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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페미니즘을 넘어 행복의 페미니즘으로 (1)

by 김혜원

나는 페미니스트다. 그런데 페미니즘이 너무 어렵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여성을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주체'란 무엇인가? 주체란 누구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여성들이 진정한 욕망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어렵다.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거의 역사의 시작과 동시에), 여성들의 욕망은 남성들의 욕망으로 인해 왜곡되어 왔기 때문이다. 불과 몇십년 전까지, 여성들에게는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 외에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수천년의 시간이 흐른 탓에, 이제는 여성의 욕망에서, 어디까지 진짜 본인의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내재화된 남성의 욕망인지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들의 욕망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여성들의 욕망을 억압하는 대상에 반발하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래서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의 양태가 바뀌면, 그에 따라 반발의 양태도 바뀌엇다. 예를 들면, 요즘 탈코르셋에 관련된 기사를 보면 꼭 이런 댓글이 달린다. "예전에는 미니스커트를 입게 해달라고 하더니, 왜 이제 와서는 미니스커트가 억압이라고 하냐!" 나는 이런 댓글은 백프로 남자가 다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겉으로 보기에 변덕스럽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여성들의 의도는 한결 같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은 '주체'가 되기 위해 자신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향해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옛날에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이미지가 '조신한 여자'였으니 그것에 반발해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싶었던 것이고, 지금은 '섹시한 여자'이니 그것에 반발해서 꾸밈노동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하지만 탈코르셋 운동을 포함,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이 '억압에 대한 반발'에만 집중했다는 것은 페미니즘의 큰 한계다. 진정한 자유는 억압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억압을 초월해버릴 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보자. '공부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것은 '복종' 단계다. 좀 반항적인 아이는 엄마가 공부하라고 할 때마다, 어깃장을 놓으면서 공부를 안 한다. 이게 '반발' 단계다. 그렇다면 억압을 초월한 단계는 무엇일까? 공부하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허허허 웃는 아이다. 그 아이는 엄마와 상관없이 자기가 원할 때 공부를 하고, 또 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진짜 '자유'다. 다시 페미니즘으로 돌아와 생각해보면, '억압에 대해 반발'하는 단계가 조신한 여자가 되기 싫어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 또는 섹시한 여자가 되기 싫어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는 것이라면, '억압을 초월'한 단계, 즉 진정한 자유는, 사회의 명령을 의식하지 않은 채 내가 입고 싶을 때 미니스커트든 추리닝이든 넝마든 입을 수 있는 것을 뜻한다. 현대의 페미니즘은 지금의 '반발'을 넘어 이러한 '자유'의 단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나라 80년대 민주화 운동은 전형적으로 '억압에 반발'하는 투쟁이었다.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겠지만, 투쟁의 좋은 점은 적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적이 명확하면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으기가 쉽다. 민주화 운동은 다행히 독재 정권이라는 '억압'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때 당시 투쟁하던 사람들은 독재 정권만 몰아내면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꽃 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법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아직도 사회 곳곳에 전체주의적인 문화가 잔재한다. 독재 정권은 몰아냈지만, 그 자리를 독재 기업, 사장, 학교, 선생, 부모가 꿰차고 들어와 예전 독재 정권이 그랬듯 힘과 권력으로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껍데기는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군대식 문화, 갑질, 차별, 억압이 만연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억압에 반발하는 것을 넘어, 사회 구성원들이 진심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만 가능하다. 이런 개개인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과정은 정말 시간도 오래걸리고 어려운 작업이다. 페미니즘은 지금 그 단계의 문을 연 느낌이다.


요즘 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받는다. 투표를 할 수 있고, 취직도 할 수 있다. 분명 예전 시대의 여성들보다는 나은 상황이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법적, 시스템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사례는 많지 않다(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법적, 시스템적으로 명시된 차별이 없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 여성에 대한 차별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법적으로는 여성들이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만, 실제로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는 여성은 극히 드물다. 이처럼 지금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차별 - 육아 문제, 직장 내 성희롱, 기회 불평등, 꾸밈노등 - 등은 법적, 시스템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뿌리깊은 남성우월주의에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페미니즘이 고민할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어떻게 우리 개개인의 마음 속에 진정한 의미의 양성평등을 심을 수 있을 것인가?'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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