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철학에서의 '체계성'과 '서술'
모순과 분열의 극복을 통해 진리를 생성해 나가는 헤겔 철학에서 자유의 생성 역시 유사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리의 자유는 부자유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의식이 되기 위해 우선 자기 의식은 스스로를 잃어야만 한다. 그것을 ‘자기 상실’이라 한다. 자기 상실은 자아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멸하는 것은 자아가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1인칭의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1인칭의 자신으로부터 탈피하여, 바깥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점 전환. 그렇게 자신을 다른 하나의 본질로서 발견하는 것이 자기 상실이다.
다음으로 자기 의식은 타자 마저도 본질로 보지 않아야만 한다. 그 역시 타자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 의식은 타자를 지양하고, 타자는 타자가 아닌 일종의 거울 같은 자아가 된다. 그리고 자기 의식은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이러한 두 단계로 이루어진 과정을 ‘탈자화’라고 한다. 탈자화는 나를 상실하는 동시에 타자를 지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의적인 지양은 역설적으로 양의적인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친 우리의 좌우를 반전시키는 과정과도 같다.(우린 좌우가 반전된 거울을 보면 어색함을 느끼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에 가깝지 않은가?)
이 모든 과정은 자연 법칙이나 욕망에 근거한 인과성을 지니지 않는다. 또한 어떠한 강제성을 지니지도 않는다. 그저 상호간의 요청에 따라 이뤄지는 과정일 뿐이다. ‘나’와 ‘너’의 자유는 선험적 전제로서 적극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요청을 승인하고, 또한 그것을 보장하는 만큼 각자는 자유를 얻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아는 자기 자신과 타자를 동시에 각자에게 되돌려준다. 이 같은 상호승인과정 속에서 ‘나’와 ‘너’는 동등한 지위와 자유를 자발적으로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성과 승인 과정은 계속해서 원환적으로 반복된다. 탈자화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이 아닌, 그 과정 속에서 자유를 생성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즉 자유 의식은 끝없이 생성되는 것이지 완성되거나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끝없이 자신을 잃고 되찾는 과정을 거듭하며 관계 속에서 자유를 생성해 나가야만 한다.
헤겔이 주장한 상호승인과정은 홉스의 ‘사회계약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사회계약론과 상호승인과정은 명백한 차이점을 지닌다. 사회계약론에서는 탈자화 과정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원시의 이기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기 생명의 보존, 즉 욕망과 자연 법칙을 따르는 인과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들의 자유는 인과성에 의한, 말 그대로 계약적 자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는 표면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헤겔의 승인이론에서 관계는 보다 내밀하고 자유는 주체적으로 생성되며 정립되는 개념이다.
상호승인이론에 관련된 논의에서는 피히테와의 비교 역시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타자 속에서 자아의 자유를 정립하는 것을 헤겔보다 앞서 시도했던 것은 피히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타자에 대한 균형적인 제한과 지양을 인정할 뿐 그 이상의 시도는 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즉 타자를 인정하고 타자로 인해 자신이 정립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타아에게 자아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는 것이다. 피히테는 타자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입장에서 사태를 고찰하지는 않는다. 타자는 그저 자아를 정립하기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 피히테에게 타자는 기계적이며 수동적인 존재이다. 타자는 나를 제한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정립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인정되어야 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그러므로 피히테가 주장하는 상호주관성은 ‘부정적 상호주관성’이다. 헤겔은 이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타자가 그저 자아를 정립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그 자체로 자유로운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타자의 자유는 자아의 자유와 상호관계 속에서 정립된다고 정의한다. 심지어 이러한 상호관계에 있어서 ‘나’는 ‘너’에게 요청을 해야만 한다.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온 힘을 다해 ‘너’의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너’를 ‘나’의 안으로 받아들인다. ‘나’와 ‘너’라는 본질적으로 서로를 제한하는 두 자아는 서로의 안에서 자신을 잃고 각자가 되었다가 다시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는 무척이나 험난한 과정이다. ‘나’와 ‘너’의 관계는 삶과 죽음의 투쟁 끝에 한쪽이 한쪽을 지배하는 주종관계에 이르고, 노예가 된 자아가 다시금 자기 의식을 되찾는 그런 처절한 과정 끝에 성립되는 내밀한 관계이다. 헤겔의 '자유'란 마치 지지고 볶아가며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어떤 지독한 연애를 닮은 것도 같다.
헤겔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세계가 끝없는 유기적 관계를 통해 발전해 나가는 변증법적 세계관을 정립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진정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관계에서, 만약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삼켜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생성의 원환 운동이 아닌 일방적 지배, 정복 운동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고 삼켜지는 것이 두려워 세상과 관계 맺지 않는 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부를 수는 없다. 진정한 자유는 타자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다. 스스로 타자 속으로 들어가 관계 맺음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는 타자를 지배하거나 정복하려는 욕구를 제한하고 참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진실로 강인한 정신은 타자를 배척하지도 정복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거침없이 자신을 버리고도 다시금 더욱 성숙한 자신을 되찾고 타자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 ‘나’와 ‘너’라는 대립되는 존재들이 만나 둘 중 하나가 살아남는 것이 아닌, 둘이 모여 새로운 ‘우리’가 되고 다시금 더욱 고양된 자기 자신으로서 ‘나’와 ‘너’로 돌아오는 그러한 순환적인 관계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관계이다.
진정한 자유는 ‘나’와 ‘너’ 그리고 세계 전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포용하여 끝없이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과 관계 맺는 타자를 확장시키는 긍정적인 힘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