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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r 31. 2023

일방통행로

작년 겨울이었다. 스승과 친구들과 함께 겨울 여행을 갔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놀았다. 아직 입김이 새하얗게 나오는 추운 겨울 밤, 별빛이 반짝이는 까만 밤하늘 아래서 친구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모닥불에 손과 발을 쬐어가며 친구들의 노래를 들었다. 스승이 혜원이도 한곡 불러보라고 했다. 무슨 노래를 불러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원체 빼는 성격은 아니라서 노래방에서 분위기 띄우려고 부르던 노래라도 불러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불현 듯 머릿속에 뜬금없는 노래가 하나 떠올랐다. 초등학생 때 듣던 <뮬란>의 OST였다. 그 노래를 초등학교 때 이후로 들은 적도 부른 적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온 마음이 지금 그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외쳤다. 친구가 노래를 틀어주고 핸드폰으로 가사를 봤다. 노래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뮬란이 말했다.


“나는 완벽한 딸도, 완벽한 신부도 될 수 없어요. 내가 진짜 ‘나 자신’이 되면 가족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겠죠.“


나는 그 노래가 그런 가사인 줄 몰랐다. 그런데 초등학생이었던 나도 알고 있었나 보다. 나는 완벽한 딸도, 완벽한 신부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다음 날 스승에게 짧은 글 하나를 받았다.


‘뮬란’은 “나는 완벽한 신부도 완벽한 딸도 되고 싶지 않아요.”라고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공포와 회한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씨름할 때, 비로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가까운 이들은 나 자신이 되는 길에 장애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허상 같은 것이다. 근본적인 장애물을 넘어설 때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허상. 별들이 수놓았던 밤하늘 아래서 불렀던 너의 노래가 그 공포와 회한을 넘어서는 애가哀歌가 되기를 바란다.


그 짧은 글이 마음 속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나는 지금 그 노래가 애가哀歌가 될지, 아니면 그저 그런 신세한탄이 될지의 갈림길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삶은 일방통행로다.”


발터 벤야민이 쓴 <일방통행로>를 읽은 적은 없다. 하지만 스승이 종종 하는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 삶에 파도가 몰아쳐서 나는 등 떠밀려 어느 곳 앞에 서게 되었다. 그렇다. 갈림길 앞이다. 내 삶을 살아가는 어른이 될지, 아니면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봐 무섭다”며 움츠러들어 신세한탄이나 하는 어린아이가 될지를 가르는 갈림길 앞. 사실 이렇게 빨리 이곳에 서게 될지는 몰랐다. 나는 삶을 유예하는데 익숙하다. 삶을 유예하다 보니까 삶이 나를 덮쳐 이곳에 서게 했다. 참 우스운 일이다. 등 떠밀려 어버버 대다가 이곳에 섰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곳이다. 이곳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내 모습이 있는 곳이다. 내가 늘 가야한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 내가 가장 가고 싶지만 내가 가장 가기 싫은 길. 초등학교 때부터 곁눈질로 쳐다보기만 했던 길앞이다. 늘 초입에서 서성대기만 했던 길 앞이다.


우울증의 이미지가 있다. 나에게 우울증의 이미지는 삼면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ㄷ자 공간에서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이미지다. 우울증의 느낌은 사방팔방이 막힌 공간에 갇힌 느낌이 맞다. 그런데 삶에 사방팔방이 다 막혀 있는 공간은 없다. 삶은 언제나 한 방향만은 뚫어놓는다. 다만 내가 막혀 있는 삼면을 바라보고 있기에, 내 뒤에 뚫려 있는 마지막 한 면을 보지 못할 뿐이다. 삶은 일방통행로다. 한쪽으로는 늘 뚫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시선은 사방을 한꺼번에 보지 못한다. 인간의 시야각은 가만히 있을 때는 180도, 눈알을 굴려도 최대 240도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 몸 바로 뒤에 있는 공간은 몸을 틀지 않는 이상 절대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우울증에 빠지면 몸을 돌리지 않는 이상 옴짝달싹 못하게 갇혀 있는 느낌이 든다.


우울감이 찾아왔다. 이것은 우울감이지 우울증은 아니다. 나는 이제 내가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삶에 큰 곤경이 찾아온들, 언제나 내 앞에는 한 쪽의 길이 틔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는 ㄷ자 공간에서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ㄷ자 공간에서 벽을 등지고 앉아 있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스승이 내 몸을 돌려놓았다. 삶의 곤경 앞에서 내가 또 하염없이 벽만 바라보며, 이 벽을 어떻게 부숴야 하나, 이 벽을 어떻게 뛰어넘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스승이 조용히 옆에서 알려주었다. 혜원아, 벽을 보지 말고 뒤돌아 네 앞에 주어진 길을 봐라. 그리고 그 길을 가라. “너는 표류하는 삶을 살지.” 스승이 최근에 나에게 해준 말이다. “이제 네 삶을 열어라.” 스승이 최근에 나에게 해준 말이다.




“내 삶을 어떻게 열지?” 바보같이 그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내 삶을 어떻게 열긴. 그건 “어떻게 걷지?”만큼이나 공허한 질문이다.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만 “사랑은 어떻게 하는 거지?”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것 아닌가. 사랑하고 싶을 때는 “사랑은 어떻게 하는 거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냥 애를 써서 사랑한다. 질문은 주춤거릴 때만 하는 것이니까.


내 삶을 어떻게 여는지 알고 있다. 나는 벽을 등지고 앉아 있으니까. 내 앞에 길이 있는데 그 길을 어떻게 걷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삶은 참 아이러니하다. 어제 아버지에게 뜬금없는 연락이 왔다. 붓글씨가 취미인 아버지는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호’를 지어서 선물하는 게 낙이다. 아버지가 내 ‘호’를 지었다며 ‘일궤(一簣)’라는 한자를 보내왔다. 아마도 다가오는 내 생일에 그 ‘호’를 붓글씨로 써서 선물하고 싶은 모양이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논어에 ‘위산일궤(爲山一簣)’라는 말이 있다며 ‘산을 만드는 일도 한 삼태기의 흙부터’라는 뜻이란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와 비슷한 의미인가 싶었다. 그런데 앞에 ‘위산’을 떼고 ‘일궤’만 남기니 기분이 묘했다. 한 줌의 흙.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 ‘아봉’이었다. 무려 ‘아시아의 봉우리’가 되라는 의미에서 붙여준 별명이었다. ‘아시아의 봉우리’가 되기 위한 ‘한 걸음’. ‘산’을 만들기 위한 ‘한 줌의 흙’. 그것 때문에 나는 늘 한 줌의 흙을 밟기도, 한 걸음을 내딛기도 어려웠던 것 아닌가. 집에 와서 다시 논어를 찾아봤다. 그런데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미묘하게 의미가 달랐다. "땅을 평평하게 고르는 일을 할 때 겨우 한 삼태기의 흙을 갖다 부었을 뿐이라도 일을 진척시켰다면 다름 아니라 바로 내가 앞으로 나아간 것이라네." 이건 걸은 만큼이 곧 나라는 뜻 아닌가.



힘들려고 하지 않는 것. 반복을 싫어하는 것.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쌓이면 편한 선택을 해버리는 것. 나를 세상에 내던져 제대로 시험해보려고 하지 않는 것. 조금만 힘들면 안온한 곳에 숨으려고 하는 것.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보지 않는 것. 정면승부를 하지 않는 것. 전부 다 내가 싫어하는 모습이다. 삶의 곤경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내 삶에 파도가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난 또 긴 시간 내가 직면해야할 문제를 외면하며 그 주변을 서성이며 삶을 유예했을 테다. 삶의 허영은 오직 고통으로만 벗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내 삶은 좆된 것 같다. 다시 넝마조각 입고 나무칼을 차고 레벨 1로 돌아간 느낌이다. 나는 삶을 잘 살아보고 싶다. 뮬란을 부르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 삶을 잘 살아보고 싶었다. “삶을 잘 살고 싶다!”고 외친다고 삶이 잘 살아지는 게 아니라고 스승이 말했다. 삶을 잘 산다는 건, 삶을 잘 사는 순간을 쌓아가는 것밖에 없다. 나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큰 사람 역시 “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외친다고, 또 겉으로 대인배 행세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큰 사람 되는 길은 일단 길을 걷는 것이다. 마음이 메말랐을 때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면 다시 불이 나지 않을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풀 한포기를 심는 것이다. 매일 풀을 심어야겠다. 다행히 날은 좋다. 나에게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사람들이 있으니까. 햇살마저 좋은데 마음이 메말라버린 건, 내가 부지런히 풀을 심지 않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한 줌의 흙. 한 포기의 풀. 한 걸음. 생각해보니 이 역시 외치는 글이다. 외치는 글이 외치는 글로 끝나지 않으려면, 삶으로 외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삶은 확증이다. 삶은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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