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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Dec 04. 2022

신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영화 '허공에의 질주'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 1988), 시드니 루멧

FBI에 쫓기는 반전운동 가족의 삶과 갈등을 그린 영화. 1971년, 아더와 애니는 베트남 반전운동을 위한 실험실 폭파로 경비원을 실명하게 만들면서 FBI의 추적을 받는다. 그들 부부는 FBI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다. 그들은 미국 각지를 떠돌아 다니고 옮기는 지역마다 이름과 직업을 바꾼다.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아들 대니(리버 피닉스)는 줄리어드 음악원에 합격하지만 가족의 특수한 상황으로 입학을 포기해야 하는 일에 생기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 다음영화




리버 피닉스 잘생겼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다. 나는 정말로 대니의 여자친구 '로나'에게 감정이입해서 이 영화를 본 것인가. 로나가 대니에게 매혹되는 게 너무나도 이해되었다. 어느 날 자기 집 거실 한 가운데에 뜬금없이 나타나서 아름다운 자태로 피아노를 치는 너. 그게 로나의 입장에서 불쑥 시작되어버린 사랑의 마음을 잘 표현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나는 '로나' 혹은 '대니'에게 번갈아 가며 감정이입했다. 단 한 번도 대니의 아버지, '아더'의 입장에는 감정이입되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더'가 아들 대니를 떠나 보내주며 "가서 세상을 바꿔라. 나는 노력했다"고 말했을 때, 아더가 정말 좋은 아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바로 '그런데 세상에 아더처럼 좋은 아빠는 많지 않지'라는 생각이 따라 붙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이 서른일곱을 처먹고도 내가 부모인 '아더'가 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좋은 아버지를 둔 아들 '대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 한 것이다. 난 영원히 부모가 되지 않은 채 아이로만 남고 싶은 무기력한 정서 상태다.


이 얼굴로, 이렇게 피아노를 치는데 어떻게 안 반하겠어.


스승이 이 영화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생각해봤다. 나는 왜 '아더'에게 감정이입하지 못했는가? 나에게는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아더에게는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다. 아더에게 그 신념은 ‘자신’보다, ‘자신의 가족’보다 더 소중하다. 아더는 무고한 베트남인 수 만명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네이팜탄을 막기 위해 자신의 삶을 건다. 자기 목숨을 걸고 테러(?)를 감행하고, 그 뒤에 평생 따라붙을 무겁디 무거운 삶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진다. '나'도 아닌, 내가 사랑하는 '너'도 아닌, 내가 포함되어 있는 '우리'도 아닌, 한 번도 얼굴조차 본 적없는 먼 나라의 '너희들'을 위해서 기꺼이 '나'의 삶을 통채로 건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다. 들뢰즈의 말이 생각난다. 들뢰즈가 말했다. “좌파가 된다는 건 제 3세계의 문제들이 우리 마을의 문제보다 더 가깝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그러니까 그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는 거야.” 진정한 의미의 좌파(인문주의)란, “나, 내 아들, 내 가족, 내 친척, 내 연인, 내 지인, 내 마을, 내 나라, 내 인종”이 아닌, 그 역방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새삼스레 '사랑'은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싸는 것이 아니라,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싸는 것이라는, 이성복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최근 스승이 일회용품 사용이나 음식물을 남기는  조심하는  보고 ' 저럴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환경보호 같은  별로 관심이 없다. 패스트패션 때문에 버려지는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강이 오염되고 일회용품 때문에 동물들이 죽어가는 뉴스를 보면 마음이  좋긴 하지만  마음이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겨지진 않는다.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마음도 가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 유행에 관심이 없고 '' 배달음식에 질려서 결과적으로 패스트패션이나 일회용품을 줄이게 되는 길은 이해가 되어도, 내가 진심으로 3세계의 사람들이나 동물들의 고통이 마치  일마냥 아파서, 혹은 ‘우리 마을 일보다 정말 그게  가깝게 느껴져서 어떤 행동을 하게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에게도 아이가 있다면, 그리고 환경오염이 정말로 심각해서  아이들이 살게  삶은 환경오염과의 사투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디서 들었다. 지금 같은 오염 속도면 50 뒤에 지구에서 인간이 살기는 어렵다고. 나야 50 뒤에 살만큼 살았으니까 괜찮다 하더라도, 스승의 아이들은, 그리고 만일 내가 아이가 있다면  아이는 어떡하나. 자본주의도 마찬가지겠지.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퍼지기 , 어느 시점에  시대 사람들이 다음 세대 아이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 같은 자본주의의 기승을 어느 정도 막을  있었을 거다. 하긴 386세대들  일부는  마음으로 아더처럼 '노력'했을 테다. "가서 세상을 바꿔라. 나는 노력했다." 모든 세대에는  세대의 숙제가 있다.



‘내 아이’와 ‘모든 아이들’. 아더의 삶은 그 사이의 분열 아니었을까. 얼굴도 모르는 ‘베트남의 아이들’을 살리고 싶었던 마음과 그 마음 때문에 덩달아 고된 삶을 살게 되어 버린 '내 아이들.' 방금 구글에 네이팜탄을 검색해봤다.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는 화염이란다. 이미지를 클릭했더니 한 소녀가 너무 뜨겁다며 옷도 입지 못하고 뛰어가는 사진이 하나 떴다. 베트남의 이름모를 그 소녀와 내가 매일 같이 밥을 먹고 보고 만지는 내 자식들. 그 베트남의 소녀가 ‘보이는’ 아더의 마음은 괴로울 것 같다. '내 아이'와 '어떤 아이' 사이에서.


아더는 여느 철없는 아버지처럼 폭군이 아니다. 아더는 대니의 마음을 이해한다. 대니가 첫사랑을 시작했음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줄리어드에 가고 싶은 마음을 이해한다. 대니의 욕망이 자신과 다른 가족들의 삶을 위험에 빠뜨릴지언정, 대니의 욕망을 거세시키지 않는다. 아더는 '내 아이'와 '모든 아이들' 사이에 있으려고 애를 쓴다. 가족들에게 미안해한다. 대니에게 미안해한다. 대니가 첫사랑이 시작된 걸 알아보고 기뻐해준다. 아더는 클래식 음악을 싫어한다. 클래식은 백인 제국주의자의 음악이라고 한다. 그 백인 제국주의자 음악의 상징이 바로 줄리아드다. 줄리아드는 지금도 인종차별로 꽤 말이 많은 학교다. 그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학교에 아들 대니가 오디션을 본다. 아더는 로큰롤을 좋아한다. 갑자기 왜 노회찬 의원이 생각나지? 노동운동을 하면서 첼로 켜는 마음을 잊지 않았던 인문주의자. 애니의 생일날, 혁명가의 집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 웃음소리, 춤이 좋았다.



신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내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사람들의 고통이 내 마음에 충분히 쌓일 때 그것이 응축되고 다져져 신념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울분은 혁명의 동력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확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의 고통에 진심으로 마음이 아프면, '너'의 고통을 야기한 그 ‘무엇’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랑하는 ‘너’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무엇’들이 모이면 '구조'가 드러난다. 그 구조는 '자본주의'일 수도 있고, '남성중심주의'일 수도 있다. 그 구조를 계속 확장하다보면 결국 모든 형태의 ‘다수자’가 드러난다. 나는 왜 대니와 로나에게밖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너’들을 만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나-너'의 사랑도 해보지 못했다. 대니가 로나에게 덜덜 떨면서, 자기 가족을 모조리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고백을 하는 장면.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이걸 너한테 얘기하면 너와 우리 가족들이 위험해지니까. 미안해, 근데 나도 어쩔 수 없어. 네가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야. 널 사랑해."라고 말하는 마음. 로나가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대니를 감싸안을 수밖에 없는 마음. 그러니까 ‘너’를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걸 수밖에 없는 마음. 나를 위험으로 빠뜨리는 사랑. 나와 내 가족의 삶이 통채로 위험에 빠질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나를 받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내 진짜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 "내 이름은 사실 마이클이 아니라 대니야. 나는 테러범의 아들이고 6개월에 한번씩 이사를 다니면서 매번 이름을 바꾸고 살아가고 있어." 나는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대니의 절박한 마음을 모른다.



‘너’가 먼저인가, ‘우리’가 먼저인가. '너'가 먼저인 것도 '우리'가 먼저인 것도 아니다. '너'와 '우리' 그 사이다. 아더는 ‘우리’가 먼저였다. 아마도 인간이라면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베트남의 이름모를 아이들도 '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우리’에서 시작한 혁명가 아더의 삶에 아들 대니가 '너'로서 균열을 낸다. 나는 아더가 '대니'라는, 다음 세대 혁명가를 낳은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아더 또한 '우리'와 '너' 사이에 설 수 있는, 다음 세대 혁망가가 되지 않았을까. 아더가 대니를 보내주고 남은 가족들과 함께 픽업 트럭을 타고 다음 마을로 가는 모습에서 이전에 없던 경쾌함이 느껴졌던 건 그때문일 테지. 대니도 마찬가지다. 그가 ‘우리’를 생각하는 혁명가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진정한 의미의 ‘너’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니가 '내 아들' '내 새끼'가 먼저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로나를 '너'로서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모두가 조금씩 변한다. 아더도, 애니도, 대니도, 로나도, 애니의 아버지도, 심지어 로나의 아버지도 변한다. 차이는 n의 n승이라는 들뢰즈의 말이 떠올랐다. 하나가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는 말. '너'는 '우리' 안에 있다는 것. 하지만 '우리'는 '너'의 집합이라는 것. 그 두 삶의 진실을 모두 바라볼 수 있을 때 진정한 혁명은 시작된다. 나는 아더가 대니를 떠나보낸 장면이 그러한 의미로 보였다. 아더는 '우리'에서 시작해서 '너'를 만났다. 대니는 '너'에서 시작해서 '우리'를 만날 것이다. '너'에서 시작하든 '우리'에서 시작하든, 사랑은 같은 곳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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