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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믕됴 Jun 10. 2023

동굴에 사람 있어요...!

나가긴 나가야 하는데...



  나는 아주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고 야무진 사람이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지도 기대지도 않는다. 취미도 그림 그리기, 글 쓰기, 노래 부르기, 자수 놓기, 게임하기 등 아주 다양하고 대부분 혼자 하는 것들이라, 혼자 보내는 시간을 통해 심신을 회복하는 일이 익숙하다. 물론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도 즐겁고 친구들만이 줄 수 있는 위로와 지지도 있다. 하지만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으면, 어쨌거나 한동안 만이라도, 나는 나만의 동굴로 들어가야 한다.


동굴.


  회피형과 연애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아주 학을 떼고 치를 떨 말이다. 초겨울 살 뒤룩뒤룩 오른 반달가슴곰도 아니면서 왜 동굴로 기어들어가는지부터 모를 노릇인데 한 번 들어가면 언제쯤 나올 지도 확실치가 않다. 도대체 뭘 하느라 연락까지 두절하고 있는 건지도 애인 된 입장에서는 얼마나 궁금할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내려버린 회피형 인간에게 애인의 감정은 2차적인 문제가 된다. 내가 지금 동굴이라고 부르는 것은 회피형 인간에게 응급실 내지 패닉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회피형인 사람은 정서적으로 외상을 입거나 그럴 것으로 예상되면, 그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대화도 싸움도 이해받기 위한 설명도 시도하지 않고, 일단 피하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잠수를 타는 것이고, 잠수 타는 시간 동안 우리는 벌어진 상처를 대충이라도 소독하고 꿰매는 작업을 한다. 정서적 안정을 빨리 되찾는 손잡이가 많은 사람들은 금방 이 작업이 끝나서 동굴에서도 빨리 나오지만, 취미가 없고 손잡이가 적은 사람은 동굴에서 나오는 데 한참이 걸린다.


  응급실이나 패닉룸이라는 말도 적당한 비유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싸매고 도망쳐 닿는 곳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응급실이나 패닉룸은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 때문에 찾게 되는 곳이니까. 우리는 아주 강하게 패턴화 된 양상에 따라 잠수를 탄다. 주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내지 거대한 결핍을 자극하는 말이나 행동, 또는 상황 자체가 잠수 버튼이 된다. 패턴을 파악하고 트라우마의 정체만 알 수 있다면 최소한 예측은 할 수 있다는 거다. 문제는 이 패턴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점에 있다. 애초에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와 결핍의 정체를 정확하게 명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우리는 애인에게 '이러이러해서 한동안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몇 날 몇 시에는 돌아오겠다'는 확언을 하기가 어렵다. 몇 번이나 곪아 터졌다가 아물었다가를 반복했던 상처가 다시 터진 상태에선 애인의 감정의 우선순위가 밀려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이 상처가 아물고 거동이 가능해질 만큼 수습이 될지, 의사가 아닌 환자인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저 고질적인 통증이 다시 잠잠해질 때까지 다시 벌어진 상처를 얼기설기 꿰매는 것뿐이다.


  나의 결핍은 보호에 있다. 가족의 울타리가 강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충분히 보호받지 못했다고 느낀다. 다만 부모님이 자식과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땀눈물을 흘려왔는지 잘 알기에 양육자에 대한 존경심은 강하게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은 끝내 해내지 못한 '완벽한 보호자'가 되겠다는, 완벽하게 비현실적인 목표를 품은 사람이 됐다. 그리고 동시에,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한 사람'이나 할만한 행동을 하거나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할 상황'에 처하면 절벽에서 추락하는 듯한 공포심에 허우적거리게 됐다.


  내 결핍을 건드리는 상황이 발생하면, 누구에게도 말도 못 할 정도로 강한 수치심이 들면서 우선 동굴로 기어들어간다. 그리고 한동안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 잠을 설치기도 하지만, 잠만 자기도 한다. 그러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나면, 천천히 동굴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연락을 취한다.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조금이라도 말할 때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때도 많다. 연락을 취하는 건 나를 다치게 한 사건을 감정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대처 방법이 아니라, '이제 괜찮아졌다'라고 스스로 확인하고 설득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울면서 누군가에게 나의 감정과 생각을 토로한 적도 몇 번 있다. 하지만 거기서 오는 카타르시스는 느껴본 적이 없다. 말하고 나서 시원한 감정은 약하고도 잠깐인데, 누군가가 알아버렸다는 찜찜함은 오래도록 남는다. 특히나 내가 보호하고 싶은 사람에게 오히려 보호받아야 할 사람의 모습을 보이고 나면 처음에 받았던 상처보다 훨씬 깊은 부상을 입게 된다. 그래서, 동굴에 오래 있게 되더라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지도 기대지도 않는다.


  그렇게 어쨌거나 사건 하나를 넘긴다. 겉에서 보았을 때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나타날 뿐이기 때문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폭풍이 정면으로 할퀴고 지나가도 아무 저항 없이 당하기만 했지만, 그다음 잔해를 주워 담고 정리하는 작업은 하지 않는다. 이제 괜찮아졌다고 스스로 설득을 마쳤기 때문에 정리할 것이 없다.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감정에 진작 관심을 두고 여러 인과관계를 규명하려고 애를 써서 조금은 그 정체를 알아낸 나 같은 사람이라면, 앞으로 같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고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거부회피형은 자신의 감정에 무감각하거나 매우 둔해져 있기 때문에 문제를 인지하지도 못한다. 그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같은 경험을 반복한다. 몇 번이고.


  그러니까 동굴은 그리 안락한 공간이 아니다. 좋아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동굴에 들어갈 때도, 동굴에서 나올 때도, 우리는 울거나 화를 내고 있다. 동굴은 우리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하고, 우리도 그걸 잘 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불완전함에서 오는 상처에 대한 구원은 필연적으로 나의 바깥에 있다. 거기서 나와야 하고, 애초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물론, 쉽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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