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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믕됴 Jun 09. 2023

[0.]평생 혼자 살겠다더니

내가 어쩌다 결혼까지 하게 된 걸까

오빠와 나는 짝으로서 완벽하게 평범하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도, 비범한 전조도 없었다.


사실 나는, 나한테는 그런 게 있을 줄 알았다. 평생 결혼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에 누구 하나 내지는 둘 이상을 더 책임질 자신은  없다는 결론을 아주 일찍 내렸고 그 다음 더 이상 돌아본 적이 없었으니, 어쩌면 이상하리만치 일찍 결혼에 대해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은 그 결정을 일찍이 내리고 되돌아볼 틈 없이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조금 측은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매사 느긋하고 덜렁대고, 세심하거나 꼼꼼한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을 타고났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무작정 낙관하지만은 못했다. 나는 살아지는 대로 살기만 하거나, '나 하나 건사'하는 것 외에도 생각하는 것이 많지 않으면 내가 아끼는 것들이 죄다 망가지도록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될 지도 몰랐다. 


제 갈 길 알아서 잘 찾아 가는 동생이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곤란한 일이 생길 지 모르고, 평생 고생만 한 우리 엄마 건강이라도 상해서 간호인이라도 당장 필요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사업 실패 후 낙심해서 무기력해져버린 아빠 대신 최대한 빨리 가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어떤 지원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또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심정적으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개집살이마냥 시집살이 시키던 할머니한테 엄마 역성을 들면서 소리치고 싸웠던 중학생 시절에도, 공부 때려치우고 아무데나 취직하라고 내 동생 기죽이는 말이나 해대는 할아버지에게 그런 소리 할거면 전화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던 순간에도 나는 그게 당연히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사실 내가 가장에게 바랐던 역할이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지금 그때보다는 철이 조금 들었는지 내 생각과 다르다고 말로써 가족을 들이받는 것이 가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내게 더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고 했던, 시야가 좁고 쥔 것이 적고 힘도 약하고 겁만 많은 사람이었다. 


9평 모고 전과목 백분위 100을 받았던 고3 시절,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법대나 경영대를 포기했다. 장학제도가 잘 된 학교에 4년 장학금을 다 받고 다니겠다고 자랑같은 야망을 말하기도 했지만, 4년 장학금이란 내가 대학에 가는 게 가능하려면 갖춰야할 필수적인 조건일 뿐이었다. 나는 대학생활이 시작되자마자 미친듯이 들어갈 자취 비용과 교재비용 따위를 혼자 다 충당하며 성적을 유지할만큼 공부할 자신도, 생활비를 엄마한테 부탁할 염치도 없었다.


나는 최대한 안정적인 직업을 최대한 일찍 얻고 최대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돈이 다 모이기 전까지 나는 늘상 불안했다. 내가 아직 준비되지 못한 사이에 혹시나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 내내, 나는 내가 어찌 해 줄 수가 없는 시련을 겪는 엄마를 여러 번 지켜봤다. 내가 어른이었다면, 내가 돈을 벌 수 있어서 엄마를 구해낼 수 있다면. 그런 망상을 이불과 함께 뒤집어쓰고 울면서 잠들었던 시간들이 기억 뒤켠에 남아있다가 슬그머니 기어나왔다. 적은 월급이었지만 늘 절반을 떼어 저축했고, 월급 외의 모든 수입도 전부 저축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생각했던 돈이 모였다. 목표했던 금액을 눈으로 확인한 그때부터 놀랄만큼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당장 무슨 일이 터져도 일단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흐뭇하고 뿌듯했다. 내 돈이 주는 든든함을 한 번 알고 나니 돈의 가치가 한층 더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돈이 모였다고 살림을 넉넉하게 풀진 않았지만, 똑같이 소박한 생활인데도 더 풍요롭고 재미있었다.


그 때 쯤, 연애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와 솔직해져보자면 연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시점에 이미 결혼에 대한 가치관도 조금 바뀌어있었다. 이제 나는 나의 잣대를 대어 재었을 때 충분히 안정되고 준비된 사람이었다. 내 속에 있던 너무도 많던 내가 돈과 안정이 새벽내 쌓이는 눈처럼 차곡차곡 포개지는 동안 조금씩 걷어지다가 이제 한 사람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낸 느낌이라고 하면 적당하겠다.


직장동료가 마침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처음으로 소개팅 제의를 아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죠, 뭐.'


이게 내 반응이었다.

'너무 좋아요!'도 아니고, '뭐 어때.' 


아주 쿨하게 소개받기로 동의하고, 아무 사진이나 보내고, 받은 사진은 대충 보고서 오케이를 외친 나는 정작 소개팅 자리에 아주 많이 긴장을 하고 나갔다. 소개받아서 잘 되는 경우는 사실 아주 드물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위안이 되었을만큼, 나는 그 자리가 부담스러웠다. 당장 사귀어야하는 것도 아니고 선자리도 아닌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가 예전에 연애를 포기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 중엔 그런 관계가 생겼을 때 그걸 너무나 중요하게 여길 것이 너무 빤하니까 그게 부담스러웠던 것도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오빠는 사실 내가 소개받기로 되어있던 사람 본인이 아니라 그의 친구였다. 오빠는 그 사람 대신 나왔지만 이제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소개팅 전 카톡으로 알게 된 내가 좋아하는 카페와 음료를 기억해뒀다가 당일날 식사를 마치고 나를 근처에 있던 그 카페에 데려간 것도, 그 카페가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아서 결국 못 가게 되니까 주머니에 있던 귤을 꺼내 음료 대신 건네준 것도 오빠가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어났더라도 의미가 없었을 일들이다. 내가 고마워하는 걸 고맙게 생각하는 것도, 나도 모르던 내 취향에 꼭 맞는 선물을 해주는 것도, 내가 아무리 민망해해도 끝도 없이 애정표현을 하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무 고난 없이,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연애했다. 처음 하는 제대로 된 연애에 내가 크고 작은 혼란들을 겪을 때마다 오빠는 가만히 기다리거나 들어주곤 했다. 서로 궁금해하고 존경하고 귀여워하다가 감탄하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갔고, 그렇게나 긴장했던 첫만남이 무색할 만큼 편안한 관계가 됐다. 이제 마음이 불안하지 않아서인지 나를 아끼는 사람의 마음을 받는 데에도 금방 적응했다. 내 마음이 저 사람의 마음보다 더 빨리 깊어질까봐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나는 타고난 모습과 조금 더 가깝게 살게 됐다. 조금 더 느긋하고, 원래보다 조금 더 덜렁대면서. 죄책감이나 부채감 없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생겼다는 믿음이 모아놓은 돈과 함께 아주 튼튼한 지지대가 되어주었다.


오빠랑 나는 짝으로서 완벽하게 평범하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도, 비범한 전조도 없었다.

사실 나는, 나한테 그런 게 있을 줄 알았다. 나에게 결혼은 아주 어려운 결심이니까.


하지만 아주 어려운 것을 결심할 때는 오히려 아무 계기도 전조도 필요가 없다. 누군가 아주 어려운 것을 결심할 때는 이미 그것을 결심하는 사람의 고집이 보통이 아닐거고, 그것을 실행할 핑계만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오빠가 말했다. 올해 말 독립을 하기로 가족들과 회의를 했다고 한다.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을 구하면 될 일을, 내 직장 근처이자 통근에 편리한 지하철역이 가까운 아파트에 전세를 구하겠다고 했다. 가족들은 모두 좋은 생각이라고 지지해 주었단다. 그 말을 전해들은 나는, 예전의 나라면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을 부담감과 압박감 대신 더할나위 없는 행복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니까, 사실 애초부터 언제고 이렇게 될 일이었던 것이다. 오빠는 진작에 결심했고, 나는 진작에 결심할 준비가 끝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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