 뒷면을 본 지구인이었던 마이클 콜린스는 지난 4월 말, 하필 지구와 달이 근접한 거리에 있어 슈퍼문을 볼 수 있었던 날에 아흔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 세대가 이렇게 지나가고 달착륙은 조작일 것이라는 음모론이 무색할 정도로, 계속해서 더 먼 거리의 행성에 탐사선들이 속속들이 착륙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기업들이 로켓을 쏘아올리고, 주식시장에서는 아예 항공우주산업군만을 묶어 투자하는 상품들이 팔리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비관적이라서일까, 꼰대가 되어서일까 이 창백한 푸른 점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영향력을 멀리 뻗어나가려는 움직임이 두렵기도 했다. 자꾸 밖으로 나가려는 이유가 뭘까. 지구는 이제 영 가망이 없기 때문 아닌가. 왜 아니겠어, 역시 지구는 이제 틀렸어.
두렵거나 말거나, 꼬깃하게 접은 세뱃돈 몇 만원을 맡기며 테슬라 주식과 우주탐사산업 투자상품에 맡겨달라는 초딩 아이와 주말이면 보드게임 ‘테라포밍마스’를 해주어야한다. 게임은 플레이어 각자가 화성을 개척하는 기업이 되어 개척사업을 수행하고 화성을 인류가 살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야 끝이 난다. 한 번 펼치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장난감을 괜히 사주었다고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앉아서 놀아주고 있노라면, 그래 다 틀렸다고 할 땐 언제고, 엉뚱하게도 작은 희망 같은 것이 생긴다.
화성에 한 개의 도시를 건설할 경우, 플레이어는 게임 규칙 상 반드시 도시 주변을 녹지화해야한다. 자신이 건설한 도시 주변에 숲이 많을수록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도시를 건설하는 행동은 승점을 얻을 수 없지만, 녹지를 건설하면 화성의 산소농도가 높아지면서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땅따먹기 베이스의 게임이지만, 해양 타일을 놓을 때에는 자신의 영역으로 표시하지 않는다. 왜? 바다는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승점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무의식 중에 체화한다. 숲은 중요한 것, 바다는 모두의 것.
우주대항해시대의 아이들은 어른 세대와 달리 이런 윤리를 가지고 커나가지 않을까. 그러면 화성이 테라포밍되기 이전에, 지구가 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글쓰기 과제도 못했는데 보드게임자리에 붙잡혀 전전긍긍하던 주말 저녁, 달을 보던 3년 전의 공원을 떠올렸다. 그 달밤의 풀이 무성하던 공원을 생각하자 더 희망적이 되었다.
그곳 '노을공원'은 불과 1990년대만 해도 변방 수키로미터 바깥까지 엄청난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 매립지였다. 그 날 달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고도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해발 98미터까지 세계 최대 규모로 수십년간 쌓아올린 쓰레기 덕분. 그러나 다시 십여년의 노력으로 쓰레기산은 대관령 목초지를 떠오르게 하는 생태공원으로 거듭났고, 거기 모인 어린 사람들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쓰레기산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달과 우주를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선생님과 함께 겸손함, 경외감, 지구를 염려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두 시간의 보드게임을 짜증내지 않고 성실하게 끝냈다. 녹지 타일을 악착같이 깔아서 승점을 많이 따낸 아이가 게임의 승자가 되었다. 달을 보는, 녹지를 사랑하는 어린 사람들에게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