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못들은 척'이 남긴 상처
지난 주말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친구와 밥을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각자 엄마에게 상처받았던 기억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친구는 중학교 여름방학에 매일 학원을 다녔는데, 그 학원이 너무 다니기 싫어 겨우 용기내어 이야기를 꺼냈더니 어머니가 '못 들은 척' 하셨다고 했다. 그놈의 '못 들은 척.'
내가 엄마에 대한 마음을 접었던 순간도 비슷하다. 민사고에서 수업시간에 졸았다는 이유로 종아리가 퍼렇다 못해 시커매질 정도로 맞았을 때였다.(나는 잠이 많아서 매주 그렇게 맞았다) 엄마는 민사고를 더 이상 못 다니겠다는 나를 '못 본 척' 했다. 유학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고백했을 때도 엄마는 '못 들은 척' 했다. 엄마가 나를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할 때마다, 나는 엄마를 향한 마음의 문을 서서히 닫았다.
친구는 대학교 때, 어머니가 식탁에 앉아 "왜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되지?"라고 되뇌이는 것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친구 어머니의 인생은 완벽하다. 좋은 남편, 부유한 생활, 본인도 잘 교육받은 똑똑한 분이셨다. 그 어머니가 마음대로 안 되었던 건, 아마 내 친구 뿐이었을 것이다. 친구 어머니는 똑똑했던 친구에게 어려서부터 많은 기대를 걸었다.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우리 엄마도 공부를 잘했던 두 딸들에게 어려서부터 많은 기대를 걸었다. 아마 우리 엄마도 지금쯤 식탁에 앉아 이렇게 되뇌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되지?"라고.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맞춰살려는 엄마는 이상하게도 나와 언니에게만 자신에게 맞추길 바랐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욕망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으면서, 우리의 욕망만 모른 체 했다. 모른 체 한 건지 아니면 진짜 모른 건지 알 수가 없다. 왜 엄마들은 너무도 쉽게 자식들의 욕망을 모른 척할까? 아니 없애버릴까? 왜 엄마들은 너무나 쉽게 자식을 자신과 동일시할까? "왜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되지?"라는 말은 곧 "왜 자식들이 내 맘대로 안 되지?"라는 말이다. 우리 엄마를 비롯해서 내가 살던 동네에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엄마들이 정말 많았다.
강남의 아줌마들의 유일한 골치거리는 자식 문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식 빼고는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돈도 많고 시간도 많아, 삶의 온갖 골치아픈 일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강남 엄마다. 그렇게 남겨진 모든 에너지를 자식에게 쏟아붓는다. 권태에 젖은 나른한 인생에, 유일하게 변화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 자식이기 때문이다. 강남의 엄마들은 프린세스메이커를 하는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자식을 자기 구미에 맞게 키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공부 뿐만 아니라, 커리어, 교우관계, 태도, 외모, 말투까지 관리한다. 그 끔찍한 감시와 교정 속에서 '주체'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강남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욕망에 부합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어렸을 때 부모의 욕망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강남 아이들은 그 강도와 기간이 훨씬 세고 긴 편이다. 왜냐하면 강남 아이들은 부모의 약한 모습을 대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경우, 자식은 부모가 생각보다 못나고 약한 존재라는 걸 깨달으면, 부모에게서 독립하거나 반발하거나 아니면 불쌍히 여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강남의 아이들은 다르다.
강남의 아이들은 머리가 굵어지는 청소년 시기부터 자신이 부모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자신의 힘으로 부모의 사회적 위치에 다다르기 어렵다는 걸 안 순간, 그들은 독립을 포기한다. 그냥 부모 밑에서 적당히 비위 맞추며 사는 것이 훨씬 편한 인생이란 걸 깨닫기 때문이다. 강남 아이들은 부모가 죽기 직전까지 부모의 약한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부모앞에서 늘 약자다. 그래서 강남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이가 삼십, 사십이 되도록 부모를 두려워하거나 분노하거나 아니면 품 안에 있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늘 자신이 부모의 욕망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자신이 부모의 완벽한 인생에 유일한 오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죄책감은 나이가 들수록 이상한 애착으로 변모한다. 고등학교 때 시험을 못봐 수면제로 자살시도를 한 언니를 알고 있다. 그것은 부모에게 받은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일어난 비극이었다. 안타깝게도 비극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니 더 큰 비극이 양산되고 있다. 그 언니는 현재 마흔이 넘은 나이가 될 때까지 남자친구 한번 사귀지 않고 늘 부모님께 효도를 하며 산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들에게 '효도'는 '속죄'와 같아보인다. 자신이 부모님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죄스러움을 효도로서 갚으려는 것이다.
부모의 욕망에 부합하지 못한 것이 어째서 죄가 되는 것일까? 그 알수없는 죄책감 또한 부모가 심어주는 것이다. 부모는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아이에게 주입한다. 내가 슬픈 이유는 네가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아서라고.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는 부모의 슬픔을 모두 자기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부모의 욕망에 부합하지 못한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길 바라는 부모의 욕망이 진짜 죄다. 죽을 때까지 속죄할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다. 자식의 욕망을 외면한 부모, 자식을 자신과 동일시한 부모, 자식을 '주체'로서 존중하지 않은 부모 말이다. 그러니 "친구들아. 넌 아무 잘못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