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의 끝에서 드라마 세버런스를 생각하며
연휴의 마지막 날엔 이상하게 잠이 안 온다.
항상 그랬다. 하루 이틀이면 덜하겠지만 이번 설처럼 일주일 이상의 긴 연휴의 끝엔 더더욱 잠이 안 온다. 이제 하고 싶은 것도 없어서 딱히 연휴가 더 길어지길 바라는 것도 아닌데 어찌할 수 없는 우울감이 밀려온다.
몇 년 전 애플TV에서 세버런스(Severance)라는 드라마를 봤다.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시즌1을 몰아봤다. 뻘게진 눈으로 시즌2를 검색했지만 아직 촬영 전이라는 소식을 보곤 이 기약 없는 기다림을 어떻게 달랠지 막막했다. 며칠 기분이 안 좋다가 어느새 잊혔다. 3년이 지난 올해 드디어 시즌2가 공개됐다. 새로운 에피소드가 나오는 금요일은 요즘 내게 ‘세버런스 보는 날’로 인식된다.
내가 세버런스(단절)를 재밌게 봤던 이유는 단순히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상상만 했던 일과 삶의 분리를 극단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극 중 주인공 마크는 루먼이라는 기업의 단절층에서 근무하는데 이곳은 단절 시술을 받은 사람만 일할 수 있다. 단절 시술이란 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안은 이니(innie)로, 퇴근 후에는 아우티(outie)로 완전히 단절된 두 자아(?)로 살아가게 하는 시술이다. 겉모습만 같을 뿐 아우티와 이니는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우티는 이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회사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이니도 마찬가지다. 마크를 포함해 단절층에 근무하는 인물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시술을 받고 이곳에서 근무한다.
드라마만큼 극단적이진 않지만 같은 선에서 나도 가끔 했던 생각이다. 일이 내 삶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다면. 퇴근 후의 시간은 일 스트레스 없이 보낼 수 있다면 너무 편리할 것 같다는 생각. 근데 그건 이니를 생각하지 못한 아우티만의 이기적인 관점이었다. 회사에서 일하는 나의 이니는 아우티와 완전히 분리되어 일하는 기계로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내가 왜 일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등 너무나 당연한 질문들의 해답은 이니 스스로 찾을 수 없고 아우티에게 손을 뻗어야만 한다.
나는 양 극단의 회사를 모두 경험했다. A회사는 같이 일하는 모두가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고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었다. 9시 정각이 되면 각자의 큐비클로 들어가 주어진 일만 하다가 6시 땡 하면 퇴근했다. 성과도 야근도 없었다. 그저 의자에 엉덩이만 붙이고 매일 반복적인 일만 하면 됐다. 회사는 당연히 오기 싫은 곳이었고 집은 항상 가고픈 곳이었다. B회사는 정반대였다. 대표는 ’회사 오기 싫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우리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지 몇 시간을 일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나도 그 멋진 말에 속아 입사했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번아웃에 시달렸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구호 하에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었다.
A회사는 당연히 별로였지만 B회사도 이제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일이 너무 좋고 재밌어서 회사 일을 집까지 가져와서 일한다? 나는 별로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회사 밖의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도 소중하며 월급명세서에 찍히지 않는 무용한 노동도 중요하다. 우리는 부지런히 허송세월해야 한다.
일과 삶의 완전한 분리는 완벽한 분리가 아니다.
완벽해지려면 나 스스로 나에게 맞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나는 아직 시행착오 중이다.
오늘처럼 잠이 오지 않는 출근 전날에는 내일 고생할 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 것. 성실히 일할 것. 이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다 말다 반복한다.
아. 자정이 지났다.
이제 진짜 자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