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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pr 27. 2023

행복한 관종을 위하여

“들뢰즈가 스티브 잡스면, 저는 아이폰 케이스 만들어 파는 사람 같은 거에요.”


가끔 스승이 수업 시간에 하는 이야기다. 스승의 수업을 듣다보면, 간혹 스승이 가르치는 철학적 사유와 스승을 동일시해서 스승을 지나치게 신격화하는 사람들이 생기곤 한다. 그때 스승이 자기 위치를 있는 그대로 알려주려고 자본주의에 빗대어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서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이라는 개념 자체를 세상에 선보인 인물이라면, 인문주의에서는 들뢰즈나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들이 그 위치고, 자기는 스티브 잡스가 만든 아이폰을 받아 거기에 어울리는 케이스를 만들어 파는 사람의 위치라는 것이다. 즉, 선배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훌륭한 철학적 사유에 대중들이 친근함을 느낄 만한 연결고리를 덧대어 ‘확산’시키는 게 현재 자신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난 스승이 그 이야기를 할 때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는 사람의 아우라가 있다. 그런 사람은 분명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자기비하나 위축감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단단한 자존감이 느껴진다.


“들뢰즈가 스티브 잡스고 스승이 아이폰 케이스 만들어 파는 사람이면, 전 그 케이스 만드는 회사의 고객센터 담당입니다.”


이번에 <질 들뢰즈 A to Z>라는 DVD를 가지고 6주짜리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 첫 시간에 이렇게 내 소개를 하며 빙긋 웃음이 났다. 스승이 자신을 폰 케이스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그럼 그 폰 케이스에 붙이는 스티커 만드는 사람인가?’라고 잠시 생각했었다. 하지만 스티커도 자기가 만드는 것이니, 아직 나는 스티커를 만들어 파는 사람도 되지 못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지금 나의 역할은 무엇이지? 생각해보니 고객센터 담당이 제일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폰 케이스 회사 사장의 영업력에 매료되어 아이폰 구입을 고려하고 있는 고갱님들에게는 당연히 이런저런 질문이나 고민거리가  많을 수밖에 없다. 내 스승의 수업에 매료되어 인문주의의 길 앞에서 머뭇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이폰이나 폰 케이스, 스티커는 못 만들어도, 그 사람들의 이런저런 질문이나 고민거리에 대답해주고 공감해줄 만한 역량은 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 나의 역할을 폰 케이스 회사의 고객센터 담당으로 정한 것이다.



사실 그 수업은 몇 년전, 스승이 나에게 이제 세상에 좀 나가보라며 그 첫 걸음으로 물려준 수업이다. 나는 관종이라서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관심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수업을 하는 것 자체는 나에게는 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이런저런 수업을 물려받아 하면서 늘 마음속에 따라붙는 의구심이 있었다. ‘나는 정말 이 수업을 할 만한 자격이 있나?’ 항상 그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사실 스승만큼 철학자들을 사모하는 것도 아니고, 사모하지 않기에 그 만큼 잘 아는 것도 아니며, 내가 정말 인문주의적 삶을 지향하고 있는지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마 내가 스스로 내 위치를 파악해서 그런 것 같다. 수업 첫 시간에 말했다. 나는 들뢰즈를 잘 모른다. 하지만 들뢰즈를 좋아하는 스승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누구보다 많이 고민해보았다). 나는 내 철학이 없다. 하지만 내가 5년간 철학을 공부하면서 내 삶으로 느낀 경험과 고민을 이야기해줄 수는 있다. 그래서였을까. 이번 수업이 가장 즐거웠다. 가장 나다웠고 가장 자연스러웠다. 매 수업에 임하는 마음이 작은 공연을 준비하는 마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6주의 수업을 마치고 나니, 이제 더 이상 이 수업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모자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참 관심 받는 것을 좋아한다. 관종 중의 상관종이다. 어린 시절, 내가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어떤 아이가 엄지 손가락을 펴며 “나랑 놀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라고 하자, 내가 갑자기 “나랑 놀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라고 똑같이 말하며 그 아이에게 붙으려는 친구들을 다 뺏어왔다고 한다. 그게 나의 ‘관종’의 역사의 원장면이다. 나는 내가 어느 자리에서든 관심 못 받는 것을 못 견뎌했다. 공주병 같은 관종은 아니었지만, 연예인 같은 관종이라서 재밌는 얘기를 하든 흥미로운 얘기를 하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에게 집중되어야 할 관심이 다른 친구에게 가면 질투가 폭발했고, 어떻게든 그 관심을 다시 뺏어오려고 오기를 부렸다. 나의 지난 삶의 성취는 다 그 질투심의 결과였고, 지금도 남아 있는 우울증과 뒤틀린 마음은 그 질투심의 상흔이다. 어떻게든 발버둥쳐서 ‘주인공’이 되면 성취였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우울증에 빠졌던 것이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관종끼가 점점 잣아들었다. 정확히는 ‘나만 관심 받고 싶은 마음’이 점점 줄어들었다. ‘나만 관심 받고 싶은 마음’이 내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파괴하는지를 먼저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 당시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단독적인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 것 같다. 사실 ‘나만 관심 받고 싶은 마음’은 관심에 굶주려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배가 너무 고프면 다른 사람이 내 음식을 뺏어갈까봐 전전긍긍하게 되듯이, 관심이 너무 고프면 다른 사람이 내가 받을 관심을 뺏어갈까봐 전전긍긍하게 되니까. 그런데 어떤 이가 나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주면, 더욱이 내가 관종짓을 하지 않아도, 그냥 내가 나로서 존재만 해도 관심을 주면, 더 이상 나는 관심에 배고픈 상태가 아니게 된다. 그렇게 어느 정도 관심에 배가 부르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음식을 나눠주고 싶어지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관종끼는 그 과정을 거쳐서 잣아들게 되었다.




한 동안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게 기쁨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나만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나서,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내가 주인공이 되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을 기쁜 마음으로 주인공을 만들어주었다. 친구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친구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친구들의 공연을 돕고, 친구들이 자기 욕망을 좇을 수 있도록 내 나름으로 길을 닦아주는 일. 그게 참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또 마음 한편이 약간 공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기분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알겠다. 나는 ‘나만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너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갔다가, 다시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좋은 삶은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과 ‘너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을 오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나는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고, 철학을 배우고 어느 시점부터 인문주의적 삶이 무서워지면서 ‘너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 같다. 정직히 말해, 앞으로는 스승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며, 스승 뒤에 있고 싶었고, 뒤로는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며, 좋은 선배 노릇을 하고 싶었다. 물론 ‘너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진심이다. 나는 더 이상 무대 뒤에서 숨어서 무대 위의 주인공을 시기질투하는 스태프는 아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이에게는 애초에 스태프 역할을 해주지 않을 테니까. 나는 내가 자발적으로 스태프를 해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고, 그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 무대 뒤에서 함박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싶다.



스승의 책을 편집하고 있다. 사실 편집자라는 업은 관종인 나에게 어울리는 직업은 아니다. 나는 늘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 남의 이야기는 잘 듣지도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스승의 책을 편집하고 있다 보면 잔잔한 기쁨이 차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매만지는 것은 참 소중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옷을 빨고 다릴 때 느껴지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곳을 살펴보고 청소할 때 느껴지는 마음. 그런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 글을 쓸 당시에 스승의 감정선을 타고 옆에서 함께 여행하는 느낌도 든다. 그 장면과 감정들이 마음을 뭉클하게 채워주는 느낌이 든다. 언젠가 스승도 스승이 좋아하는 철학자들의 책을 읽으며 비슷한 마음을 느꼈겠지.


무 자르듯이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스태프 역할을 너무 많이 했던 것 같다. 행복한 스태프였지만, 그것은 반쪽만 채워진 상태였다. 정말 행복한 삶은, 하루는 행복한 스태프가, 하루는 행복한 주인공이 되는 삶이다. 앞으로도 계속 나는 행복한 스태프 역할을 할 것이다. 그게 나의 기쁨이니까. 하지만 다시 ‘주인공’이 되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어쩌면 예전에 ‘나만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에 너무 후달린 나머지, ‘주인공’이 되려는 마음 자체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제는 폰 케이스에 붙이는 스티커 정도는 만들 수 있다. 나에게 그런 역량은 이미 있다. 행복한 주인공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행복한 스태프도 되어야겠다. 좋은 편집자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좋은 저자가 되어야겠다. 어쩌면 진정으로 행복한 스태프, 진정으로 좋은 편집자는 행복한 주인공, 좋은 저자만이 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내 책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편집해주는 날을 꿈꾸며.



누구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이 빛날 무대가 있어야 한다. 작은 공연이어도 좋고 애틋한 연애여도 좋고, 가족이어도 좋고, 글쓰기여도 좋고, 운동이어도 좋다. 누구나 빛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자신 이외의 사람들을 모조리 조연으로 전락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인공만이 기꺼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는 또 예쁘게 단장하고 세상에 나설 테다. 나만 주목받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주인공 잘 있었는가?” “예!”

- 철학자 황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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