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30분. 아이폰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다. 졸린 눈을 비비며 켈로그 시리얼로 끼니를 해결한다. 곧장 욕실로 향해서 질레트 면도기로 면도를 하고 오랄-비로 이를 닦는다. 옷을 챙겨입은 뒤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현관을 나선다. 운동하는 동안에는 유튜브에서 추천해준 ‘조깅하며 듣기 좋은 플레이리스트’를 듣는다. 운동이 끝난 뒤에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서 오후 강의에 참석할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대학생의 일상을 간략히 옮긴 것이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는 우리가 의식하는, 혹은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선택과 고민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삼성과 애플, 아디다스와 나이키 사이에서 우린 고민에 빠지곤 한다. 혹은 버스를 탈 것인지 택시를 탈 것인지, 힙합을 들을 것인지 재즈를 들을 것인지 학생회관에서 정식을 먹을 것인지 일품을 먹을 것인지 등등. 기본적인 의식주를 포함한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현대 사회가 나날이 복잡해질수록 우리의 선택의 폭 역시 넓어지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의 선택은 일종의 경향성을 지니게 된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꼭 따뜻한 우유를 마신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복숭아를 먹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택시는 타지 않는 사람도 있다. 특정 브랜드를 선호하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브랜드 제품을 사용하는 부류도 있다. 개인의 선택이 지닌 일종의 경향성, 그것을 ‘취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취향’은 우리가 누구인지 설명해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취향 속에는 우리의 과거가 담겨있고 미래가 잠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지닌 가치관이나 성격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개인적 경험이나 소속 집단의 정체성, 문화적 전통이나 받아왔던 교육 등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되어 독자적인 취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취향은 우리를 설명하고, 우리는 취향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나 한 번쯤 의심해보아야 좋을 것이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정말 자신의 취향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가? 취향은 정말 개별적 주체로서의 우리를 설명할 수 있을까?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와 폭우처럼 쏟아지는 선택지들 속에서 개인과 개인의 취향은 이미 파괴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성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은 판단(判斷)과 분별(分別)이다. 두 단어에는 모두 칼(刀)이 숨어있는데, 이성이란 곧 ‘자르는(나누는)’ 힘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인류는 이성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통해 고도의 기술과 다양한 학문, 예술 체계 등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성은 끝없이 세상을 자르고 나누어 개념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화 과정의 본질은 ‘부정’이다. 데카르트는 끝없는 의심(부정)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립했으며 코페르니쿠스는 기존 체제와 대결하며 지동설을 주장했다. 물론 오로지 부정만이 이성의 특성인 것은 아니다.
나누고 구분하는 것 그 자체는 무의미한 기계적 행위에 불과하다.
무수히 쪼개진 개념들은 그것들 스스로는 어떠한 동력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무한 증식하는 암세포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듯이 말이다. 고전물리학을 완성한 뉴턴은 자신의 업적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덕분이라 말했다.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은 다시 이성에 의해 통합되고 관계지어짐으로써 동력을 지니는 것이다. 헤겔을 참조하여 말하자면, 그러므로 이성은 ‘사변적’이어야 한다.
나누는 동시에 통합하고 부정하는 동시에 긍정하는 것. 끊임없이 사유하고 활동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다.
그러나 급속도로 발전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성의 지위는 위태로워졌다. 때때로 대중들은 기술 발전을 이성의 발전으로, 혹은 지성과 이성을 같은 의미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과거보다 발전된 기술이 과거보다 더 나아진 이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의 발달 역시 인류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첨단 기술과 현대 사회는 오히려 이성을 위협하고 있다. 사람들의 암기력과 독해력은 나날이 퇴보해가고 기술과 기계에 대한 의존도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는 ‘반지성주의’라는 키워드가 세간의 화두가 되고 있다. 사회는 우리에게 생각을 강요하지 않을뿐더러 지성 자체를 거부하고 경시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술이 인간의 사유와 선택을 대신해준다. 이성으로써 이룩한 문명이 이성을 위태롭게 만드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하나로 연결된 세계 속에서 개인의 내적 사유는 도외시되고, 무분별한 정보들은 주관적인 판단과 선택을 가로막는다. 전체성 속에서 개별성이 붕괴해가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시스템 속 한낱 기계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기계 부품으로 전락해버리는 순간 우리의 시스템 역시 의미를 잃는다.
개별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전체성은 통합이 아닌 파괴에 불과하다. 이제 녹슬고 무뎌진 이성의 칼날을 다시금 새로이 벼려낼 때다.
지금부터 현대 사회가 개인의 자유로운 이성을 잠식해나가는 억압의 과정을 일상 속 ‘취향’의 관점에서 몇 가지 예시를 들어 고찰한 뒤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지녔던 마르쿠제를 참조하여 그러한 억압을 비판,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C(choice)가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삶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단어는 왠지 ‘주체적’인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모든 게 정해진 상황보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을 선호한다. 선택이라는 상황이 마치 자유롭고 주체적인 의사 결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 선택의 함정이 있다. 과연 인간은 항상 자유로운 주체이기를 바라는가? 가령 당신이 누군가와 점심 식사 메뉴를 정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양쪽 모두 마땅히 구미가 당기는 음식이 없어 좀처럼 메뉴가 결정되지 않는다. 당신은 모호한 교착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양식과 중식 중 어느 쪽이 좋으세요?’라고 물을 수 있다. 이런 양자택일 질문은 마치 상대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배려의 화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폭력(제한)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겉으로는 상대방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듯하지만 사실상 선택을 대신해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상대는 양식과 중식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신사적인 방식으로 강요받는다. 두 선택지에서 벗어난 다른 옵션을 제시하는 것은 당신의 배려라는 사회적 맥락으로 인해 은근한 저지를 받게 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렇게 대신 선택해주는 방식을 사람들은 제법 선호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몇 가지 선택지를 제안하는 것은 서비스 업계의 전통적 방식이다. 우리가 노골적 강요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처럼 자유로운 선택에는 피로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린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라는 당연한(그렇게 여겨지는) 사실보다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의 달콤함을 선택한다. 사회와 기업들은 점점 더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선택을 대신하며 가치를 창출하는 동시에 그들의 시스템을 더욱 견고하게 발전시켜나간다.
다국적 IT 기업들이 그러한 ‘대리 선택’의 대표 사례가 될 수 있겠다. 그들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말이다. 개인의 행동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행적을 토대로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프로그래밍을 통해 우리의 취향을 ‘만들어’ 준다. 가령 유튜브 알고리즘의 경우 이용자의 시청 시간, 간격, 선호 주제를 분석하여 자동으로 새로운 영상을 추천한다. 또한 축적된 이용자의 정보를 토대로 각기 다른 광고를 재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은 이용자가 어떠한 불편함도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오히려 알고리즘은 대중들이 유튜브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다. 최근에는 알고리즘에 의해 ‘발굴’된 영상이 폭발적 반응을 얻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 ‘알고리즘의 선택’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오랜 시간 ‘텔레비전’이 쥐고 있던 대중 매체의 패권은 위태로워졌다. 이제 더는 수목 드라마를 시청하기 위해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저녁 10시를 기다린다거나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기 위해 몇 분씩 채널을 돌릴 필요가 없다. 우린 그저 침대에 누워서 빅 데이터와 프로그램이 손수 선택하고 요약해준 우리의 취향을 즐길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유튜브 알고리즘은 ‘대리 선택’을 통해 우리의 선택 자체를 제거해버린 것이다. 또한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들의 길이는 대부분 10분에서 30분 정도의 압축된 영상물들이다. 세 시간짜리 장편 영화는 10분짜리 영상으로, 드라마는 1분짜리 클립으로 제공된다. 이용자들은 그런 단발적 콘텐츠에 익숙해졌기에 길고 복잡하거나 유행에 맞지 않는 콘텐츠들은 좀처럼 살아남기가 힘들다. 마음에 들지 않는 콘텐츠에는 ‘추천하지 않기’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다음부터는 자동으로 그와 유사한 콘텐츠들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은 이용자의 선택을 제거할 뿐 아니라 데이터의 범위까지도 한정하는 것이다. 유튜브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들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 짧고 빠른 콘텐츠에 대한 수요로 인해 세계 최대 OTT 플랫폼인 넷플릭스에서는 자체 배속 시스템을 도입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게임은 외면받고, 캐릭터가 스스로 사냥하고 성장하는 방식의 게임이 인기를 끈다. 각종 뉴스 역시 정확성보다는 간편성에 치중하고, 사람들은 뉴스를 보는 대신 뉴스를 키워드로 대강 요약해주는 채널들을 본다. 이러한 세태를 그저 편리성이나 개별성과 같은 키워드들로 뭉뚱그려 설명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자동으로 신속하게 처리되는 시스템과 신속하고 단발적인 콘텐츠들 속에서 인간의 깊고 진중한 사유가 끼어들 틈은 점점 더 협소해져만 간다. 다양한 정보들을 접하며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세계관을 발전시켜가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에 불과한 편협한 정보들을 무의식적으로 소비하며 개별성을 잃어가는 것이다. 우린 그저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손가락만 까딱까딱 움직일 뿐이다. 마치 자그마한 어항 속을 반복해서 맴돌며 먹이만을 기다리는 금붕어처럼, 우린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취향’이라는 어항 속에서 영양가 없는 정보들을 받아먹을 뿐이다.
‘만들어진 취향’을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예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몇 해 전부터 급속도로 유행하고 있는 ‘오마카세(お任せ)’ 문화이다. 오마카세는 ‘맡기다’라는 일본어 마카세루(任せる)의 명사형 마카세(任せ)앞에 존중 어미 오(御)를 더한 단어이다. 직역하면 맡김, 맡긴다 등으로 해석되는데 주로 일식, 특히 스시야(초밥 전문점)에서 손님이 메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주방장이 직접 메뉴를 선택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러한 방식이 인기를 끄는 이유에는 특유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나 방식 자체의 신선함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선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도 있다. 최근 많은 분야에서 ‘사용자 친화’라는 흐름에 따라 복잡한 전자기기 설명서나 혼란스러운 식당 메뉴판은 사라져가는 추세이다. 고객을 대신해서 각종 제철 재료들로 코스를 구성해주는 오마카세 방식은 그러한 흐름과 무척 잘 부합한다. 오랜 경험과 전문 지식으로 숙련된 주방장은 마치 유튜브 알고리즘처럼 고객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쩌면 오마카세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인 운영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 우리의 취향이 설 자리는 없다.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은 곧 선택을 회피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선택하지 않는 자는 사유하지 않는 자이다. 그리고 사유하지 않는 자는 노예에 불과하다. 노예에게는 어떠한 취향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주인이 주는 것만을 받을 뿐이다. 가장 경계해야 하는 순간은 주인이 제공하는 것들에 노예가 감사하고 만족하게 되는 순간이다.
오늘날 시스템은 우리가 즐길 콘텐츠를 추천해주고 먹을 메뉴를 골라주며, 들을 음악이나 입을 옷까지도 선택해준다. 이러한 사실을 비판적으로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시스템이 만들어준 취향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과연 그것을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취향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취향의 종말은 곧 개별성의 소실로 이어진다. 편리함과 단순함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우리가 지닌 자유로운 이성을 속박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같은 행위이다. 물과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자유를 위해 지금껏 그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잊어선 안 된다. 또한, 인류가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판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이성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취향의 종말’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유튜브 알고리즘처럼 자유로운 선택을 방해하는 시스템을 모두 파괴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앞서 예시로 들었던 ‘오마카세’, 그 이전의 방식이자 그것과 대비되는 개념인 ‘오코노미(お好み)’에서 해답을 찾고자 한다. 오코노미(お好み)는 ‘좋아하는’이라는 뜻으로 ‘취향’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기존의 스시 전문점들은 오코노미, 즉 손님이 좋아하는 것을 직접 고르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오마카세 방식은 1963년 긴자의 천재 셰프 후지모토 시게소우에 의해 처음 등장했는데, 그 시작은 고객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의 오마카세는 매너리즘에 대한 돌파구이자 새로운 시도였다. 그렇다면 당시의 오마카세와 오늘날의 오마카세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오코노미’의 부재이다. 과거의 오마카세에서 요리사는 고객의 취향에 따라 다른 재료를 선택했고, 고객의 식습관이나 요구를 유동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코스를 즐기는 고객들 역시 자신만의 취향이 확립된 이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는 오마카세는 값비싼 과시용의 코스 요리에 불과한 경우가 대다수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모르는 고객들에게 질 낮은 재료로 비싼 값을 받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 정립한 견고한 취향이 우선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도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견고한 취향의 확립은 비판적인 사유를 통해 가능하다. 비판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며 깊은 사유를 통해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개별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성은 사변적이어야 한다.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무차별성과 자신만의 기준에 따르는 개별성은 통합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 갇힌 자는 독단적이고 유아적인 존재일 것이다. 세상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기는 자는 개별성을 잃고 말 것이다.
세상 속에 존재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진정한 의미에서의 취향이자 자유인 것이다.
<일차원적 인간>에서 마르쿠제는 현대 사회가 ‘전체주의화’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개인은 무분별한 정보들을 별다른 사유 없이 받아들이고 세계는 정치, 경제적으로 동질화되었다. 이는 지금껏의 논의와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경향을 ‘기만적 자유’와 ‘거짓된 욕구’에 대한 추구로 정의했다. 즉 우리는 사회적 세력이 부여한 욕구에 따라 움직이며 한정적인 충족에 만족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이다. 오늘날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과 시스템은 그러한 ‘노예제도’를 더욱더 은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준다.
“모든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이 명제는 먼 과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인류가 도달한 해답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자유가 인간이 만든 시스템에 의해 손쉽게 억압당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억압의 근본적 원인은 기술에 대한 맹신과 자유에 대한 안일한 태도다. 소리 없이 시스템에 잠식한 억압은 표면적이고 폭력적인 억압보다 더욱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르쿠제는 체제에 대한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 나름의 방안 역시 제안했다. 그는 불필요한 억압과 도구화되는 이성에 대한 저항인 ‘위대한 거부’를 원동력으로 삼아 인류가 억압된 현실을 극복하고 완전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했던 유토피아적 세계의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 비판적인 이성이 세계를 극복하고 발전시킨다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조리한 존재가 아닌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탄생하고, 뜻하지 않게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 ‘삶과 죽음’이라는 태생적 억압을 품은 우리가 자유를 찾을 방법은 온몸으로 그것을 거부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거부는 비판적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생각하기를 멈추는 자는 그러므로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린 세상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취향을 따르는 동시에 그것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반복되는 선택의 순간들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유는 안락함과 편리함이 아닌 끝없는 저항과 의심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다.
‘취향’이라는 단어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그것이 이 논의의 출발점이었다. 정작 나 자신이 매우 구체적이고 까다로운 ‘취향’의 소유자임을 자부하면서도 말이다. 나의 기호는 과연 온전히 나의 것인가. 나이키 운동화를 좋아하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일까 그저 나이키라는 대기업이 지닌 헤게모니를 추종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나이키를 신지 않는 것 역시 그러한 헤게모니에 대한 반작용일까. 가령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는다거나 유명한 가수는 듣지 않는다는 사람들처럼. 그런 끝없이 꼬리를 무는 의문들 틈에서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과 헤겔의 변증법적 세계관과 자유 개념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혹자는 마르쿠제의 주장이 지니는 사상적 경향성에 대해 불편함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그의 사상이 폭력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있다는 식의 비판도 따를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참조하고자 했던 것은 이성이 도구화돼가는 ‘전체주의화’ 사회에 대한 비판과 ‘위대한 거부’가 지닌 원동력으로서의 성격에 한정한다. 본문에서 직간접적으로 언급된 ‘타자 속에서의 자유’는 따로 부연하지 않았으나 헤겔의 자유 개념을 참조했다. 억압의 사례로 든 유튜브와 오마카세의 예시가 지나치게 지엽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취향’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예시로써 택했기에 불가피한 논의였다고 생각한다.
‘취향의 종말’로 대표된 억압을 극복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는 ‘끝없는 의심’이라는 다소 모호한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문제 속에 답이 있다는 뻔한 얘기다. '자기의식에 대한 논의'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순환의 오류(독일 관념론이 지닌)일지도 모른다. 의심하지 않았기에 억압받게 되었는데, 의심함으로써 극복하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 결론이 개인적으로는 썩 마음에 든다.
'철학적 사유'란 마치 산을 오르는 일과 같나 보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인고의 시간을 들여 굳이 하니까. 정상에 올랐든, 도중에 포기했든 결국에는 내려와야 하고. 결국 이러나저러나 나의 위치는 단단한 지면인 것도 똑같다. 그러나 산을 오르기 전과 후의 나는 분명 완전히 다른 존재다. 마찬가지로, 사유는 나를 잠시간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 준다. 그것이 자유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끝없는 의심과 선택의 과정에 진정한 자유가 깃들 수 있음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다만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