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 <나의 비거니즘 만화>를 읽고 나서
S 떡볶이트럭이 오랜만에 왔는데 작은 아이가 순대가 먹고싶다는거야. 그래서 1인분 샀는데 큰 아이가 섞어주신 내장을 보고 꼬치꼬치 묻더라고. 이게 뭐냐, 저게 뭐냐 묻는데, 아이가 그 책을 보고나서인지 마음이 많이 불편하더라.
J 아니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애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S 표정이 왜 그렇게 떨떠름해? 내가 강요한게 아니라는 걸 몰라서 그러는건가? 나는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싶고, 벌써 열 두 살이니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일은 지지해주고 싶어.
J 나도 문제의식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다만 아직 어리잖아. 한참 성장할 시기에 골고루 잘 먹어야지 지금부터 불필요하게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그런 책이 지금 응? 애가 읽어도 되는 책이야?
S 아니 뭐래. 그 책은 자기가 데려가서 확인도 안하고 사줬잖아.
J 책방에 만화책이 그거 하나였단 말야.
S 나도 아이에게 너무 자극적이었다는 생각은 들어. 암소 항문으로 손을 쑤셔넣어서 자궁을 고정시키고 정액을 들이부어 강제로 임신시키는 일을 반복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서나 쉽게 우유를 사먹을 수 있다는 적나라한 수준의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하지만 이미 읽었으니 어쩌냐고. 충격에서 그치지 않고 육류 소비를 조금 말그대로 조금 줄이겠다고 결심하는게 어떻다고 그러는거야? 응원해주지는 못할 망정.
J 아니 오버하지 말고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하자는거지. 좋은 점만 말할 순 없어? 채소도 좋고 고기도 좋고, 키 크고 건강하려면 골고루 먹어야한다고만 말해도 되잖아. 굳이 동물이 불쌍하다느니 미안하다느니 그런 얘기는 할 필요 없는거 아니냐고.
S 균형잡힌 시각? 말잘했다. 여태까지 고기 많이 먹어야한다, 고기를 먹어야 건강하다, 키 자란다, 똑똑해진다 이런 이야기만 듣고 평생 산 아이야. 같이 책 읽고 환경오염과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루이틀 나눴다고 그게 오버하는 거야? 요즘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야기들이거든?
J 아니 대체 우리나라에 비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 왜 굳이 애를 정상적으로 자라게 놔두지를 못해? 뭐 다 좋다 이거야. 나중에 자기가 어른 되어서 판단할 일이지, 아직 성장기잖아, 성장기.
S 이거 보세요, 이미 우리나라도 비건 인구 백오십만이 넘었고요. 설령 너무나 소수라고 해도 그럼 비정상인건가? 그리고 내가 강요한게 아니라 본인 선택이라니까. 지금 존중해줘야 나중에도 존중할 수 있는거지, 나중에라니 왜 존중을 유예하지? 다 됐고, 지금 우리 너무 웃긴거 알지. 애가 아예 비건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 딱 한 끼만 가족과 같이 비건식으로 식사하고 싶다는 건데 그게 지금 이렇게까지 발끈할 일이야?
J 그래서 하루 한끼를 샐러드만 먹는다고?
S 왜 샐러드만 먹어? 버섯볶음에 두부조림, 가지탕수에 연근과 두릅 튀김, 참나물, 취나물로 비빔밥도 줄거야. 매실장아찌 넣고 데친 케일로 쌈밥 만들면 아이가 또 얼마나 잘먹는데? 심지어 사또밥처럼 비건 인증 받은 과자도 있다니까.
J 그런데 비건하면 환경에 도움되는 거 맞아? 이거 고기 대신 먹는다고 차린 아보카도 샐러드 이거, 남아메리카 농민들 피눈물을 짜내고 있는건알아? 사또밥이라니, 과자는
뭐 괜찮아? 팜유가 얼마나 골칫덩어리인지 알지? 야자나무 심느라고 열대우림을 싹 밀어버린다잖아. 원주민들은 살 터전 잃어버리고.
S ...이 지점에서 혀를 끌끌 차며 남일처럼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 정말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구나, 라고.
J 응, 남일처럼 그럴 수가 없지, 그 사람들이 곧 우리니까.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편하게, 많이, 재미로 먹으려는 사람들. 솔직히 비건도 다 신종 있어빌리티 아니냐고. 비건지향 이런거 요란하게 떠들어봤자 우리 네 가족 제육볶음 한 번 해먹으려면 돼지고기 한 근을 사는데, 원래 고기 싫어하는 자기 친구는 어쩌다 특별한 날이나 250g 사서 둘이 먹으면 남는다며?
S 맞아, 우린 너무 과해.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싸우고, 너무 많이 사들이고, 너무 많이 너무 멀리 움직이지. 그래서 줄이자는건데 그게 왜 문제임? 다 됐고 커피나 한 잔 하자.
J 커피도 그렇지. 과육은 다 도려내서 버려버리고 씨앗까지 싹 갈아서 닦아먹는 생물은 아마 인간밖에 없을걸?
S 야!
J 머나먼 이국땅의 커피농장과 카카오농장에서 저임금에 착취당하고 혹사당하는 아동들과 그 열매들이 비행기와 배로 우리나라까지 배송되는데 남겨지는 탄소발자국은 어쩔…
S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겠네. 하지만 베란다 텃밭 하나 성공못하는 게으른 우리는 이러고 주말이면 또 치킨을 시켜먹겠지. 토마호크를 썰어대는 예능 프로를 보며 낄낄대겠지. 원두향이 좋다고 브런치를 준비하며 커피콩을 갈겠지. 이대로 불편한 마음이면 될까.
J 안될걸.
돼지의 잘린 귀와 허파를 앞에 두고 남편과 서로 빈정거리며 말다툼을 했다. 인간의다른생물에대한폭력의역사,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폭력적언사, 의식하지 못한 채 행사되는 크고 작은 폭력들이 거친 감정 사이를 휘감았다. 더 잘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그르치게 되는 덫칠의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버릇처럼 들어간 온라인 게시판의 글에서 누군가의 우스갯소리를 보았다.
“가만있어.”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우습게도 꿈에 노자의 나라가 나왔다.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이 사는 그 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기물이 있지만 쓰지 않으며,
백성들이 자기 고장에서 죽는 것을 중히 여겨서 멀리 옮아가지 않고,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으며,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쓸 곳이 없다.
그 백성들은 간단한 문자만을 쓰며,
아무 음식이나 달게 먹고 아무 옷이나 잘 입으며
단촐한 거처에 편안히 기거하고, 소박한 풍속을 즐거워한다.
이웃나라와 서로 멀리 바라보이고 개와 닭 소리가 서로에게 들리지만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도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