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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Feb 20. 2019

사랑은, '왜?'라는 질문에서부터

 최근 SKY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유행이었다. 생방송으로는 시청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유튜브에서 클립을 몇개보다가 배우 염정아와 김서형의 연기가 워낙 압도적이라서 빨려들 듯이 정주행하고 말았다. 여러가지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그중 내가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예빈이의 가출 씬이었다. 


 극중 예빈이는 공부 잘하는 언니만 편애하는 엄마 때문에 늘 서운한 중학생 소녀다. 예빈이는 공부 스트레스를 편의점에서 도둑질하는 것으로 푸는데, 어느날 친구들이랑 도둑질하다가 옆집 아줌마 이수임에게 들키고 만다. 이수임은 예빈 엄마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만, 예빈 엄마는 자기 딸에게 신경 끄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처한다. 하지만 예빈 엄마는 예빈이가 도둑질을 하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그간 편의점 사장에게 CCTV를 지우는 대신 사례금을 지급하는 거래를 하고 있었다. 예빈이는 어느 날 편의점 사장이 자기가 도둑질하는 걸 보고도 못 본체 하는 걸 보고, 엄마가 지금까지 자신의 도둑질을 모른 척 해 왔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상처받은 예빈이는 가출을 감행하다가 이수임에게 들킨다. 그때 예빈이가 눈물을 터뜨리며 하는 대사가 참 마음에 남았다. 

 "엄마는 내가 왜 도둑질 했는지 관심없어요. 엄마는 내가 도둑질한 거 덮기만 하면 땡이에요."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나는 오래 전 심한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다. 혼자 버티기가 힘들어서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고 부모님에게 털어놓자,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하셨다. 물론 부모님 입장에서는 침묵이 배려라고 생각하셨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왜 우울하니?"였다. 그 당시 나도 예빈이처럼, 왜 우리 부모님은 내가 우울한 이유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우울증이라는 병을 빨리 치료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예빈 엄마나 우리 부모님은 사랑하는 딸에게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했을까? 아마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으리라. "왜?"라는 질문을 하는 순간,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견고한 세계에 금이 간다는 것을. 예빈이에게 왜 도둑질을 하냐고 물으면, 예빈이는 아마 "나 학원다니기 싫어"라고 대답할 게다. 그렇다면 예빈 엄마가 그 대답을 듣고 "그럼 우리 딸 학원 다니지말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왜 우울하냐고 물으면 내가 학업 스트레스를 토로할까봐 두려우셨던 게다. 부모님은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학업에 최선을 다하길 바라셨으니까. "왜?"라는 질문은 기꺼이 자기 세계를 내려두고, 상대방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예빈 엄마나 우리 부모님이 "왜?"라는 질문은 하지 못했던 건 자기 세계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견고한 성을 지키느라 가장 사랑하는 딸의 절규를 외면하게 된 셈이다. 


 상대방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사람은 폭력적이다.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상대가 궁금하지 않은 것이다. 그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할 수 있다. 


 연애할 때를 생각해보자. 연애할 때 연인과 세네시간 전화통화를 할 수 있는 건 서로에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넌 왜 그 영화를 좋아해? 넌 왜 그 사람이 좋아? 넌 왜 그렇게 생각해?" 생각해보면 "넌 왜 그 영화를 좋아해?"라는 질문은, 내가 그 영화를 좋아한다면 굳이 하지 않을 질문이다. 나는 그 영화가 별로인데 상대는 그 영화가 좋다고 하니 "왜?"냐고 묻는 것이다. 이처럼 "왜?"라는 질문은, '나'의 생각과 감정을 내려두고,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해보려는 처절한 노력이다. 그런 처절한 노력을 끝에, 우리의 세계는 파괴되고 확장되고 재생성될 수 있다. '사랑을 하면 다시 태어난다'는 말처럼 말이다.


 이것은 비단 연인이나 가족간의 관계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애, 즉,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타인에게 "왜?"를 묻는 자세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정치인들에게 냉소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정치인들이 우리의 삶을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정치인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들에게 진심어린 마음으로 "왜?"를 물었다면, '가임기 여성 지도'와 같은 괴랄한 정책을 나오지 않았을 테다. 예빈 엄마가 딸의 도둑질을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무마하기 바빴듯이, 정치인들도 우리의 삶을 궁금해 하지 않고 그저 표면적인 성과를 내기에 바쁘다. 당연히 그런 정치인들에게 우리가 사랑을 느낄 리는 만무하다. 


 "왜?"라는 질문은 사랑의 바로미터다. 당신에게 "왜?"를 묻지 않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왜' 오늘은 우울하냐고 묻지 않는 연인, '왜' 그런 직업을 선택하려는지 묻지 않는 부모, '왜' 삶이 팍팍한지 묻지 않는 정치인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 곁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과감하게 선을 긋자. 어차피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대신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당신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찾아 보자. 당신 곁에 그런 사람들이 두세명만 있어도 삶은 몇 배로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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