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회화론과 존재론
질 들뢰즈는 20세기를 풍미한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등을 연구 및 재해석하며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나갔다. 그의 연구 분야는 철학뿐만 아니라 문학, 영화, 예술 분야를 포괄한다. 들뢰즈는 지식인이자 교수, 작가인 동시에 열렬한 좌파 운동가이기도 했다. 주저로는 가타리와 함께 집필한 <안티오이디푸스>, <차이와 반복>, <감각의 논리>, <천 개의 고원> 등이 있다. 미셸 푸코, 사르트르 등과 더불어 다양한 사회 운동들에 열정적으로 참가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 한 사람이자, ‘차이와 생성의 철학자’라고도 불리던 들뢰즈는 1995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며 생을 마감했다.
들뢰즈의 다양한 연구들 중 가장 주요한 개념은 ‘차이’이다. ‘차이’ 개념은 초기 들뢰즈의 가장 주요한 철학적 테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동일성’과 ‘차이성’이 지닌 억압적 관계를 전복하고자 했다. 본문에서는 들뢰즈의 ‘차이’ 개념이 탄생하게 된 사상적 배경을 확인하고, 그것을 다시 철학적·미학적 관점에서 탐구하도록 하겠다. 최종적으로는 들뢰즈의 ‘차이’가 오늘날에 어떻게 유효하게 작용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고자 한다.
-동일성의 지배
들뢰즈는 1925년,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독일군의 점령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시기에 그의 형은 레지스탕스 활동 중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가는 열차에서 사망했다. 많은 철학자들이 유년기의 경험을 반석으로 삼아 사상을 전개해나갔다. 어쩌면 들뢰즈 철학에 만연한 억압과 권력, 체제를 향한 적개심은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들뢰즈의 주된 관심사였던 ‘차이’ 개념 역시 그의 자유롭고 저항적인 기질을 잘 드러낸다. ‘차이’와 ‘동일성’의 관점에서, 나치의 폭정은 본질적으로 ‘나’와 ‘너’의 대립으로 규정된 폭력성으로부터 출발했다. 그것은 ‘대립’으로써 차이를 무화시키는, 동일성에 의한 지배인 것이다. 지난 수천 년간 서구를 지배해왔던 선험적 이데아론에는 강압이 내포되어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강압으로부터 탈피하고, 오랜 시간 소외받던 개념들을(차이, 감각, 신체 등과 같은) 새로이 ‘생성’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베르그송, 그리고 니체 사상을 계승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신’을 거부함으로써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원리를 부정하고 끊임없는 순환과 생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신’에 대한 부정이란 곧 ‘절대성’에 대한 부정과도 같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불가피하게 칸트로부터 비롯되어 헤겔에 이르러 완성된 ‘독일 관념론’과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칸트와 헤겔의 테제였던 ‘선험적 종합 판단은 가능한가?’ 라는 질문, 혹은 ‘역사란 절대정신의 현현이다’ 와 같은 전통 철학의 대답들은 들뢰즈가 뛰어넘고자, 전복시키고자 했던 것들이다. 다시 말해 들뢰즈에게 있어서 전통적 형이상학이 주장하는 ‘동일성’이란 가상의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용인하는 언어나 규범, 이성의 작용은 ‘공유된 동일성’에 불과하며 절대성을 지니지 않는다. ‘공유된 동일성’은 말하자면 ‘차이’를 지워내는 폭력의 과정이다. 들뢰즈는 동일성에 의한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므로 '차이'란 들뢰즈가 선택한 혁명의 수단이다.
1) 오직 차이만이 존재한다
로마의 학자 폴리니우스는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세상에 완전히 동일한 두 개의 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뜻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주장이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특히 ‘공유된 동일성’의 사고를 할 때,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의자, 사과, 나무와 같은 단어들은 모두 ‘공유된 동일성’으로부터 비롯된 단어들이다.
우리는 ‘사과나무’라고 정의된 종자에 열리는 모든 열매들을 ‘사과’라고 부른다. 가령 당신이 과일가게에 가서, 사과 하나를 달라고 한다면, 주인은 보기 좋은 사과를 하나 집어서 당신에게 건넬 것이다. 과연 당신이 받은 그것은 ‘사과’인가? 어쩌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과라고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동의해야만 한다. 당신이 받은 사과에 조금 흠이 났다거나, 크기가 작다거나, 당도가 조금 떨어진다고 해도 그러한 ‘차이’들은 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것은 ‘사과’일 수 있다. 우리는 ‘사과’라는 개념을 ‘동일성’으로만 이해하지만, 그것을 동일성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차이’들을 부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들뢰즈에 따르면, 그러한 동일성의 방식으로 이해된 개념은, 결코 대상의 본질을 포착할 수 없다. 결국 동일성이라는 개념은 대상의 외부로부터 위계적으로 주입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동일성에 의한 지배’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는 이 세계에는 오직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차이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다만 사실 그대로를 증언한 것뿐이다. ‘동일성’이란 결국 인간의 이성이 세계를 객관화하고 판단하기 위한 하나의 척도일뿐, 그것이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차이의 철학은 차이에 의해 세상을 바라본다. 모든 것은 차이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해된다. 흡사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대상에도 차이는 존재한다.
인간의 눈에는 단단하게 굳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리창이,
수천 년 수만 년의 세월 동안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는 것처럼.
정지된 듯 보이는, 동일한 듯 보이는 것 속에서도 자그마한 변화가 존재한다. 들뢰즈는 그러한 차이를 ‘미분적 차이’라고 말한다. 미분적 차이는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자, 가장 작은 힘이다. 그리고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힘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미분적 관계’ 속에 살아가게 된다. ‘차이’는 모든 존재자 속에 존재하는 가장 보편적 개념이다. 앞서 언급했듯,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는 ‘차이’를 내포한다.
‘동일성’이 대상의 차이를 무화하여 자신의, 혹은 어떤 범주의 지배 아래에 두는 위계적 질서라면 ‘차이’는 대상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미소한 ‘힘’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순환적이고 자유로운 질서이다. 물론 ‘동일성’의 질서에도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동일성의 차이는 종차나 대립 등의 방식에 의한,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차이’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만들어진 차이가 아닌 ‘만들어가는 차이’, 즉 ‘생성하는 차이’이다. 모든 존재자는 무수히 많은 미분적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내부로부터 차이를 생성해낸다.
들뢰즈는 이를 ‘강도(intensity)’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강도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강도란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외력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뻗어나가는 내력이다. 그것은 동일해 보이는 것을 내부로부터 초과하여, 스스로 만들어내는 차이이다. 생물학적 분과나 이름, 국적이나 직업과 같은, 형식적인 외력들이 아닌 내부로부터 작용하는 힘에 의한 차이. 즉 들뢰즈에게 ‘생성하는 차이’란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운동성’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들뢰즈의 ‘차이’는 대상에 존재론적 일의성을 부여한다. 이는 기존의 존재론, 무수히 많은 범주나 개념에 의한 다의적 존재론과는 궤를 달리 하는 새로운 존재론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운동성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기존의 존재론이 대상을 고정시키고,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식이라면 들뢰즈의 일의적 존재론은 형식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운동학적 관계들이다.
들뢰즈의 존재론을 회화적 관점에서 비유하자면, 기존의 존재론이 전통 회화가 추구했던 형식적인 풍경화의 형태라면 ‘차이’에 의한 존재론은 인상주의가 추구했던 무수한 반복과 파괴에 의해 포착된 회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지금부터 ‘차이’를 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하겠다.
2) 사과와 베이컨
상징주의 미술의 거장 모리스 드니는 인류 역사를 바꾼 세 개의 사과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이브의 선악과이고, 두 번째는 뉴턴의 사과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폴 세잔의 사과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인류에게는 스티브 잡스의 사과가 더욱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겠지만 말이다.
폴 세잔은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전통적 회화로부터 탈피하여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다. 인상주의가 대두되기 전, 르네상스 이후 예술계를 지배하던 질서는 ‘원근법’이었다. 원근법은 캔버스에 공간감을 부여하며, 마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과 같은 효과를 주는 기법이었다. 당시 화가들은 더욱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를 통해 현실을 ‘재현(representation)’해냈다. 당대의 '예술'은 '완벽에 가까운 재현'이었다.
인상주의는 그에 대한 반발로써 대두된 사조였다. 그들에게 ‘재현’이란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아닌, 흉내내는 것에 불과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대상의 상태가 아닌 본질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들은 하나의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했고, 반복해서 그렸다. 세잔이 정물화의 모델로 ‘사과’를 선택한 것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사과는 잘 썩지 않고, 단단했으니까.
들뢰즈는 ‘동일성’의 논리를 ‘재현’의 문제와 연결짓는다. 그에 따르면, ‘재현’은 기계적인 과정에 불과하며 대상의 본질을 포착해내지 못한다. ‘재현’은 ‘동일성’에 기반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원근법에 의한 회화는 정지된 관점에서, 정지된 세계를 보이는 대로 담아낸다. 대상을 ‘보이는 대로’ 담아내는 것은 언뜻 대상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그것은 단지 그 시점과 시간에서 ‘공유된 동일성’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은 강압적으로 개념화되고 고정되어, 그림 속에 갇혀버린다. 들뢰즈에 따르면, 전통적 회화에서 화가는 단지 ‘기술자’에 불과하다. 화가와 작품은 어떠한 유기적 관계도 맺지 못한다. 화가는 그저 고정된 시공간에서 인간의 눈에 보이는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담을 뿐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창조가 아닌 재현에 불과하다. 대상을 본질을 포착해내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힘이 아닌 내부로부터의 힘을 포착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형식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운동 말이다.
예술이 단지 재현이 아닌 창조가 되기 위해서는 내부로부터 창조되는 ‘차이’를 포착해내야만 한다.
폴 세잔의 정물화는 그러한 ‘차이’를 추구했던 매우 중요한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정물화는 ‘정물을 위한 정물화’였다. 세잔은 사과 하나를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그렸다. 그는 여러 각도와 구도에서 사과를 바라봤고, 자신이 포착한 다양한 상(像)들을 하나의 화폭에 동시에 담아냈다. 그 모든 장면들을 한번에 그려내야만 사과의 본질을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정물화에서 전통적 구도는 무시되고, 사과의 형태는 일그러졌다. 단순히 사과의 상(像), 즉 ‘그림자’를 담아내는 것이 아닌, 본질을 담아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를 들뢰즈적 관점에서 평하자면, 세잔은 기존의 전통적 이데아론이 진리를 포착하고자 했던 방식-‘그림자’를 탐구하여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으로부터 탈피하고 끝없이 생성되는 ‘차이와 반복’에 의해 본질을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잔의 정물화’는 들뢰즈의 존재론을 제법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들뢰즈는 대상을 하나의 독립체로 바라보는 대신, 대상과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관계’ 속의 일시적 배치로 바라보았다. 존재들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존재를 둘러싼 관계들은 계속해서 생성되고 재정립된다. 마치 세잔의 정물화처럼, 들뢰즈가 바라본 세계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해서 운동하고 있으며 제각각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세한 차이를 포착하기 위한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 원동력을 얻는다.
인상주의는 ‘재현’을 뒤흔들었고, 그 자리에 ‘감각’을 가져다 놓는다. 현대 미학에서 들뢰즈는 수천 년 동안 등한시되었던 ‘감각’의 지위를 복원한다. 감각은 들뢰즈에 의해 존재론적으로, 유물론적으로 다루어진다. 감각에 의해 사과는 개념에서 벗어나 현재의 감각을 바탕으로 유일무이한 실존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세잔의 ‘사과’가 형상의 본질을 찾아내는 과정 속에서 ‘재현’의 지위를 위협했다면,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는 ‘재현’에 대한 완전한 전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세잔은 기존의 재현 미술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 세잔은 대상들을 형상화했고, 서사를 배제하는 식으로 본질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형상화된 대상들은 여전히 원, 원뿔 원기둥과 같은 ‘기하학’에 기초한 형태였다. 기하학은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전통적 관점이다. 반면 베이컨의 작품 속에서 인물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다.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베이컨의 작품에 대해 “그의 초상화가 추구하는 것은 얼굴을 해체하여 그 밑에 숨겨진 머리가 솟아나도록 하거나, 다시 찾는 것”이라고 평한다. 과거의 회화가 대상을 화폭에 담아내는 ‘재현’의 과정을 통해 본질을 포착하고자 했다면, 베이컨의 회화는 대상을 ‘파괴’하는 과정이다. 익숙한 것, 규범화된 것, 전통의 것들을 파괴한 자리에 진정한 본질이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클리셰’를 파괴한다. 들뢰즈는 언제나 ‘클리셰’와의 투쟁을 통한 새로움을 강조한다. 그의 관점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는 세잔의 회화보다 더욱 감각적이고, 새로운 것이다.
<감각의 논리>에서 들뢰즈는 “현대 회화는 화가가 그의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화폭 위에 잡아버리는 사진들과 이미 고정적인 것들에 의해 침범당하고 포위되어 있다”고 평했다. 전통적 이데아론의 지배하에서 우리가 ‘사유의 이미지’에 갇혀버린 것처럼, 회화 역시 르네상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형상 그 자체를 거부한 ‘추상회화’ 역시, ‘기존의 미술체계’에 대한 거부로써 탄생한 것이라면, 그 역시 르네상스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이컨의 회화는 전통적 구상회화도 아니고, 본격적인 추상회화도 아니다. 들뢰즈는 몬드리안이나 잭슨 폴록의 추상회화와 베이컨의 회화를 구분한다.
몬드리안과 잭슨 폴록의 추상회화는 감각을 정화하고 탈물질화하여 순수한 시각적 코드로 환원시키거나(몬드리안), 혼돈을 화면 전체로 확장시켜서 시각적인 것의 포기와 더불어 전적으로 손에 의지하는(폴록) 쪽으로 발전해버린 것이다. 어쩌면 들뢰즈는 그들의 회화가 본질을 포착하는 데에는 부족하다고 여길 것이다. 단순한 코드나 불규칙한 혼돈 속에 깃든 의미는 감각을 통해, 신체를 통해 포착해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추상회화의 목적이 ‘형태의 전복’ 그 자체라면, 베이컨의 회화는 ‘힘’과 ‘감각’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들뢰즈는 베이컨이 택한 회화의 길을 형상의 새로운 길로 제안한다. 그것은 코드로 축약되지도, 혼돈으로 빠지지도 않는, ‘뼈대와 살’의 적절한 조화이다. 베이컨은 모델을 그리다가 갑작스럽게 배경을 바꾸거나 형태를 일그러뜨리는 등으로 대상을 고정된 의미로부터 탈취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회화는 판단체계를 넘어서고, 감각 그 자체가 된다. 회화는 ‘감각’으로 향하는 길이다.
오직 감각에 의한, 신체에 의한 체험만이 진정한 본질적 경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
지금까지 들뢰즈의 ‘차이’ 개념과 <감각의 논리> 속에 서술된 회화 개념을 통해 그가 어떤 방식으로 ‘기존의 것’들에 대항하여 사상을 전개해나갔는지, 회화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들뢰즈가 기존의 회화들을 대한 방식과 그가 제안했던 앞으로의 회화는 그가 기존의 철학을 대하고,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던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결국 모든 것들은 언젠가 클리셰가 된다. 그것은 어떠한 새로운 이론도, 이미지도, 철학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이성이 지닌 완전무결함은 고정관념이 되었고, 인간중심을 외치던 르네상스의 예술은 단순한 기술로 전락했다. 어쩌면 ‘의미’란 고정되어 있는 무언가가 아닌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하나의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들뢰즈는 말한다. 대상을 개념화하고 규정하는 것은 의미를 포착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러한 억압의 과정은 오히려 대상이 지닌 진정한 차이를 무화시킬 뿐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단지 나와 너는 다르다고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의 끊임없는 변화, 그 변화의 반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하고, 너는 저러하다. 우리는 이런 ‘동일성’의 사고방식으로 서로를 구분하며 상대를 다 이해했다는 착각을 한다. 우리는 ‘차이’에 불과하다. 동일성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 서로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은 약간의 안도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동일성의 울타리는 허상일 뿐이다. 들뢰즈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안락한 동일성의 세계를 과감히 전복시킨다. 그리고 그는 제안한다, 우리의 손과 눈으로, 직접 감각하는 세계를. 끝없는 관계와 사건들 속에서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세계.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고, 어쩌면 ‘나’조차도 무한한 차이를 생성하며 살아가는 세계. 그 어떠한 구속도 없는 그런 세계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좀더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들뢰즈 철학이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것은, 그의 철학이 지닌 '끊임없이 변해가는 힘'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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