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회피형끼리 만나봤습니다
회피형에게 데인 불안형과 안정형 유형의 사람들이 커뮤니티에 시위라도 하듯이 입을 모아 토로하는 말이 있다.
제발 회피형은 회피형끼리 만나라고.
일단 죄송합니다. 딱히 제가 정서적 피해를 드린 당사자는 아니지만서도 누구한테든 사과를 받으시는게 사회정의와 공공윤리상 맞는 일인 거 같아서요. 넵.
자, 사과를 했으니까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회피형이 회피형을 만나서 사귀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우선 우리 같은 성격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고백을 하지 않는다. 고백은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 감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거절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감을 극복해야 할 수 있는데, 회피 성향이 강한 불안정 애착 성향을 지닌 사람이 이 모두를 해낼 수 있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래도 유성애자라면 자연스레 호감가는 상대가 생기지 않느냐,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물을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런 감정이 두꺼운 굳은살을 뚫고 생길 때가 있다. 하지만 첫 번째나 두 번째 단계에서 걸려 좋아하는 감정이 묻혀버린다. 신포도처럼.
그러니까 회피형인 사람이 어쩌다 썸을 타고 누군가를 사귀게 된다면 다음 세 가지 경우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상대가 고백을 해올 때까지 모르는 척 기다렸거나, 고백 없이 얼렁뚱땅 사귀고 있거나, 상대가 정말 목석에 바보 멍텅구리가 아니고서야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을 만큼 명백한 신호를 몇 번이나 주는 것을 확인하고 고백을 했거나.
좀 답답하고 느리긴 해도, 둘 중 한 사람의 의지와 행동력만 있으면 회피형인 사람의 연애가 시작되기는 한다. 그런데 회피형끼리의 연애는 두 사람이 모두 저 상태라 시작 자체가 어렵다. 정말 매우 희귀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상처입은 영혼들이 애타게 부르짖는 “제발 너도 너같은 사람 만나서 마음 고생 실컷 했으면 좋겠다”같은 저주는 실현될 가능성이 낮다.
물론 극악의 확률을 뚫고 회피형끼리의 연애가 시작되기도 한다. 그런데 일단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저주와 달리 놀랄만큼 안정적이다. 둘은 싸우지도 않고, 서로 싸울 거리를 만들지도 않는다. 상대에 대해 탐탁치 않은 점이 있으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할 뿐, 상대를 입맛대로 바꿀 생각은 애초에 하질 않는다. 둘 사이의 관계 외에 바깥 세상에서 상처를 받아 감정이 흔들릴 때도 있겠지만, 각자의 감정은 스스로 처리하고 상대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징징대지도 쏟아내지도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안정적이고 성숙한 관계처럼 보인다. 앞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거울 속의 상이 아무리 닮아있어도 최소 좌우는 뒤집혀있고,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서로 다른 인격체다.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마음이 맞을 확률이란 0에 수렴한다. 특히 회피형 애착유형은 겉으로 볼 때 아무리 안정적으로 보인들 불안정 애착유형이다. 본질적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관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참고 넘어갈 수 있으니 괜찮다고 여겼던 그 모든 사소한 일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중대한 이별사유로 둔갑할 수 있다. 관계가 오래 지속되고 마음이 깊어져 상대에게 의존하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하더라도, 남의 의존을 극도로 부담스러워하는 자신을 쏙 빼닮은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솔직한 감정을 내놓기란 쉽지 않다. 상대가 아무런 이유도 밝히지 않고 이별을 이야기할 때, 그런 대우가 얼마나 불공정한지를 항의하며 붙잡을 용기도 동기도 없다. 누군가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붙잡고 늘어지며 울고 불고 매달리지 않기 때문에 헤어지는 순간에마저 평화로워보일지 모르나, 둘 모두 마음으로는 폭풍을 맞이하고 있다. 아주 조용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고통스러운 파멸을 맞이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진공상태를 가정한 일반론이다. 나는 회피 성향이 강한 거부회피형에 해당하고, 이제 예비신랑인 내 남자친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관계는 위에 적은 그 어떤 양상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둘 다 회피형 성향을 버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물론 운도 좋았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놀랄 만큼 잘 맞는 데다, 서로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를 몇 가지나 나열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에도 상대의 마음에도 의심이 없다. 이런 확신 자체가 회피형인 우리에게는 아주 희귀한 경험이기 때문에 서로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더 멀고 함께 보낼 시간이 더 길지만,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의 관계에서 타인과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얼마나 숨막히는 일이었는지를 기억하는 한 지금의 설렘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잊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이전의 연인이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회피형인 사람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사귀기로 결심할 만큼 만용에 찬 사람일 수 없다. 아마 그 사람은 관계를 시작하는 시점에 당신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을 것이다. 본인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부당하게 당신의 탓으로 돌리기 전까지는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행복하고 편안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아무 설명 없이 당신을 버려두고 떠나버렸다면, 그러고 나서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대도, 뾰족한 죄책감이 당신 대신 그를 아주 오래도록 괴롭혔을 것이다. 미워해도 좋지만, 슬슬 그만 용서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