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핏을 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최근에 운동을 마치고 느낀 작은 변화가 있다. 평소처럼 땀을 뻘뻘 흘리고 운동하고 집에 가는 길, 왠지 몸에 에너지가 남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응? 이상하다. 나 좀 모자른 것 같은데?’ 그날부터 운동이 끝나면 괜히 집 주변을 한 바퀴 돌기도 하고, 놀이터에서 발을 굴러가며 그네를 전투적으로 타기도 했다. 나는 평생 체력도 약하고 운동도 거의 안 해봐서, 몸에 힘이 남는다는 느낌 자체를 느껴본 적이 없다. ‘아, 왜 이렇게 힘이 남는 느낌이지? 운동량을 늘려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넌 이미 단행본을 쓸 준비가 되어 있다. 네가 부담스러워서 못쓰고 있을 뿐이지.”
최근 스승에게 책은 어떻게 쓰는 거냐는 질문을 했다. 그때 스승이 되돌린 답이다. 스승은 덧붙였다. “지금까지 너에게 늘 마음 편하게 글을 쓰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단행본은 다르다. 나는 네가 단행본을, 네 표현을 빌리자면 ‘각 잡고’ 힘껏 썼으면 좋겠다. 내 제자라면 단행본은 그렇게 써야 한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글쓰기가 모자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운동을 해도 몸에 힘이 남았던 것처럼, 브런치에 짧은 글을 써도 정신에 에너지가 남았다. 운동을 하면 늘 기분이 좋아지듯 글을 쓰면 늘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와 별개로 에너지를 충분히 썼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기분 좋은 탈진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예전에는 브런치에 글 하나 올려도 ‘난 오늘 할 일을 다 하였다.’는 기분 좋은 탈진이 느껴지곤 했다. 기억이 난다. 누드모델 글을 올렸을 때. 그 글을 쓰려고 일주일을 망설이다가, 결국 어느 날 각을 잡고 집필실에 앉아 커피를 세네 잔씩 마셔가며 그 글을 썼다. 그 글을 다 쓰고 기분 좋은 탈진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요즘 글을 쓰며 그런 탈진을 느낄 때가 거의 없다. 예전보다 글쓰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고, 익숙해진 만큼 마음 편하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도, 글쓰기도 한 단계 더 치고 나아가야 할 시기가 왔는데, 나는 또 그 테두리 앞에서 머뭇대기만 하고 있다. “멈추면 좆된다!”는 스승의 사자후가 요즘 귓가에 희미하게 울리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일 테다. 요즘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는데 자꾸 누군가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일 테다. 글쓰기든 운동이든 공부든 삶이든 충분히 소진하지 못한 여분의 에너지가 몸과 마음에 쌓여 가는데, 그 에너지를 적절히 소진할 줄을 모르니 자꾸 엉뚱한 데서 터뜨릴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여분의 에너지가 없었다. 나는 몸이 약했고, 약한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싶은 삶의 의지조차 없었으니까. 워낙 에너지가 없다 보니, 짧은 글 하나 써도 몸이 퍼질 정도로 소진되었던 것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예전에는 에너지가 남아도 그걸 자기파괴적인 방법으로 소비하곤 했다. 폭음을 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의미없는 대화를 강박적으로 하고, 쓸데 없는 고민에 매몰되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자기학대를 하는데 온 에너지를 갖다가 썼다. 그런데 나는 이제 꽤 건강해져서 스스로를 학대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운동을 해서 몸에 에너지는 많아졌지, 남은 에너지를 자기학대적인 방법으로 풀고 싶지는 않지, 그러니 어찌할 바를 몰라 애꿎은 싸움질 생각이나 했던 것 아닐까.
나는 왜 소진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가.
철학을 배우고 늘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화두다. 소진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콤플렉스이기도 하다. 치고 나가야 할 때가 오면 치고 나가야 하는데, 항상 그 지점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늪에 빠지거나 엉뚱한 데서 일을 만들어온다. 그렇게 나를 아끼는 이들을 힘들게 한다. 정제된 삶은 어떻게 사는가. 정제된 삶은 나의 에너지를 나의 욕망에 쏟아 붓는 삶이다. 정제된 삶은 에너지가 없어도, 욕망이 없어도, 둘 다 있지만 에너지를 욕망에 쓰지 못해도, 불가능하다. 내 삶이 그렇다. 나는 내 에너지를 내 욕망에 정확하게 쏟아 붓지를 못한다. 그렇게 남은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갖다가 쓴다. 그럴수록 삶은 점점 더 산만해지고 정작 진짜 욕망에 써야할 에너지는 남아있질 않게 된다. 욕망은 언제나 나의 테두리 밖에 어렴풋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은 욕망이 아니다. 욕망은 언제나 내 테두리 밖에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 그 막을 뚫고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내 현재의 욕망이 있다. 그러면 그 막을 뚫을 수 있게 온 힘을 모아 힘껏 손을 뻗어야 하는데, 난 그 막이 꼭 벽처럼 느껴져 내가 가진 힘을 손을 뻗는데 쓰지 않고 그 주변에서 고민하고 다른 짓을 하는데 다 써버린다. 아니, 그 막을 보지 않으려 일부러 다른 짓을 한다. 그렇게 엉뚱한 곳에 힘을 다 쓴 뒤, 그 얇은 막 뒤에 주저앉아 ‘이건 나에게 너무 넘기 힘든 벽’이라 정신승리한다. 자기합리화하는 데 온 힘을 다 써버리는 모지리의 삶이다.
운동이 모자라면 운동의 밀도를 높이면 되잖아. 글쓰기가 모자르면 글쓰기 밀도를 높이면 되잖아. 그 지점이 항상 내가 넘어지는 지점이다. 나는 ‘각 잡는’ 것을 무서워한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운동도 각 잡고 하고 글도 각 잡고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까지 익숙해지면 운동도 마음 편히 하려고 하고, 글도 마음 편히 쓰려고 한다. ‘이건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잖아. 좋아하는 일은 즐기면서 해야지.’라는 그럴듯한 자기합리화와 함께. 방금 이 문장을 쓰면서 깨달았다. 이게 바로 노예 마인드라는 걸. 남이 시키는 일을 할 때는 씨발씨발 거리면서도 잘만 각 잡고 하면서, 정작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을 할 때는 잘만 포기하고 합리화하는구나 싶다. 나는 여전히 내 욕망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구나. 타인이 쥐라는 건 손에 피가 날 때까지 쥐어 왔으면서, 정작 내가 쥐고 싶은 건 그리 느슨하게 쥘 수가 없구나. 그러니 나란 사람의 정체성, 즉 매력은 여전히 흐리멍텅할 수밖에.
왜 나는 밀도 높은 기쁨을 모르는가. 기쁨은 고통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때 따르는 고통의 크기. 그 고통의 크기를 감당하는 만큼 기쁨의 밀도는 높아진다. 나는 그 고통을 감당하고 싶지 않기에,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마음 편히 하고 싶기에, 딱 그 수준의 기쁨에밖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소진하지 못하는 것. 나의 콤플렉스다. ‘직업’이 아니라 ‘업’이 없다는 것. 나의 콤플렉스다. 내가 진정 원하는 일에 ‘각 잡지’ 못한다는 것. 나의 콤플렉스다. 나는 지금 얇은 막 앞에 섰다. 온 힘을 모아 막을 향해 손을 뻗을지, 아니면 주저앉아 엉뚱한 데 힘을 다 뺄지는 나의 선택이다. “우리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미끄러져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