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분노의 페미니즘을 넘어 행복의 페미니즘으로 (2)

by 김혜원

나는 오랫동안 '불꽃 페미'로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남녀차별이 거의 없는 집안에서 자란 덕인지, 남들보다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었다. 예를 들면 2000년대 초반, 아직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거의 전무하던 시절, "여자의 권력은 피부다"라는 화장품광고를 보고, 나 혼자 불편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내 눈에 '불편한' 현상들이 보이면 보일 수록, 내 마음 속에는 이런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정말 차별 많은 세상에 살았어! 나는 차별에 굴복하지 않을테다!"


결혼을 하고나서 나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그럴만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결혼/출산/육아 문제만큼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어디 있을까. 갑자기 들이닥친 크고작은 차별 앞에 나는 절대 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래서 늘 시가에 가서는 화가 난 얼굴로 앉아있었다. 나에게 설거지라도 시켰다가는 바로 반격하겠다는 표정으로. 사실 내 시부모님은 좋은 분이시다. 그런데 나는 늘 혼자 이상한 사명감을 갖고 시부모님을 향해 쉐도우복싱을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면 응당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상속의 작은 반발이 모여서 결국 페미니즘을 관철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늘 화가 나 있는 '불꽃 페미'였다.

하지만 다양한 여성들을 만나 깊은 얘기를 나누면 나눌 수록, 다짜고짜 억압에 반발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하면 차별에 반발하는 것이 또 다른 억압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나서부터 두개의 자아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화장을 하고 싶은 자아'와 '화장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자아'. 심지어 그녀는 운동을 하고 난 뒤 상쾌함을 느낄 때도, 이 상쾌함이 온전한 상쾌함인지 아니면 남성의 욕망의 대상에 가까워졌다는 내재화된 쾌감인지 검열하게 된다고 했다. 뭐 굳이 그렇게 빡세게 사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저런 생각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에 반발하는 사람은 비싼 와인을 보면, 저 와인을 먹어보고싶다는 욕망과 자본가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인지 요즘 20대 여성들 사이에서도 자긴 그냥 화장하고 싶은데, 탈코르셋 운동때문에 화장할 때마다 괜한 죄책감만 더 든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녀들은 화장을 해도 찝찝하고, 안 해도 찝찝한 2중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생각에 이르렀을 때, 나는 '사실 페미니즘은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개개인의 삶의 맥락이 다르고 욕망 또한 다르다면, 페미니즘이 추구해야 하는 '여자의 욕망'을 대체 어떻게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억압에 반발하는 것이 또 다른 억압을 낳을 수 있다면, 지금 현존하는 수 많은 차별문제는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불꽃 페미' 시절엔 그저 반발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여성을 욕망의 주체로 거듭나게 한다'는 페미니즘의 목표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페미니즘의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다행히도 나는 철학을 공부하고 다양한 여성들을 만나면서, 페미니즘의 어려움을 타개할 실마리를 찾았다. 일단 페미니즘이 필요없다는 무용론에서는 벗어났다. 왜냐하면 분명 세상에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들이 많이 존재하고, 그 억압들은 여성들을 부자유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건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평균적인 급여가 낮은가? 왜 식이장애는 압도적으로 여성들에게 많이 일어날까? 왜 결혼 후 행복해졌다는 남성은 70프로에 육박하는데, 결혼 후 행복해졌다는 여성은 30프로 남짓일까? 이처럼 여성의 불행은 어느 정도 구조적인 문제다. 인간은 구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북유럽 사람들이 우리보다 행복한 이유는 개개인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단지 복지사회에 태어났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구조를 바꾸기 위해 지금처럼 끊임없이 반발하고 분노해야 한다.


하지만 그 반발은 철저하게 '구조'를 향해야 한다. '구조'란 미디어, 시스템, 사회인식처럼, 인간의 무의식에 전체적이고 조직적인 영향을 끼치는 틀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미디어에서 여성차별적 표현을 쓸 때 불쾌함을 표시한다든지, 유럽에서처럼 너무 마른 모델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구조'에 반발하는 좋은 예다. 탈코르셋도 그런 의미에서 의미있는 움직임이었다고 생각한다. 꾸밈은 분명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탈코르셋이 이슈가 되기 전에는 여성들이 꾸밈을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탈코르셋 때문에 꾸밈이라는 행위에 권력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수면위로 드러난 것이다. 탈코르셋은 분명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움직임이었다.


그렇지만 탈코르셋이 구조에 대한 반발을 넘어, 여성 개개인에 대한 통제로 이어질때 새로운 억압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어떤 여성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일체의 꾸밈을 금지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늘 수수한 옷만 입혔고, 머리도 기르지도 못하게 했다. 그녀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어머니로부터 독립해서 매일 패션 잡지를 보고 옷과 화장품을 사모았다. 우리는 그런 그녀를 왜 탈코르셋에 동참하지 않냐며 비난할 수 있을까? 그녀는 일단 실컷 멋을 부리며 그동안 쌓였던 한을 마음껏 풀어야 한다. 그 한을 아낌없이 풀고나면, 그녀 스스로 '꾸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여유가 생길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탈코르셋을 하지 않은 여성을 배신자 취급하거나, '나는 탈코르셋 했는데 넌 뭐하고 있냐'라는 뉘앙스로 탈코 인증을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탈코르셋을 '유행'으로 소비하거나 '운동(Movement)'으로 추동해서는 안 된다. 물론 여성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는 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단체 행동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니까. 대한민국 여성 모두가 꾸밈을 중지하면, 미디어, 패션 산업, 남성들의 의식을 한방에 전복시킬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을 치르면, 우리 편도 반은 죽는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이기는 게 되어서는 안된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여성 모두가 좀더 행복해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


탈코르셋을 한 여성도, 하지 않은 여성도, 제사에 반대하는 며느리도, 죽어도 제사는 해야된다는 시어머니도 모두 여성이다. 페미니즘은 그들 모두를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극우 세력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에만 매몰되어, 여성의 반을 버려서는 안된다. 꾸미는 여성도, 꾸미지 않는 여성도, 결혼한 여성도, 결혼하지 않은 여성도, 애를 낳은 여성도, 애를 낳지 않은 여성도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진짜 '여성들이 행복한 세상'이다. 그것이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하는 지점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행동강령을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동강령은 또다른 억압을 낳고, 강령을 따르는 자와 따르지 않는 자의 편가르기로 귀결될 수 있다. 그것보다는, 여성들에게 조금 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라고 종용하는 것보다, 안 꾸며도 충분히 사랑 받을 수 있는 삶을 보여주는 게 낫다. 한남에 부역하지 않기 위해 비혼, 비출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결혼하지 않고 애를 낳지 않아도 행복한 삶이 있다는 걸, 아니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자기 욕망을 잃지 않는 삶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낫다. 보여주기만 해야 한다. 다양한 삶의 옵션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욕망에 맞는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페미니즘의 목표를 '반발'이 아닌 '행복'으로 바꾸자. '억압'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욕망'에 초점을 맞추자. 페미니스트 본인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 당신이 페미니즘에 대해 설파할 때 시큰둥 하던 여성들도, 당신이 진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면 호기심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렇게 주변의 여성들이 당신의 삶을 부러워하고 동경할 때 이야기 해주자. "누구의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에요." 굳이 페미니즘을 운운할 필요도 없다. 여성들이 각자 자기 욕망에 따라 사는 것, 그게 페미니즘 그 자체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분노의 페미니즘을 넘어 행복의 페미니즘으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