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Apr 18. 2022

안녕하세요? '철학'하는 '출판사집 딸내미'입니다.

얼마 전 아버지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아버지는 종종 나에게 연락을 해 와인을 한 박스씩 가져다준다. 먼저 절대 연락 안 하는 무심한 딸내미를 향한 아버지의 애정표현일 테다. 그날은 아버지가 와인을 주면서 점심도 먹자고 했다.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와인은 잘 마시고 있니?”

“응, 잘 마시고 있어.”

“한 달에 한 번씩 딸내미 와인도 챙겨주고 이런 아빠가 어디 있냐.”

“아빠 와인 한 달에 한 번씩 주고 있는 거였어?”

“몰랐어? 매달 12일에서 15일 사이에 주고 있잖아. 네가 그걸 모르다니 충격이다.”

“나는 그냥 아빠가 내킬 때 주는 줄 알았는데.”

“난 그렇게 안 한다. 난 너 와인 주는 날 1년 치 달력에 다 표시해 놨다.”


난 그 말을 듣고 빵 터지고 말았다.


“아빠는 할 일을 1년 치 달력에 미리 다 적어놔?”


아버지는 그렇다고 했다. 새해가 되면 달력에 1년 치 할 일을 다 기록해 놓고, 매일 아침 달력을 보고 할 일을 다 처리한 뒤 일과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래야 삶을 철저하게 꾸려나갈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다시 물었다.


“아빠 원래부터 그렇게 했던 거야? 사업하고 나서부터 생긴 버릇이야?”

“사업하고 나서부터 그랬지.”


그 말을 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봤다. 순간적으로 느껴졌다. 아버지, 정말 불안했구나. 강박은 불안에서 온다는 걸 타자를 보고 느낀 순간이었다.




정신분석 수업에서 배웠다. 강박증이 심한 사람은 삶 자체를 계획한다고. 나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ADHD 증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잘은 몰라도 아버지가 자라온 환경을 생각해보면 그랬을 것 같다. 집에 어머니는 부재하고, 아버지는 말 한마디 잘 안하는 무심한 성격에, 아래로는 줄줄이 동생만 네 명, 그리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집이 불안했을 테고, 그게 어린 시절에는 ADHD 증세로 발현되지 않았을까 싶다. 크고 나서는 할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것 같다. 집안을 일으켜서 할아버지에게 쓸모 있는 장남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정말 사업을 잘 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사업은 정말 변수가 많은 분야이기에 철저히 계획을 세우는 습관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나는 아버지가 변수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미국 유학을 할 시절에 여권을 소매치기 당한 적이 있다. 그 사실을 안 아버지는 나에게 불 같이 화를 냈다. 외국에서 여권을 잃어버린다는 건 물론 큰일이지만, 당시 나는 여행객이 아닌 유학생이었기에 학교를 통해 신분을 증명할 수 있어서 그렇게까지 큰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나중에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지만, 그 당시 아버지는 밤잠을 설치고 심지어 작은 원형탈모까지 왔다고 했다. 나는 그때 아버지가 이 일을 가지고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때부터 어딜 가나 가방을 꼭 쥐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을 뿐이다.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는 변수가 무서운 것이었다. 특히 그 일이 ‘미국’이라는, 아버지가 통제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욱 과도하게 불안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왜 삶을 계획하고 싶은지 이제야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족은 새해가 되면 밥을 먹으며 몇 년 치 삶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곤 했다. 그때 아버지는 올해는 물론, 5년 뒤까지 무엇을 할 건지 계획을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자기의 삶을 계획 하에 살았다. 그러니 어찌 자식들의 삶을 계획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젊은 나이에 경제적 변수까지 제거한 아버지에게 남은 유일한 변수는 자식들밖에 없었을 텐데 말이다.





“첫째는 교수가 되고, 둘째는 아빠 사업 이어라.”


나와 언니가 중고등학교 때부터 듣던 말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삶을 계획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행복하길 바랐을 테고, 아버지에게 행복은 안정, 즉 변수가 없는 삶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교수’와 ‘사업’은 아버지가 잘 아는 영역이다. 자신이 잘 아는 영역에서 자식들이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것. 그렇게 다 같이 변수 없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바람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덕에, 아버지처럼 불안한 집안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나의 삶을 계획하는 것이 싫었다.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쯤이었을 거다. 아버지가 어느 카페에서 출판 2세, 3세들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랐을 테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강한 반감이 끓어올랐다. 그때 다짐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 사업은 안 잇는다.”


내 마음 속의 야심이 구체적인 모습을 띄게 된 것은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 당시 나에게 아버지의 사업을 잇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계획과 통제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를 싫어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잘해줘서 좋았고, 아버지가 나를 통제해서 싫었다. 그래서 늘 마음속으로는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만 아버지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버지의 계획과 통제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늘 머릿속에 담고 있던 장면이 있다. 어느 날 아버지보다 내가 더 사업을 잘 해서 아버지에게 말해야지. “아버지, 이제 저 알아서 할게요. 신경 끄세요.” 그게 내가 평생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이미지다.


나는 왜 스타트업을 했을까?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것도, 유명해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많은 스타트업 사업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에 혁신이니 선한 영햑력이니 하는 것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단지 아버지를 넘고 싶어서 스타트업을 했다. 내 목표는 하나였다. 아버지 도움 없이 아버지보다 더 큰 사업체를 일구는 것. 사업 아이템을 선정할 때부터 그랬다.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아이템 중에 잘 될 법한 건 많았지만, 기대 매출이 압도적으로 크지 않으면 관심이 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보다 한 열 배는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야심에 가득 찼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교 졸업생이 친구들 데리고 글로벌 B2B 사업을 하려고 하다니. 말이 되는 아이템이었지만, 그 아이템을 꾸려나가기에 나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5년 만에 퍼져버린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풍선처럼 부풀려진 나의 야심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서.




“혜원씨, 인문학 출판사 해보지 그래요?”


스타트업을 때려치우고 철학을 만났다. 그곳에서 나는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다른 세계를 마주쳤다. 나는 처음부터 내 철학 스승이 좋았다. 그는 야심덩어리인 나를 잘 이해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나보다 훨씬 더 야심덩어리인 삶을 살아봤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그런 그를 따라 철학과 인문주의의 세계로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아버지 출판사를 받아서 해보면 어떻겠냐고.


그 말을 듣고 나는 화가 났다. 지금처럼 스승과 관계가 깊지 않았을 적의 이야기다. “저 보고 출판사를 하라고요?” 나는 스승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는 출판사 안하고 쌤처럼 글 쓰고 살고 싶은데요?” 철없는 마음으로 어깃장을 놨다. 스승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철학을 배운다는 미명하에 근 3년을 내리 놀았다. 평생 의무에 시달려 살다가 한번 놀아보니, 노는 게 그리 재밌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놀면서도 마음이 마냥 편한 건 아니었다. ‘일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근면성실해야 한다는 금기는 철학을 배우면서 거의 넘었다. 하지만 노동을 하지 않고 사는 삶은 이상한 방식으로 영혼을 좀먹었다. 이제는 안다. 일하지 않는 삶은 기쁜 삶이 아니라는 걸. 진정으로 기쁜 삶은 기쁜 일을 하는 삶이라는 걸. 그 당시 스승은 평생 의무에 시달린 나를 놀게 내버려두면서도 내 마음 속에 서서히 커지고 있는 불안과 공허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때가 되자 나를 불러 타일렀다. “혜원아, 너는 지금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게 아니다. 너는 지금 의무를 피하고 있는 것 뿐이다. 나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그 안의 의무까지 껴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말을 듣고 눈물을 쏟았다.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앞에서  위축되어 있었던 나의 모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가 정말 무서웠다. 아버지 앞에 서면 가슴이 뛰고 몸이 움츠러들만큼 무서웠다. 아버지가 나에게 잘해주었는데도 그랬다. 아버지 앞에서는  과도하게 밝은 척을 했다. 아버지가 무서워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으니까. 나는 평생 그런  모습을 싫어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서는 사랑스런  연기를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버지를 넘어서서 아버지의 통제 밖으로 벗어날 ‘복수 순간을 꿈꿔왔던 것이다. 스승의  때문에, 내가 아버지 앞에서 위축되었던 모습, 사랑  받을까봐 불안해 했던 모습,  마음속으로 복수의 칼을 갈던 모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스승과 친구들 앞에서 거의  시간을 내리 울었다. 내가 말뚝에 묶인 코끼리 같았다. 그냥 밧줄을 끊고 나오면 되는데, 그걸   몰라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코끼리 말이다.


그 다음날 일어나니 마음이 개운했다. 한참 흘린 눈물에 평생 응어리진 마음들이 씻겨내려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운 것이 민망할 만큼 가뿐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출판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한 구석 창고로 쓰는 방에 작은 사무실을 차렸다. 방에 책상 하나, 사무용 의자 하나, 프린터 하나 조립해 넣어놓고 가만히 그 방에 앉아 있는데 기분이 묘했다. 스타트업 할때도 집에 남는 방 하나를 사무실로 썼었다. 사업 망하고 나서 나는 한 동안 그 방에 아예 들어가질 못했다. 그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스타트업할 때의 트라우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방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철학과 글쓰기로 마음을 많이 치유하고 나서다. 평생 동안 출판사만은 안 하리라 생각했던 내가, 들어가기조차 힘들었던 그 트라우마의 방에서, 출판 사업을 다시 시작하려고 하다니.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출판사 집 딸내미’라는 항은 나에게 슬픔이었다. 그 슬픔을 피하기 위해 추가했던 ‘스타트업’이라는 항도 나에게 슬픔이었다. 그런데 ‘출판사 집 딸내미’, ‘스타트업 경험’에 ‘철학’이 추가되니 갑자기 모든 항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근 7개월 동안 스승이 준 원고를 가지고 몇 달은 외면하고 몇 달은 직면하며 끙끙댔다. 스승의 글을 편집하는 건 정말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또 혼자서 하겠다고 말해놓은 터라, 계약서 작성부터 보도자료까지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배워서 해야하는 것도 막막했다. 스트레스 받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내 한숨소리가 다른 방 친구에게 들릴 정도로 스트레스 받았다. 그런데 기뻤다. 즐거운 일을 해서 기쁜 게 아니라 소중한 일을 해서 기뻤다. ‘마음’을 담아 일한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처음 경험했다. 불안으로 추동된 열정도, 거품처럼 꺼지는 즐거움도 아닌, 단단하고 온전한 기쁨이 있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스승이 쓰고 내가 엮은 책이 나왔다. 스승은 글에 마음을 담았고, 나는 책에 마음을 담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판권 페이지를 보고 나는 빙긋 웃음이 났다. 내 스승의 이름과, 내 아버지의 이름과, 내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는 페이지. 그 한 페이지가 내 삶을 보여주는구나 싶었다. 나에게 ‘자본주의’와 '사업’이라는 항을 물려준 아버지. 나에게 ‘인문주의’와 ‘철학’이라는 항을 물려주고 있는 스승. 그리고 ‘철학’하는 ‘출판사집 딸내미’인 나. 이 페이지에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올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소중한 일을 해나가고 싶다.


“지경사를 민음사로 만들어야지!”


책이 나오고 쭈뼛거리고 있는 나를 보고 스승이 말했다. 새삼스레 그 말이 고맙게 느껴진다. 그래, 안될 게 뭐가 있나. 미친 짓도 하다 보면 뭐라도 되지. 내 스승은 이 세상에 인문주의를 어떻게든 싹틔워보려고 십년째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 미친 짓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스승의 미친 짓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걸. 적어도 그의 애씀으로 인해 내 인생 하나는 바뀌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나 또한 나의 애씀을 다해야하는 것 아닌가. 출판사, 스타트업, 철학, 아버지, 스승, 그리고 야심. 나를 채우고 있는 나의 항들을 꼭 껴안고 또 한 걸음 내딛어야겠다.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참 살아볼만 하다.





지금까지 아주 길게 쓴 책 홍보글이었습니다. <어쩌다 마주친 철학> 절찬리 판매 중.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8806245


작가의 이전글 과몰입과 찬물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