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믕됴 Jun 11. 2023

회피형 여자의 소개팅 썰

소개팅 성공률이 원래 10%도 안 된다면서요?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하는데, 소개팅 제의는 시기를 불문하고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모조리 정중하게 거절하며 지냈다. 스스로의 잣대에 '자격 미달'인 자기 자신에게 연애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러다 모아둔 돈도 좀 있고 직장에서도 자리를 잡고 나니,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더라도 아주 책임있게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회피형 인간이 아니었다면 적극적으로 소개팅 시켜달라고 말하고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굳이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순풍이라도 불듯이 소개팅 제의가 들어왔다. "뭐… 그럼 그럴까요?" 하고 뜻뜨미지근하고 애매하면서도 아주 새로운 답을 했던 어색함이 아직도 생각난다. 소개팅 얘길 꺼냈던 사람이 '어? 웬일이래?'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소개팅을 하러 가기 전, 나는 몇 번이나 발길을 되돌릴 뻔 했다. 얼마나 긴장되고 두려웠는지 이루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 물론 소개팅 전 누구나 다 겪는 거절에 대한 걱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8년 만의 소개팅이니까 긴장할 만도 했다. 그런 나를 약속장소까지 어떻게든 끌고 간 건 친구의 말이었다. 


"소개팅 성공률 10%도 안 돼."


  이렇게 기운 빠지는 말이 있을까? 어차피 안 될 일이라니! 물론 친구가 이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고 내가 멋대로 그렇게 받아들인 거지만, 실패에 대한 확언이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시간과 돈과 감정을 낭비할지도 모르지만, 원래 그 사치를 부리러 가는 것 아니겠는가.


  아직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2년 1월, 그렇게 내 8년만의 소개팅이 시작되었다. 적당히 어둡고 아늑한 조명과 예쁜 음식 덕분에 소개팅 명소로 유명한 와인바였다. 무슨 정석 코스마냥 머쉬룸 어쩌구 영어로 주절주절 크림 파스타에 샐러드를 주문하고, 와인바씩이나 가놓고선 둘 다 술을 싫어하니 알콜은 전혀 안 시켰다. 우리 말고도 데이트나 소개팅으로 온 커플들이 많아보였는데, 와인 안 시킨 건 우리 밖에 없었다. 그래도 먹기 싫은 건 못 먹는 성미가 비슷해서 콜라만 하나 주문했다.


  만나기 전부터 며칠간 수시로 메신저를 통해 대화를 했기 때문에, 이야깃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기억이 전혀 안 나는 걸 보면 긴장했던 건 사실이지만, 두 시간을 쉼 없이 즐겁게 떠드는데 성공했다.


  코로나 때문에 심야 영업이 금지여서 나라에서 정한 통금이 있던 시기였다. 저녁 때 만나서 두 시간을 떠들었으니 통금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뒤로 갈수록 자꾸 시간을 확인하던 사람이 슬슬 일어나자고 했다. 이제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대화가 한창 재미있어지던 때라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든 찰나, 그가 바로 덧붙였다.


  "카페로 자리를 좀 옮기는게 좋을 거 같아서요. 봐둔 곳이 있어요."


  통금이 한 시간 남았는데요? 바로 되물으려다, 봐둔 곳이 있다고 하니 지척에 있는 예쁜 카페라 단 몇 십 분이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보다 하고 참았다. 소개팅 경험은 거의 없지만, 이 사람이 그래도 나만큼은 이 만남이 마음에 들었구나 싶어 기쁘기도 했고.


  가게에서 나와 그가 핸드폰으로 길을 확인하는 걸 살짝 훔쳐 보았다. 언뜻 보인 카페 이름이 익숙했다. 내가 대학시절 사는 게 심히 고달플 때마다,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의미도 없는 의문이 고개를 쳐들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를 달래려고 들렀던 프랜차이즈 카페. 메신저로 대화할 때 서로의 대학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그 카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음료가 무엇인지와 그게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가를 언급했었다. 힘들었던 이야기를 구구절절 쏟아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정말 스치듯이 얘기했는데, 그걸 기억했다가 소개팅 데이트 코스에 집어넣은 거다. 대화와 웃음이 끊이지 않는 좋은 분위기도 포기하고 굳이 장소를 옮기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기억했네요? 여기 일부러 가자고 하는 거 맞죠?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을 듣고 조금 우쭐해졌던 그는 금방 충격에 빠졌다. 겨울 칼바람을 뚫고 10분 정도 걸어 도착한 카페가 일찍 마감해서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나는 그 흐뭇해하는 표정도, 당황해서 멍해진 표정도 내심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닥여줬다. 괜찮아요. 다음에 가면 되죠. 어차피 프랜차이즈인데. 다시 안색이 밝아지는걸 보고 마스크 안에서 웃기도 했다. 그 때 쯤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쪼끄만 귤 하나였다.


  "먹으려던거 못 먹었으니까 이거라도 먹어요."


  참나, 진짜. 나 귤 별로 안 좋아한다고 메신저로 대화할 때 말했는데. 어이가 없어서 이번엔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고맙다며 귤을 받았다. 내가 귤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사실을 짚어줘서 또 충격에 빠지게 만들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그런데 그가 또 날쌔게 덧붙였다.


  "귤 안 좋아하는 거 아는데 지금 그거 밖에 없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회피형은 제발 회피형끼리 만났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