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이는 헛똑똑이지.”
처음 스승으로부터 그 말을 들었던 날을 기억한다. 그 말을 하는 스승의 눈에는 답답함, 간절함, 화, 안쓰러움 같은 게 섞여 있었다. 충격이었다. 내가 이렇게 바보 같다고? 그때는 사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 스승의 눈을 보고 내가 알던 똑똑함은 똑똑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긴 했다. 어려서부터 똑똑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별명이 ‘똑순이’였다. 무언가를 파악하고 이해하고 적용하는 게 빨랐다. 철학을 할 때도 그랬다. 이질적인 학문이었지만, 공부하던 ‘가다’가 있어서 철학도 빨리 이해하고 빨리 습득하고 빨리 적용하는 편이었다. 이후 삶에서 몇 번의 헛발질을 겪고 내가 전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깨달았지만, 그래도 제법 똑똑한 편이라고는 생각해왔다. 왜 내가 똑똑함에 집착했는지 안다. 스스로 내 무기는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해서다.
“혜원이는 헛똑똑이지.” 며칠 전에 한 번 더 스치듯이 들었다. 그 말이 아팠다. “저 이 정도면 잘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 마음이 들었다. 스승 앞에서 어린애처럼 눈물을 쏟을 때는 대부분 저 마음이 들 때다. “저 지금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이 들어도 그 마음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밥 먹다 말고 아무 맥락도 없이 눈물만 쏟았다. 알고 있다. 스승이 나를 헛똑똑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비난이나 멸시가 아니라는 걸. 그 말은 누구도 나에게 해주지 못하는 걱정어린 애정이라는 걸. 그런데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저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그 마음만 들었다.
나는 변수에 약하다. 변수가 무엇인가? 예측치 못하는 상황이다. 예측치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는 에러난 컴퓨터처럼 고장이 나버린다. 다행히 예전처럼 죽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고장나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일상을 버텨낸다. 예전 같았으면 이때다 싶어서 모든 일상을 멈춰버렸을 거다. 에러 났으니까 전원을 꺼버렸을 거다.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에러가 나서 버벅거리는 상태로 메모장이라도 열어서 할 일을 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성숙해졌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강건해졌다면 그 차이다. 예전에는 틈만 나면 죽고 싶었다면, 이제는 힘들어도 살고 싶다. 그게 다다.
그날 스승과 밥을 먹으며 인공지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전의 인공지능은 먼저 원리와 규칙을 입력받은 뒤 변수가 발생하면 원리와 규칙을 수정보완해가는 방식이었다면, 최근의 인공지능은 먼저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보여주고 그 데이터 사이의 매개변수를 스스로 발견하게 한 뒤, 변수가 발생하면 처음부터 매개변수를 다시 발견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예전의 인공지능은 바둑의 원리와 규칙을 먼저 입력받은 뒤, 게임에서 지면 그 원리와 규칙을 수정보완해가는 방식이라면, 알파고는 방대한 양의 기보를 보고 스스로 바둑에서 승리하는 매개변수를 깨우친 뒤, 변수가 발생하면 다시 처음부터 바둑에서 승리하는 매개변수를 깨우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스승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예전의 인공지능이 ‘혜원’이라면 지금의 인공지능은 지혜로운 사람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 말이 아팠다. 반박했다. “‘혜원’ 컴퓨터도 데이터 양이 더 많아지면 에러가 덜 나겠죠.” 스승이 그건 맞지만, 원리와 규칙을 세우고 변수가 생길 때마다 수정하는 방식과 데이터 사이에서 계속 매개변수를 새롭게 뽑아내는 방식을 비교하면, 전자가 더 에러뜰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머리로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이미 '혜원' 컴퓨터에 감정이입이 된 상태였다. 그래서 이미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럼 ‘혜원’ 컴퓨터는 대체 어떻게 살라고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스승이 당황해서 “‘혜원’ 컴퓨터와 ‘혜원’이는 다르지! 너는 인간이잖아!”라고 말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온통 "‘혜원’ 컴퓨터"와 "헛똑똑이"라는 단어로 가득찬 뒤였다. 나는 요즘 내 자신이 싫다. 그래서 잘못 건드리면 눈물을 쏟는다. 전원만 안 꺼졌지 거의 블루스크린 뜨기 직전의 상태다. 팝업창이 제멋대로 미친 듯이 열렸다 닫히고, 응용프로그램들은 모두 렉 걸려서 버벅대기 일쑤고, 계산해낸 결과값은 엉망진창이다. 운동하고 일하고 일처리하고 소수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전원이 안 꺼지기 위해 그것만 하고 있다.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만 되뇌일 뿐이었다.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밖에 안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와 “나는 최선을 다했잖아!” 무슨 앵무새처럼 최근 나의 말과 글과 대화 모두가 그 두 가지 문장으로 귀결됐다. 그런데 조금 정신을 차려보니,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목걸이를 풀려고 최선을 다했어!” “그래서 어쩌라고.” “그걸 못 푼 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래서 어쩌라고.” 정말이지 “그래서 어쩌라고”다.
억울했나 보다. 최선을 다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안 나와서.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최선을 다한 것도 결국 다 나를 위해서였다. 난 왜 그렇게 엉켜버린 목걸이를 풀려고 했을까? ‘내’가 그 목걸이를 다시 차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그리도 악착같이 풀려고 했던 것이다. 목걸이를 푸는 과정에서 상처도 받고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꾹 참았다. 이유는 하나다. ‘내’가 그 목걸이를 풀고 싶었으니까. 스타트업할 때도 그랬다. 스타트업 할 때도 힘들고 외로웠다. 그런데 꾹 참았다. 꾹 참고 최선을 다했다. 왜? 내가 스타트업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내가 직장인으로는 성에 안 찰 것 같아서, 내가 야심이 끓어올라 한 번 크게 성공해보고 싶어서 스타트업 하고 싶었던 거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힘들어도 지쳐도 그냥 참을 것. 예전의 나도 그 정도는 했다.
최선을 다했다. 성공해보려고. 그래서 스타트업 접던 날 바로 알았다. 난 이제 더 이상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걸. 최선을 다했다. 목걸이를 풀어보려고. 그래서 바로 알았다. 난 이제 더 이상 이 목걸이를 풀 수 없다는 걸. 그건 둘 다 최선을 다 해봤기에 다다를 수 있는 결론이었다. 난 내가 집착하는 것에 대부분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삶에 미련도 적은 편이다. 최선을 다하면 미련은 남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 ‘최선’이라는 것 자체가 나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난 최선을 다했어.” 난 왜 자꾸 이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책임이 아니야, 난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 아닐까? 어쩌면 나는 아직도 ‘내 탓, 네 탓’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저 최선을 다했잖아요.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 마음 때문에 눈물이 났다. 내 최선을, 내 애씀을 봐달라고. 그걸 말로는 못하니까 눈물이 터져버렸다. 그런데 정말 어쩌라고 싶다. “그래, 혜원아. 너 최선을 다했다. 지금도 애쓰고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아직도 내가 너무 아픈가 보다. 나는 ‘혜원’ 컴퓨터가 맞다. ‘혜원’ 컴퓨터가 왜 변수에 약한지 안다. 무너지는 게 싫어서다. 코딩을 잘 모르지만 ‘혜원’ 컴퓨터가 어떻게 짜여져 있을지 알 것 같다. 코딩에 예외 처리라는 게 있다. 변수가 발생하면 그 예외 처리 구문에 한땀 한땀 집어넣는다. 변수가 발생할 때마다 그걸 하나하나 추가하다보면, 나중에는 원래 구문보다 예외 구문이 더 길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전형적으로 느리고 지저분한 코드다. '스마트하지 않은' 코드다.
인공지능에 관심이 많지만 실제로 인공지능이 어떻게 딥러닝을 하는지 이해하긴 어렵다. 인공지능은 정말로 어린아이가 처음 언어를 배우듯이 ‘러닝’을 하기 때문이다. 백지에서 시작한다. 원리, 규칙은 없다. 알파고가 나오기 전 단계의 인공지능이 어떻게 벽돌깨기 게임을 배우는지 본 적이 있다. 그 인공지능에게 가르쳐주는 건 딱 하나다. 아니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목표 하나만 설정해준다. “게임에서 이기기.” 그 인공지능은 벽돌깨기 게임의 룰을 아예 모른다. 그래서 애도 안 할 법한 짓을 남발한다. 벽돌이 없는 구멍에 공이 빠지면 바로 게임이 끝나는데, 그런 룰조차 입력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마구잡이로 공을 구멍에 던져 1초만에 게임이 끝난다. 하지만 그 인공지능은 지치지 않는다. 그 인공지능이 잘하는 건 그것밖에 없다. 밤낮이고 계속 게임을 한다. 처음 게임기를 갖게 된 네다섯살 아이처럼. 그러면서 점점 배운다. 어떻게 배우는지 알 수 없다. 그 인공지능은 게임의 승리원칙을 배우는 게 아니니까. 인간적으로 바꿔 말하자면, 그 인공지능은 감을 배우는 거다. “이렇게 하면 이길 것 같은데?” 하는 감. 물론 그 감이 처음에는 틀리기 일쑤다. 처음 알파고의 승률은 처참했다. 하지만 알파고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 점점 더 그 감이 정교해진다. 스승이 그게 인간의 직관과 비슷하다고 했다. 이세돌은 그 76수를 계산해서 놓은 것이 아니다. “거기 말고 놓을 자리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건 감이다. 이세돌이 온몸으로 겪은 모든 대국의 경험이 한곳으로 응집되어 마치 레이저 포인트로 가리키듯 그곳에 놓으라고 했을 거다. 이세돌까지 가지 않아도, 시험만 많이 쳐봐도 안다. 잘 모르는 문제가 나와도 “왠지 이게 답일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 느낌은 대부분 맞는다. 그런 게 원리와 규칙이 아닌 감과 직관의 세계일 것이다.
나는 ‘혜원’ 컴퓨터가 아니다. 나는 ‘혜원’이다. ‘혜원’은 변수를 예외 구문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그렇게 처리할 수가 없다. 컴퓨터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아프지 않으니까. ‘혜원’은 그럴 수 없다. 변수를 예외 구문으로 처리하고 나갈 수가 없다. 변수는 타자고, 타자는 예외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픈 건 내가 컴퓨터가 아니라서 그렇다. 타자를 처리할 수 없기에 나를 처리하느라 이렇게 고통스러운 거다. 나를 처리하는 과정을 많이 겪어보지 않아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거다. "나를 버리고 너를 이해한다." 그 과정은 늘 고통을 수반한다. "원칙-예외-원칙'-예외-원칙''-예외-..."의 프레임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예외가 발생할 때마다 아무리 정교하게 원칙을 수정해간다고 해도, 결국 ‘원칙-예외’라는 이분법의 틀로 세상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의 틀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귀 짤린 고양이'도 고양이고, '꼬리가 없는 고양이'도 고양이고, '털이 긴 고양이'도 고양이고, '집채 만한 고양이'도 고양이라는 것. “고양이는 귀가 두 개다”라는 원칙을 입력받은 인공지능은 '귀 짤린 고양이'를 ‘고양이 아님’으로 처리해서 에러를 내겠지만, 알파고는 '귀 짤린 고양이'나 '꼬리가 없는 고양이'를 보고도 “응? 왠지 이것도 고양이 같은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알파고가 변수에 더 유연한 건 당연한 일이다. ‘혜원’ 컴퓨터는 귀 짤린 고양이 앞에서 “이게 어떻게 고양이야, 귀가 없는데!”라고 외치고 있을 테니까. 90년대 알고리즘으로 평생 살아오다가, 이제 와서 ‘딥러닝’하려니 죽을 맛이다. 최신 알고리즘으로 업그레이드 중이라서 전원은 안 꺼졌는데 이렇게 버벅거리나 보다.
이제 “난 최선을 다했어!”라고 되뇌이는 삶에서 그만 벗어나야겠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기본이다. 사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다지 칭찬받을 일도 아니다. 집착하는 만큼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거니까. 내가 너무 소중해서, 내가 죽기 무서워서, 최선을 다한 거다. 그건 적어도 내 단계에서는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기본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업그레이드를 할 시간이 왔나 보다. 나는 컴퓨터가 아니다. 나는 인간이다. 아무리 ‘원리와 규칙’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편한 강박증자로 길러졌을지라도, 나는 기본적으로 ‘딥러닝’이 가능한 인간이다. 다만 초기단계의 알파고처럼 직관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을 뿐이다. 데이터가 적어서가 아니다. 실전이 적어서다. 처음 알파고는 몇 백만 개의 기보를 공부한다. 하지만 그 기보만으로 알파고가 딥러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한 다음부터는 계속 실전 대국을 한다. 알파고가 이세돌이랑 대국하기 전에 인터넷 바국 사이트에서 자기 존재를 숨기고 수만명의 사람들과 대국을 한 건 유명한 사실이다. 몇 백만 개의 기보를 밤낮으로 공부한 알파고도 실전을 한다. 그 실전으로 점점 정교해지는 거다. 일주일 만에 몇 백만 개의 기보를 공부할 수 있는 ‘개똑똑한’ 컴퓨터조차 실전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게 있다는 말이다.
나는 헛똑똑이가 맞다. 삶의 실전을 많이 치러보지 않은 내가 삶의 변수 앞에 약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전히 논리는 나의 무기가 맞다. 아니, 논리보다는 냉정함이 내 무기다. 어느 정도 감정이 지나간 뒤에는 상황을 냉정하게 복기해보려고 애쓴다. 그게 내 무기다. 지치지 않고 복기하며 나아가야겠다. “잘 사는 것.” 나에게 입력된 목표는 그거 하나다. 아직 나는 잘 사는 게 뭔지 잘 모른다. 그래서 구멍이 뻥 뚫린 천장에 냅다 공을 집어넣고는 '왜 게임이 끝났지?'라고 어리둥절해 한다. 벽돌깨기 게임에서는 최대한 벽돌을 많이 깨는 게 이기는 거다. 그 룰조차 모른 채 시작하는 게 삶이다.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 아직 감이 없다. 벽돌에 박아보고 구멍에 골인도 시키며,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 알아가는 것. 그게 ‘딥 러닝’이고, 그게 삶 그 자체 아닐까. 깊게 배우고 있다. 온몸으로. 헛똑똑이가 아닌 진짜 똑똑이가 되고 싶다. 진짜 똑똑이는 '귀 짤린 고양이'도, '꼬리가 없는 고양이'도, '집채 만한 고양이'도 다 고양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진실은 그런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