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힘든 날이면 청소를 한다. 내가 소중한 이들과 함께 꾸려나가고 있는 ‘철학흥신소’라는 공간을 혼자 청소한다. 보통 청소는 의무지만, 그 공간을 청소하는 일은 내게 의무가 아니다. 기쁨이다. 창문을 열고 스피커에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청소를 한다. 바닥에 떨어진 와인 뚜껑, 과자 부스러기를 보면, 지난 밤 사람들과 맛있는 술을 마시며 울고 웃었던 시간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진다. 밀도높은 시간의 흔적들. 테이블 위에 널려져 있는 종이와 물감, 지우개가루를 봐도 미소가 지어진다.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가 지난 밤 그림을 그리고 간 흔적. 이 공간에 그 친구가 형형색색의 색을 더해준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든다. 칠판에는 치열했던 수업의 흔적들. 스승이 쓴 판서를 다시 읽어보고 말라버린 글씨들을 힘주어 지운다. 칠판에 쌓인 글씨의 흔적들이 보인다.
스승의 방에 가면 스승의 흔적들. 지우개가루. 오늘 아침 글 쓰다가 먹었을 초콜렛 껍질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책들을 슬쩍 보고 지금 스승은 어떤 사유를 하고 사는지 짐작해본다. 가끔 스승이 종이 위에 흘려 적어놓은 낙서 같은 글귀들을 보고, 그 글귀를 마음에 담아본다. 커피 자국이 남은 컵을 치우고 내 방에 건너가서 청소기를 돌린다. 나와 친구의 머리카락 뭉치들. 간이 침대에는 어젯밤 친구가 누워서 읽은 책이 놓여져 있을 때도 있고, 혼자 울었는지 휴지뭉치가 모서리에 구겨져 있을 때도 있다. 언젠가 저 이불을 좀 빨아야 하지 않을까, 하다가 언젠간 빨아야지, 라고 생각한다. 내 책상, 내 컴퓨터, 내 키보드. 내 방 한 켠에 붙여놓은 친구들이 선물해준 그림들을 훑어본다.
마음이 힘든 날, 청소를 하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 그 공간을 둘러본다. 그러면 지친 마음이 뭉클하게 차오를 때가 있다. 이 공간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고, 참 많은 일이 있구나. 그곳에 묻어있는 사람들의 흔적들을 본다. 사랑하는 스승의 흔적, 사랑하는 친구의 흔적, 소중한 사람들이 이곳에 들를 때마다 하나둘씩 묻히고 가는 흔적들. 이제는 떠나버렸지만, 한때 이 공간을 사랑했던 이들이 묻혀놓았던 흔적들. 이곳에 사는 사람들. 이곳에 오는 사람들. 이곳을 떠난 사람들. 이곳을 찾아올 사람들. 그들의 흔적들이 쌓여 지층을 이룬 공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지난날의 웃음이, 지난날의 눈물이 아련하게 들려오는 곳. 내일이 되면 또 사람들이 놀러와 웃음과 눈물을 묻히고 갈 곳.
기쁜 마음으로 청소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에게 소중한 곳, 지키고 싶은 곳, 가꿔나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 소중한 곳이 나 혼자만의 방이 아니라,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 열린 집이라 다행이다. 나는 지금처럼 이 곳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기쁘게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