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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하 Mar 06. 2022

자연은 카뮈의 민들레를 무심히 가져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발견한 카뮈의 사랑

1. 4년 만에 날아온 민들레 홀씨


나는 언제부터 책을 열심히 읽었을까. 14살 때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기숙사 살면서 여러모로 많은 변화의 시간을 갖고 있는 고2 나에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책을 추천해줬다. 처음 읽고 나서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 책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그 소설을 아주 여러 번 읽게 되었고 소설의 무심한 문장과 단순한 표현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분위기에 담긴 카뮈의 생각을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독서 활동을 해왔다. 나의 독서의 시작은 그렇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어떤 체계를 믿을 만큼 충분히 이성을 믿지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모럴이다.”

-알베르 카뮈, 인터뷰


카뮈 본인은 자신이 적어내는 것들이 철학이 아닌 감성에 가깝다고 얘기한다. 애초에 똘똘 뭉쳐진 이성으로 무언가 서술할 만큼 이성을 신뢰하지도 않는다며,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은 어떤 부조리한 ‘감성’을 이야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럴. 뭐.. 철학이든 감성이든 모럴이든, 카뮈의 생각은 1단계 ‘부조리’, 2단계 ‘반항’, 3단계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과거의 나는 카뮈의 1, 2단계의 생각이었던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과 반항하는 삶에 대해 공감하며 카뮈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나는 카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삶이 이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럼에도 그 부조리를 악착같이 지탱하고 반항하면서 사는 것은 알겠는데... 과연 그렇게 평생을 살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느 순간 지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다시 온 탈진과 좌절 앞에서 나는 또다시 일어나서 이겨내야만 하는 것인가... 어휴 생각만 해도 막 온몸이 저리고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3단계 사랑’이 뭔지 너무너무 궁금했다. 근데 그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카뮈가 그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이전에 너무나 부조리하게도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포기했다.


그렇게 어느새 4년이 흘렀다. 카뮈가 말하려 했지만, 이 세상에 남기지 못하고 떠난 사랑에 대한 개념을 포기하고 4년이다. 그러다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카뮈의 ‘사랑’이 뭔지 드디어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설령 아닐지라도 내가 받아들이기엔 그렇다.)


‘민들레 법칙’이었다.




2. 자연은 눈을 감고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의 제목이 이상하다. 물고기가 없다니. 시적인 표현인가. 시적인 표현이라고 한다면 굉장히 느낌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는 자신의 순간적인 실수로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졌다. 그리고 좌절했다. 그리고 이런 좌절 속에서도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는가. 그녀는 그 남자에게 끊임없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언젠가 이 좌절 속에서 재결합이라는 희망적인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다시 땅을 짚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의 심리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모럴을 찾으려고 했다. 그렇게 발견한 인물이 스탠퍼드 초대 총장을 지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었다.


언젠가 지구 상에 발견된 전체 어류의 5분의 1이 조던과 그의 연구진이 발견한 어류 종일 때도 있을 정도로 어류의 분류학에 깊게 파고든 그의 인생에는 실패가 없었다. 그가 모은 수천 개의 어류 표본이 캘리포니아를 뒤흔든 지진에 모두 깨져버렸을 때 그는 주머니에 있던 바늘과 실로 바닥에 떨어진 표본들을 주워 며칠 동안이나 꿰맸다. 자연은 악의 없이 혼돈을 선사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무너진 탑을 처음부터 다시 쌓았다. 그러니 실패라는 게 있을 수가. 어째서 조던이 모든 걸 포기하고 좌절하지 않는가를 탐구하던 작가는 그에게서 그릿(grit)을 발견했다.


“그릿은 (...)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해나갈 수 있는 능력, (...)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143쪽


다윈 이전의 생물 분류학계에는, 진화의 역사 속에 어떤 신의 고고한 의도가 숨겨져 있으며 그 속에서 인간은 도덕률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파가 있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다윈의「종의 기원」을 통해 처참히 망가지게 된다. 다윈은 진화가 우연한 변이에 의해 진행되며 ‘신의 계획’ 같은 것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없다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조던은 다윈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신의 계획’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도, ‘시간’이 생물의 진화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나간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도덕적으로 더 진화된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그렇게 그는 불임화라는 유전적 정화를 통해 인류를 더 좋은 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맹렬한 우생학자가 된다. 그리고 우생학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의 파도 앞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견지해나가는 ‘그릿’을 보여준다. 그가 생을 마감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윈의 실제 주장과 조던이 다윈의 주장을 이해한 바는 근본부터 다르다. 다윈은 자연 속에서 생물의 계층을 결정하는 규범 같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진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우수한 생명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다. 우생학자들은 우수한 유전자들끼리 교배를 하여 유전적 정화 과정을 통해 더욱 우수한 종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지만, 다윈의 관점에서 이는 오히려 한 종의 멸망으로 다가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유전적 단일성은 혼돈으로 가득한 자연 속에서 종을 지켜낼 수 없다. 유전적 정화는 무슨! 다윈은 순전한 우연성의 산물인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자 풀의 다양성을 오히려 찬양했다.


결국 다윈은 자연 속에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다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것이다. 자연은 비약하지 ! 다만 변화할 . 자연은 인간의 사사로운 사정 따위는 안중에 없다. 인간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의 수준, 선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완전히 무심하다. 자연은 자연이다. 자연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목적으로 과학과 이성으로 똘똘 뭉친 방법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고자  ,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는 허망함뿐이다.


생명체 사이에 계층이 있다는 믿음을 끈질기게 증명하고자 수천 종의 어류를 모아 연구했던 어류학자 조던은 1913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그의 일생은 1980년대에 자연의 무심함 속에서 부정당했다. 실제로 ‘어류’라는 분류는 없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자연이 조던의 우생학을 인과응보, 혹은 권선징악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의 연구들을 부정한 걸까. 아니, 자연은 그저 눈을 감고 있었고 지금도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3. 민들레 법칙


자연은 무심했다. 적어도 자연 속에는 그 어떠한 계획도, 의도도, 가치판단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이 우주 속에서 어떤 의미 혹은 독보적이고 특별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래 알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잠깐 한숨처럼 없어지기 마련인 하찮은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살아 숨 쉬어야 하는 걸까. 정말 우리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은 걸까.


“말하자면 지금도 애나는 메리의 그네를 밀어주고 있는 셈이다. 이 지구에서 자신이 뽑아낼 수 있는 소박한 기쁨들-중력, 아이스티, 햄스터-로 메리에게 설렘과 기쁨을 안겨주려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224쪽


작가는 우생학자들에 의해 유년기에 불임 수용소에 갇혀 살다가 불임 수술을 당한 애니와 메리를 만난다. 이들은 지금까지 함께 서로한테 의지하며 한 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었는지를 물어보는 질문에 대해 이들은 서로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들은 서로를 빈틈없이 돌보며, 서로에게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민들레 법칙. 누군가에게는 잡초, 누군가에게는 약초, 누군가에게는 염료, 누군가에게는 예쁜 꽃반지... 하찮은 민들레는, 하찮은 모래알은, 하찮은 인간은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하찮은 애니와 하찮은 메리는 서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다. 우리는 자연 앞에서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 모르겠으나, 서로에게 소중하다.




4. 카뮈에게 민들레는 잡초였을까, 약초였을까, 예쁜 꽃반지였을까.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 「시지프 신화」, 49쪽


만물에 대해 편견도 없고, 무심하고, 가장 정 없이 눈을 꼭 감은 듯 내려치는 자연의 평등성을 인식하는 과정을 담아낸 이 물고기 책은 카뮈가 말하던 ‘부조리’의 개념과 매우 비슷하다. 과학적 세계관으로 점철된 합리성 중심의 세계는, 진화 속에 어떠한 일반성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증명해내기 위해 한평생 어류를 채집해 연구하던 한 어류학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가 마주한 것은 그의 모든 믿음을 철저히 파괴하려는 자연의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절대와 통일을 향한 나의 열망과 이 세계를 합리적이고 순리적인 원리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불가능성, 이 두 가지 확신을 서로 타협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안다. (...) 나에게 그처럼 분명하게 나타나 보이는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적대적인 것일지라도 지탱해야 한다.”

- 「시지프 신화」, 49쪽


카뮈는 이와 같은 세계의 현실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시절,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이 세상은 본체 불합리하게 생겨먹었으며, 그런 불합리한 세상을 가장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성 또한 원래 인간이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이다. 가장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두 본질적인 특성이 서로 모순되는 상태, 그것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였다.


부조리는 결국 ‘인간’이 ‘세상’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어느 두 아이가 싸우면 그 싸움을 끝내는 방법은, 한 아이를 다른 방으로 옮기거나, 다른 한 아이를 다른 방으로 옮기거나... 부조리를 해소하는 방법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인간’을 없애거나, ‘세상’을 없애거나. ‘인간’을 없애는 것은 육체적 자살이요, ‘세상’을 없애는 것은 철학적 자살이었다. 조던은 이해될 수 없는 자연을 “믿음”으로 관철하며 철학적 자살을 행하였고, 그로 인해 세상의 부조리 자체는 해소하였지만, 결코 진실에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우생학을 평생 지지하게 된 것이다.


“나는 시지프가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 「시지프 신화」, 182쪽


앞서 설명한 부조리는 화해될 수 없는 두 대립항의 영원한 대결, 그걸 인식하기 위한 명철한 긴장감 속에서 우리에게 드러난다. 그리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고,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구한 의식적 상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부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지겹도록 대립하는 두 원수들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끊임없이 반항해야 한다. 자신이 다시 돌을 굴려 올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돌을 굴려 올리기 위해 터벅터벅 내려가는 시지프처럼 말이다. 어찌 보면 조던이 보여줬던 ‘그릿’이, 그가 부조리를 포기하기 위한 방향으로 쓰이지 않고, 오직 부조리를 치열하게 지탱하며 반항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면... 카뮈가 생각하는 시지프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자비한 캘리포니아의 지진 앞에서, 박살 난 수천 개의 표본들을 주머니의 바늘로 하나하나 다시 꿰어 맞추는 그의 모습. 심지어 좌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조리를 인식하는 과정을 포기했고, 오직 자신의 ‘믿음’을 견지하기 위해 그릿을 행했다.


하지만 여기서 4년 전의 나는 포기했다. 나는 육체적 자살도 싫고, 철학적 자살도 싫고, 부조리를 인식하면서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는 싶은데... 그러려면 저렇게 힘겹게 매 순간 나의 의식으로 투쟁하면서 살아야 한다니. 말만 들어도 지친다. 그래서 나는 도피했다. 습관적인 권태의 일상으로. 부조리를 명철히 의식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카뮈의 표현을 빌리자면 ‘연극’적 삶 속으로.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이 세계 안에서 인간적인, 오직 인간적인 것에 불과한 것은 무엇이든 보다 뜨거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어째 깨닫지 못하겠는가. (...) 인간들 상호 간의 지극히 강하고 수줍은 우정,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젠가 소멸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시지프 신화」, 136쪽


메리와 애니의 관계에서 물고기 책의 작가가 깨달은 민들레 법칙. 카뮈가 미처 세상에 남기지 못하고 떠난 그 3단계, 사랑의 가치. 4년 만에 나는 바람을 타고 떠난 민들레 홀씨를 우연히 찾았다. 그리고 그제야 카뮈가 줄곧 ‘사랑’의 귀결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카뮈는 ‘언젠가 소멸해 버릴’ ‘인간들 상호 간의 지극히 강하고 수줍은 우정’을 말하고 있었다. 무자비하고 무가치한, 눈을 꼭 감은 이 세상 앞에서 의미를 갖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언젠가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마주하게 될 부조리한 인간 중 하나인 내가 매일을 태우며 살아갈 만한 이유.



우리가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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