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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Dec 01. 2022

상처받은 마음 - 영화 '티탄'

티탄(Titane, 2021), 쥘리아 뒤쿠르노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심고 살아가던 여성 알렉시아가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다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던 슬픈 아버지 뱅상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 - 다음영화




상처받은 마음. 이 영화에 부제를 붙여준다면 그렇게 짓고 싶다. 이 문장 하나 썼는데 눈물이 나려고 한다.


오늘 친구와 점심을 먹으며 같이 본 영화 티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주인공 뱅상이 자기 배에다가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면서 ‘그렇지, 사랑은 저런 거지, 고통스럽고 뜨겁고 겉잡을 수 없이 퍼지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 알았다. 나는 사랑해서 내 배에 불 붙이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구나. 친구도 내 감상을 들으면서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나는 알렉시아가 압박붕대로 점점 불러오는 배를 칭칭 감는 장면이 안쓰러웠다고 했고, 내가 알렉시아였다면 자신을 '잃어버린 아들'이라 생각하는 뱅상에게 얼마나 자기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상상된다고 했다. 친구는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대화를 나누고 알았다. 나에게 ‘불러오는 배’는 '억압된 여성성'이라는 사실을.


어린 시절 가슴이 커지는 게 싫었다. 압박붕대를 감고 다녔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을 거다. 신체의 변화에 민감한 시기니까. 가슴 커지는 걸 보고 남자아이들이 놀려대는 일도 잦았으니까.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면서 혹여나 가슴이 덜렁거릴까봐, 그걸 친구들이 보고 놀릴까봐 수근거릴까봐 무서웠다. 꽤 오랫동안 압박붕대를 하고 다녔다. 그 장면이 알렉시아가 부른 배를 붕대로 감는 장면이랑 오버랩되었다.


한 장면이 더 기억에 남는다. 알렉시아가 처음 배가 아프기 시작할 때 엄마가 의사인 아버지에게 진찰을 받아보라고 한다. 알렉시아는 아버지 앞에서 별다른 저항감 없이 맨 배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배를 만지는 데에도 별다른 거리낌이 없다. 아버지는 무심하게 알렉시아의 배를 만지더니 별 일 아니라고 한다. 알렉시아가 말한다. “좀 더 잘 봐봐요.” 불러오는 배처럼 뒤틀려버린 여성성은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꼬챙이로 질을 쑤셔도 주먹으로 배를 때려도 살이 찢어질지언정 이 아이인지 쇳덩이인지 모를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커진다. 한번 커지기 시작하니까 겉잡을 수 없다. 억압된 욕망이란 그런 것이니까. 알렉시아의 직업이 섹시 댄스를 추는 댄서라는 게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싫어하면 더 좋아진다. 내가 그랬다. 아주 어렸을 때 거세되어버린 여성성. 아버지는 바비 인형을 가지고 노는 소녀들을 혐오했다. 나는 레고랑 미니카만 가지고 놀아야 했고, 그렇게 소년이 되어야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여성혐오는 나의 여성혐오가 되었고, 나는 여자이기를 싫어하는, 그래서 더욱 여자이기를 욕망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모터쇼에서 수많은 남자들 앞에서 섹시 댄스를 추는 알렉시아. 누군가가 자기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몸을 더듬을 수 있는 직업을 택하고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면서도 자기를 사랑한다며 키스하는 남자의 귀에 비녀를 꽂아버리는 그 뒤틀어진 마음. 자기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여자친구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는 마음. 결국 그 여자친구도 죽여버리고 불특정다수의 남자 여자들도 죽여버리고, 끝끝내 그 모든 것의 원인인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죽여버린 알렉시아. 알렉시아가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집에 불을 지르고 안방의 문을 닫았을 때 알았다. 이거 내 얘기구나.


무심한 아버지. 아마도 나의 여성성은 이중으로 억압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빠도 여자혐오였지만, 엄마도 여자혐오였으니까. 엄마는 자기 자신을 싫어했다. 아버지에게 의존해서 사는 자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나랑 언니는 그런 삶을 살지 않길 바랬다.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여자가 되길 바랬다. 그래서 엄마는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금지했다. 학창시절 남자친구랑 둘이 얘기를 하고 있다가 엄마에게 걸린 적이 있다. 엄마는 우리 둘을 앉혀놓고 혼을 냈다. 그때 내가 슬쩍 남자친구의 눈치를 본 모양이다. 엄마가 내가 남자친구의 눈치를 보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후에도 그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때 정말 나에게 화가 났었다고. 엄마가 화가 나서 혼을 내고 있는데 내가 엄마가 아니라 남자친구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이 충격적이라고 했다. 그건 질투였을까? 아니면 눈치보는 내 모습이 자기 모습 같아서 꼴보기 싫었던 걸까? 엄마는 ‘남자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을 금지했다. 예쁜 옷을 입는 것도 안 되고 예쁜 속옷을 입는 건 더 안 됐다. 나는 성적인 존재면 안 되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 안에 드글거리는 뒤틀린 여성성이 생겨버린 건. 유학가서 맨날 노출이 심한 옷과 야한 속옷만 입고 다녔었다. 나는 모터쇼의 알렉시아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또 남자가 나에게 다가오면 귀에다가 비녀를 꽂아버리곤 했다. 티탄. 차가운 마음. 나는 비녀를 꽂진 않았지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 특히 여자친구들에게 그랬다. "너는 내 마음 몰라." 그 마음이 늘 있었다. 언젠가 스승이 나보고 혜원이는 마음의 문에 노크하면 자물쇠를 열 개씩 더 채우는 사람이라고 한 적이 있다. 알렉시아를 보며 그 생각이 들었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 그래서 누군가가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자물쇠를 열 개씩 더 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겠지. 그런 알렉시아에게 ‘죽일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난다. 나는 그 장면이 좋았다. 뱅상은 왜 처음 알렉시아를 데려온 날 알렉시아의 옷에서 피 묻은 비녀를 발견했음에도 그걸 버리지 않았을까. 알렉시아에게 폭력성, 즉 자신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알렉시아의 비녀를 버리지 않고 돌려주었을까. 난 그게 사랑이라고 느껴졌다. 상어를 사랑해서 상어 목에 걸린 낚시바늘을 빼주고 싶은 이가 상어가 무는 게 두렵다고 상어 이빨을 다 뽑아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철없는 알렉시아는 비녀를 돌려받고 자신의 폭력성이 거세되지 않은 것에 기뻐했다. 생물학적 아버지를 죽였듯, 새로운 아버지도 죽이려고 했다. 아버지는 위협이니까. 자기에게 언제 상처줄지 모르는 대상이니까. 새로운 아버지를 죽이려고 비녀를 들고 덤벼드는 알렉시아. 그리고 그런 알렉시아의 공격을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며 웃으며 받아내는 뱅상. 그렇게 몸싸움을 벌이다가 갑자기 춤을 추는 두 사람. 그 장면이 섹시했다. 묘한 쾌감이 있었다. 섹스 같아 보였다. 죽이고 싶은데 죽일 수 없는 존재. 뱅상은 자기가 죽을 뻔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아의 비녀를 빼앗지 않는다. 그 뒤로 알렉시아가 자기를 또 공격할까봐 경계하거나 의심하지도 않는다. “네가 날 보살피려고 하지마. 내가 널 보살피는 거야.”라고 말한다. "널 해치는 존재는 다 죽일 거야. 내가 널 해친다면 나도 죽일 거야."라고 말한다. 그래서 뱅상은 자기 배에다가 불을 붙인 걸까. 알렉시아의 치마폭에 머리를 파묻은 뱅상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랑은 나를 죽일 수도 있는 그 사람의 비녀를 빼앗지 않는 것이다. 그 피 묻은 비녀를 깨끗이 닦아서 다시 돌려주는 것이다.



죽이고 싶은데 죽일 수 없는 존재. 그건 알렉시아의 배 안에서 자라나는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아이인지 티타늄인지 알 수가 없다. 괴물은 그런 것이다. 나오기 전에는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형체로 내 몸에서 점점 손 쓸 수 없이 커져버릴 뿐이다. 알렉시아의 뱃속의 티탄은 상처받은 마음이다. 상처받은 마음은 때리고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커져버려 내 살을 찢어버린다. 내 몸에 아이가 생긴 게 싫어서 비녀로 질을 쑤시는 알렉시아의 마음을 나는 알겠다. 자동차와 섹스해서 생긴 아이다. 자동차는 친부의 상징이다. 아버지와 섹스해서 생긴 아이. 너무 좋아해서 너무 싫어하게 된,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과 섹스해서 생겨버린 아이가 어떻게 예뻐 보이겠는가. 싫어하는 아버지의 캐딜락을 욕망하는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것조차 죽이고 싶을 만큼 싫을 것 같은데. 아버지와 섹스해서 생긴 아이를 죽이고 싶을 것 같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생겨버린 그 티탄을, 그 상처받은 마음을 때려죽이고 싶을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를 불태워 죽여도 배에 잉태된 티탄은 죽지 않는다. 때리면 때릴수록 점점 커지기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마조마했다. 알렉시아가 낳은 아이가 어떤 모습일까. 포대기에 쌓여 새로운 아버지의 배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저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쇳덩어리일까. 인간일까. 그걸 궁금해하는 나도 참 근대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다. 그 '무엇'이 쇳덩어리도 인간도 아니길 바랬다. 나는 감독이 아이의 모습을 안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여줬다. 관객의 상상 따위에 맡기지 않았다. 알렉시아가 낳은 아이는 이런 모습이라고, 티탄의 척추를 가진 인간, 인간의 피부를 가진 티탄이라고 선명하게 보여줬다. 내가 알렉시아가 아이를 낳고 죽어도 상관없었던 건, 그 아이가 알렉시아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체는 다시 태어나기 전에 죽지 않으면 안되니까. 알렉시아의 귀에 박혀있던 티탄이 그 아이의 척추가 되어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나는 그 장면이 티탄, 즉 상처받은 마음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이라고 느껴졌다. 아이의 티타늄 척추가 꼭 알렉시아의 비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뱅상은 산파다. 그 아이는 뱅상과 섹스해서 생긴 아이가 아니다. 그 아이는 죽이고 싶었던 친부와 섹스해서 수정된 아이다. 그 아버지와의 아이를 새로운 아버지인 뱅상이 받아낸다. 밀어내라고 한다. 아이를 낳으라고. 내가 옆에 있다고. 뱅상은 알렉시아가 남자든 여자든 어떤 사람이든 상관 없어 하듯, 그 아이가 어떤 모습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아름답길 바란 건 알렉시아를 사랑하지 않은 내 마음이지, 알렉시아를 사랑하는 뱅상의 마음은 아니다. 그 아이는 뱅상의 잃어버린 아들이기도 하고, 다시 태어난 알렉시아기도 하고, 알렉시아에게 상처를 주었던 친부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티탄을 척추에 박은 아이가 태어났다. 삶이란 그 아이의 모습 같은 것이다.



온몸에 타투를 하고 배가 찢어져 검은 기름을 흘리며 아이를 낳는 알렉시아가 아름다워 보였다. 그 ‘사탄’ 같은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어둠 속에서 오롯이 둘이서 아이인지 쇳덩인지 악마인지 모를 그 아이를 낳는 알렉시아와 뱅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검은 기름때를 온몸에 묻히고 태어난, 척추에 티타늄을 박은 아이가 아름다워 보였다. 알렉시아의 티탄은 흉터지만, 그 아이의 티탄은 보석 같아 보였다. 아이를 낳고 싶어졌다. 배가 찢어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덧,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던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인터뷰. 여성인 나조차도 여성의 폭력성을 긍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해준 인터뷰였다. 진정으로 섹시한 페미니스트란 이런 거구나, 라는 자각과 함께.

(중략) 뱅상에 비해 알렉시아라는 케릭터를 만드는 것은 어려웠다. 도입부의 그녀는 심지어 나조차 공감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녀가 점점 인간다워질 때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녀가 점점 더 감정을 표현하고, 인간다워지는여정 자체가 흥미롭다. 초반에 인간적인 모습 없이 살인 충동과 카오스, 난폭함만 있었을 때, 나 또한 윤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그녀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인공을 맡은 알렉시아가 처음 30분을 혼자서 이끌어가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녀를 계속해서 따라가게 하려면 관객들이 그녀와 어떻게든 마주칠 수 있게 해야했다.

극중 캐릭터와 청중이 마주치고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일까? 아니다. 영화사(映畵史)에서 그것은 오해로 증명됐다. 우리는 비열하고, 나약하고, 겁 많은 인물에게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 사실을 훌륭히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극중 인물에게 비집고 들어갈 진입점은 어디일까?' 생각해봤을 때, 나의 진입점은 그녀의 몸이었다. 도입부 30분 동안 청중들이 그녀의 마음에 공감 할 수 없다면, 나는 그녀의 몸을 통해 청중들과 연결고리를 만들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과가 바로 난폭함과 바디 호러(고어물)적인 면들이다. 소위 청중과 극중 인물이 탯줄로 연결된 것처럼, 일반사람들이 평소에 느끼는 신체적 공감대를 활용했다. 예를 들어 누군가손이 잘리는 모습을 봤을 때, 당신이 같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 해도 손을 감싸거나 하면서, 고통과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당신과 관련 없다 해도 말이다. 나는 그렇게 도입부 30분동안 청중과 그녀 사이의 진입 접점을 만들 수 있었다.

나를 항상 화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 속에서 여성의 폭력성을 보여줄 때, 아직까지도 그 폭력성이 윤리적으로 수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본 모든 영화에서여성 캐릭터가 폭력적일 때는 반드시 그 폭력의 원인이 설명되었다. 그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남성 캐릭터가 이유없이 과도하게 폭력적일 때는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거나 오히려 흥미롭게 느끼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캐릭터를 보자.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잔혹한 악당인데도 불구하고 극중에서 그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다. 그가 왜 폭력을 행사하는지, 아무런 이유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 캐릭터인 경우에는 같은 취급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여자 캐릭터가 대놓고 폭력적이고 위험하게 느껴졌으면 했다. 무슨 가족 계보같은 개연성이나 설명 없이. 만약에 그 폭력성의 원인을 설명한다면, 청중들은 "그래, 그녀도 처음에는 피해자였다가 무언가 잘못되어서 이렇게 폭력적이 된 거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나는 폭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지정된 피해자로 표현되는게 싫다.

- 번역(C) 박소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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